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의 식성에 따라 음식문화의 특이현상이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다.

 

칼국수 시대도 있었고, 홍어 시대도 있었고, 막걸리가 국적 항공기 기내 음료로 보급되던 시대도 있었다. 또 어떤 비즈니스 감각에 탁월한 후임자는 국가를 사기업의 이윤창출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중세시대에도 왕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저자거리 주막에서 풍문으로 떠돌다 백성들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왕이 방탕하면 백성도 따라서 방탕하면서도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생존권력 경쟁에서 승리한 챔피언 침팬지는 암컷을 비롯한 모든 생존의 조건들을 독차지한다고 한다. 나눔은 없고 버린 것만 피 묻은 휴지조각처럼 찢기어져 분배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것은 아예 태생부터 없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다는 상호 의존적인 공동체 의식도 당연히 없다.

지금 동물의 왕국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 같은가? 아니면 동물의 왕국과 이 시대 어떤 나라를 비교 고찰하고 있는 것 같은가?

그래서 다시 묻는다. 과연 정명(正名)이란 무엇인가?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君君, 父父, 子子)”이라고 했다. 이름(名)은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정치의 요체이며, “(이름)답게” 하도록 바로잡는 것이 정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개가 인간처럼 굴고, 인간이 개처럼 행동한다면 이름값을 못 하는 것이다, 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거짓된 이름값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곧바로 알아차린다.

우리 마음속에는 그런 것을 알아차리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완용은 당대의 달필이었지만, 우 리는 이완용의 달필 휘호보다 김구 선생의 투박하고 건강한 휘호를 소장하기를 원한다.

어떤 속임수를 써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이 시대, 우리 부모들은 부모다우며, 스승들은 스승다운가? 정치인·학자·지도자·노동자들은 각각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남자는 남자다우며 여자는 여자다운가? 이름의 가면 뒤에 숨은 채로 꼼수를 궁리하면서 와전된 가치와 사리사욕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얻은 반대급부를 ‘모범’의 대가로 생각하는 전도몽상을 벌 나비처럼 평화롭게 꿈꾸고 있지는 아니한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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