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후의 선사탐색-태고의 법손들]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불교 상징 독보적 존재
임제의 법통 정립시켜
간화선 체계 확립도 이뤄
근대 고승까지 연재 계획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년)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수행의 전환점에서 한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와 근대는 물론이고 현대 한국불교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인

 

물이다. 때문에 한국불교 태고종은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종풍(宗風)을 선양하여 전법(傳法)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역시 태고 보우를 조계종의 중흥조로 모시고 있다. 그의 선사상과 수행이 종파를 초월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우수성을 표방하는 기초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태고 보우는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이다. 경기도 홍주(洪州)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하여 신라 말 고려 초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입문했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혼자서 참구해 깨달음의 첫발을 내딛었고, 26세에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후 경전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보우는 경전은 방편일 뿐 참다운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참선에 전념했다.

한국불교에서 태고 보우의 가치는 임제법통(臨濟法統)을 인가받은 것이었다. 예컨대 1346년, 46세였던 보우는 원나라로 건너갔고, 그 이듬해 7월에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임제종 18대 법손인 석옥 청공(石屋 淸珙, 1272~1352)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보름 정도 머물렀다. 보우는 청공에게 ‘태고암가’를 지어 올렸고, 청공은 이 노래를 보고 바로 득도의 경지라 탄복하면서, 자신이 노래로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태고에게 그 깨달음을 인가했다. ‘태고암가’는 자신이 왜 ‘태고’라는 호를 취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내 이 암자에 살고 있지만 나도 알지 못해, 깊고 깊고 좁고 좁지만 옹색함은 없다. 하늘 땅을 덮개 삼아 앞뒤 없으며, 동서남북 어느 한 곳에 머무름 없다(吾住此庵吾莫識 深深密密無壅塞 函蓋乾坤沒向背 不住東西與南北).”로 시작되어 어디에도 매임 없이 초탈한 선사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청공은 ‘태고암가’에 발문을 지어주고, 가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이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 또한 청공은 보우에게 ‘불법이 동방으로 건너갔다(佛法東矣)’며, 그를 칭찬한 뒤에 “노승이 오늘에야 300근의 무거운 짐을 놓아버려서 그대에게 대신 걸머지우게 하니,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자게 되었다”라고 했다. 보우는 그해(1347년) 10월 무렵, 다시 연경으로 돌아왔다. 보우가 청공으로부터 법맥을 받았다는 소문은 이미 원나라에 퍼져 있었고, 이것은 원나라에서 자란 고려의 공민왕 역시 보우의 이런 행적을 지켜보았다. 1348년, 48세의 보우는 귀국했고, 1352년 4월 공민왕의 청으로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보우는 왕사로서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해 9산선문과 불교의 여러 교단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승가의 규율을 강조코자 백장청규(百丈淸規) 사상을 강조하여 교단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태고 보우는 정치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혼란했던 고려 말기에 불교내외의 모순을 쇄신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삽화=강병호 화백
삽화=강병호 화백

 

한편 지눌이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했던 반면, 보우는 오롯이 선(禪)만을 강조했으며, 염불에서는 그동안 불교계에 유행했던 부처에게 만 의지했던 타력염불(他力念佛)을 따르지 않고, 유심정토(唯心淨土)·자성미타(自性彌陀)를 강조한 자력적인 염불선(念佛禪)을 강조했다. 그리고 ‘조주의 무(無)자’ 화두 참구를 강조했다. 보우는 무자 화두가 간화선 수행 중에 최고이며, 이 무자 화두가 간화선의 출신활로이며, 선이 지향하는 유일한 길이자 최고의 경지라고 강조했다. 결국 태고 보우는 화두참구→깨침→본색종사 참문→구경결택 등으로 이어지는 간화선 체계를 확립했고,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조선불교를 통해 전수했다.

지금 이 사문(四門)의 자손들이 임제(臨濟)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그 본원(本原)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동방의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소온(小穩)에게 전하고, 소온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벽송(碧松)에게 전하고, 벽송은 부용(芙蓉)에게 전하고, 부용은 등계(登階, 청허 휴정)에 전하고, 등계는 종봉(鐘峯, 사명 유정)에게 전하였다. 이 팔세(八世) 가운데 등계가 더욱 미친 물결을 들이키고 퇴폐한 기강을 바로 잡는 힘이 있어서 뼈를 바꾸는 신령스러운 방편과 눈을 뜨게 하는 금칼로 선교(禪敎)의 혼잡에서 옥석(玉石)을 구별한 사람, 보검을 휘두를 때 아무도 그 칼날을 범하지 못하는 사람, 입을 다물고 고요히 관(觀)하여도 식은 재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윗글은 청허 휴정이 1560년 무렵 임제종을 강조한 이후 1625년 제자 편양 언기(鞭羊彦機)가 조선불교 법통의 연원을 태고보우로부터 정립시키고, 청허 휴정이 폐허 속에서 밖으로는 국가적 기여와 안으로는 선교학을 정립시키는 등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후 청허 휴정의 법맥은 면면히 이어져 근대에는 경허 성우(鏡虛惺牛)와 용성 진종(龍城震鍾) 등으로 이어졌다.

이 글은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태고 보우의 선사상과 수행의 면모를 태고 이후의 법손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기적으로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를 아우르며,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불교의 고승으로까지 계승될 것이다.

오경후 (吳京厚, OH Kyeong-Hwo) sosimsimgo@hanmail.net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불교동향사·<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한국근대불교사론(근간)·석전영호대종사(공저) 등이 있으며, 「한국근현대불교의 태동과 경운 원기」 등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대한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과 불교학술원에서 연구교수와 전임연구원으로 일한 바 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이다.

강병호

충남대 철학과 졸업

 

운평만화공모전,서울만화전, 동아 LG공모전 등에서 수상.

작품집으로<하수와 고수><공감><생각나무><자장면과 바나나><올빼미 서당>등 다수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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