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당집 선사들께 삶의 지혜를 배운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바쁨’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바쁜 생활을 하고 있고, 그래야 겨우 먹고 산다. 어떤 사람들은 워크홀릭(일중독)에 걸려서 바쁘지 않고 한가하면 오히

려 불안해 한다. ‘이러다가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몇 년 만 더 열심히 일하면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또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단어 중 하나가 ‘경쟁’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도태된다. 이와 같은 지나친 경쟁이 사람들을 병들게 한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요즘 한국사회는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져서 그런지, 바쁜 생활이 행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니 힐링(Healing)이니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또 서울시에서는 매년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냥 잘 멍때리기만 하면 상금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멍때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을 우리는 ‘무위(無爲)’라고 한다. 무위란 ‘하지 않음’이다. 원래 무위는 도교에서 중시한 개념이었다. 『도덕경(道德經)』에서는 ‘도는 항상 하지 않지만 되지 않음도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고 하였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행위, 즉 유위(有爲)로는 진정한 것을 얻을 수 없다. 무위야말로 진정한 것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무위의 개념은 나중에 선종에서도 중시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음’, 즉 무위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몸을 움직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참선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알 것이다. 번뇌를 가라앉히기 위해 방석을 깔고 앉으면 오히려 더 마음이 분주해진다. 몸이 가만히 있으니 마음이 오히려 바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하고 있다. 즉 유위가 습관이 되어서 항상 바쁜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무위란 어떤 것일까? 예컨대 다음과 같은 상태일 것이다. 중국 당나라의 대주혜해(大珠慧海) 선사는 원율사(源律師)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율사가 와서 묻기를 “화상은 수행함에 있어서 힘을 들입니까?” 하니 혜해가 말하기를 “힘을 들입니다.” 율사가 “어떻게 힘을 씁니까?” 묻자 혜해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잡니다.”했다. 율사가 이에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힘을 쓰지 않습니까?” 하니 혜해가 “같지 않습니다.”했다. “어떻게 같지 않습니까?” 율사가 물으니 혜해가 “그들은 밥 먹을 때에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백 가지로 추구하고, 잠 잘 때에도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백 가지로 사량(思量)합니다. 그러므로 같지 않은 것입니다.”했다. 그러자 율사는 말문이 막혔다.

참다운 무위란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피곤하면 잠만 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밥 먹을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각을 한다. 때로는 걱정이 너무 많은 나머지 밥맛도 없다. 또 ‘밥이 너무 질다’는 등 밥에 대해서 갖가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잘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자는 법이 없다. 오늘 있었던 일을 후회하기도 하고, 내일 일을 걱정하기도 한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고 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현재는 이미 과거로 흘러가고 있으므로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어떤 일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일에 대해 언제나 걱정하면서 산다.

『조당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중국 당나라의 약산유엄(藥山惟儼)선사와 스승인 석두희천(石頭希遷) 사이의 문답이다.

약산유엄이 어느 날 앉아 있는데 석두희천이 묻기를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그러자 약산이 답하기를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했다. 석두가 “그렇다면 한가로이 앉아 있는 거로군.”하니 약산이 “한가로이 앉았다면 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고 답했다. 다시 석두가 “그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물으니 약산은 “일천 성인(聖人)도 알지 못합니다.”고 했다. 그러자 석두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원래부터 같이 앉았으되, 이름도 모르고 있는 그대로 어울려서 가노라. 옛적의 현인도 알지 못했거늘, 하찮은 범부가 어찌 밝히랴?”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앉아 있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한가로이 앉아 있다’는 것은 물론 가능할 것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되니까. 문제는 마음이다. 마음이 한가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한가한 것은 아니다. 참선이란 몸이 선에 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선에 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유마거사(維摩居士)를 비롯해서 많은 성인들이 말해 왔다.

보통 선에서는 뛰어난 사람을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한다. 무사인이란 ‘일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유위가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숨에 무위로 될 수가 없다. 그러면 열심히 노력해서 무위로 될 것인가, 아니면 단숨에 무위로 될 수 있는가? 앞의 것을 점수(漸修)라 하고 뒤의 것을 돈수(頓修)라고 한다. 필자는 무위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무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양궁선수가 있다고 하자. 그는 활을 잘 쏘기 위해서 하루에 1천 번의 화살을 쏜다. 이것은 유위이다. 그렇게 몇 년을 연습해서 이제는 백발백중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때는 집중해서 쏘지 않고 활을 들자마자 바로 시위를 당겨도 그때마다 백발백중이 된다. 이때는 활을 쏘아도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이다. 즉 무위이면서도 되지 않음이 없는 상태이다. 이와 같이 참된 무위란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선어록을 보면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이 선이다’고 해서 마치 수행이 필요 없다는 듯한 말을 많이 한다. 이 말을 읽고 있으면, 선이 마치 대단히 간단한 듯한 착각이 든다. 하지만 무위란 노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균관대학교 유교철학·문화콘텐츠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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