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증국사 보우의 동아시아 불교계 교류

박용진 교수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박용진 교수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Ⅰ. 원증국사 보우의 동아시아 불교계 교류

 

1. 고려 불교계의 원과 일본 교류

 

고려와 원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1270년대부터는 원도인 연경으로 향하는 육로를 통하여 公·私的 교류 활동이 이루어지며, 불교 교류 역시 대부분 육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점에서 이전 시기와 구별된다. 또한 고려후기 불교 교류와 관련된 자료의 대부분은 단편적인 기록이어서 구법의 노정이나 내용은 분명치 않다. 본고는 불교계의 해상 교류가 중심이지만 한국불교사에 있어 원대 임제종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면서 13-14세기의 여원간 불교 교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태고보우를 중심으로 고려후기 불교 교류와 주요 구법승을 제시하고자 한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반까지의 고려승의 入元求法 관련 자료는 단편적이고, 그들이 이용한 교통로는 대부분 분명치 않은 가운데 해로를 이용한 입원구법승으로는 백운경한, 진각천희, 식무외 등 일부에 그친다. 원감국사 沖止는 충렬왕 12년(1286) 4월 수선사의 제6세 주법이 되었고, 이후 역마를 타고 중하에 이르러 원 황제를 만났다고 하여 육로를 통하여 원나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1290년에는 유가업의 惠永이 사경승 100명과 함께 원나라로 갔다. 1300년 이후 시기의 화엄종의 友雲, 若蘭, 천태종의 達牧과 義旋, 선종의 굉변, 유가업의 海圓, 古林淸茂(1262-1329)와 교류한 眞長老, 1335년 무렵의 혜월과 달죽 등도 육로를 통하여 갔다. 이들은 원도인 연경을 찾은 뒤 강남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거나 고승을 찾아 구법하였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모두 단편적인 것으로 그 교류 내용은 상세치 않다.

충렬왕 21년(1295)에 了庵元明, 覺圓, 覺性, 妙孚上人 등 8인이 휴휴암의 몽산을 방문하였고, 1296년 12월에 內願堂 大禪師 混丘, 靖寜院公主 妙智, 明順院公主 妙惠, 前都元帥 上洛公 金方慶, 侍中 韓康, 재상 廉承益, 金昕, 李混, 尙武 朴卿, 柳裾 등 10명이 휴휴암의 몽산을 찾고자 하였다. 대선사 혼구 등이 몽산을 면대코자 한 시기는 충렬왕이 공주를 비롯 신하 243인, 시종 590인을 거느리고 세자의 혼인과 賀正을 위하여 원나라에 간 때로, 충렬왕 22년(1296) 9월21일부터 1297년 3월 9일까지 약 6개월간의 이동과 체류에 해당한다. 그 입원 노정은 1296년 9월 21일 개경을 출발하였고, 요동을 경유하여 1296년 11월 17일에 연경에 이르는 육로였다. 당시 혼구의 일행이 강남에 있던 臨濟宗 승려 몽산을 방문하였다면 연경에서 육로나 수운을 이용하였을 법하다.

14세기 중엽에는 한국불교사상의 주요 고승들의 입원구법이 있었으며, 그 路程은 육로에 해당하며 해상의 이용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태고보우는 1346년에 燕都에 있다가 강남으로 가서 南巢의 수성의 문인과 교류하였다. 이어 湖州 霞霧山 天湖菴의 石屋淸珙에게 나아가 가사와 주장자를 신표로 받고 연도로 갔다가 1348년 봄에 고려로 돌아왔다. 태고보우의 행장을 살펴보면, 그의 입원구법의 행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바로 燕都에 도착한 것으로 미루어 육로를 통한 것으로 판단된다.

혜근은 1347년 11월에 고려를 떠나 1348년 3월 13일 원도의 법원사에 도착하였다. 이어 지공을 찾아 법을 구하고 나서 약 10년간 불적 순례와 구법 활동을 전개하였다. 혜근은 ‘丁亥十一月發足向北 戊子三月十三日行到大都法源寺라고 하여 육로를 통하여 북쪽으로 이동한 약 4개월의 여정이었다. 또한 혜근은 원도를 떠나 절강성의 명주 지역으로 가서 구법하였고, 다시 원도에 돌아와 체류하다가 육로로 요양 지역을 거쳐 귀국하였다. 따라서 혜근의 입원구법은 출국과 귀국 모두 육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혜근의 1348년부터 10년간의 입원순례는 원나라의 지공과 처림에게서 법을 구하고, 천암원장 등 호구소륭계의 고승들을 역방한 시기였다. 또한 명주의 관음신앙 성지인 보타낙가산, 석가사리 신앙성지인 아육왕사 등 주요 불교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다. 혜근의 입원 순례는 원나라 뿐 만 아니라 일본, 교지 등 동아시아 제국의 불교계 인물들과 교류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또한 무학자초는 공민왕 2년(1353)에 원도에 가서 3년여 입원구법하였지만, 상세한 교통로는 확인되지 않아 육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대 해상을 통한 불교 교류를 살펴보면, 式無外는 14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해상을 통하여 입원구법하였다. 그에 대해서는 가정집에 관련 시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해로를 통하여 명주로 입원구법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경한은 고려말 1351년에 입원구법을 떠나 태고보우가 1347년에 구법한 임제종의 석옥청공에게 법을 구하고, 1352년에 해로를 통하여 귀국하였다. 입원시 경로는 상세치 않지만 귀국의 경로만은 백운화상어록에 비교적 상세하다. 경한은 1351년 5월 17일에 호주 하무산 천호암으로 석옥화상을 방문하여 게송을 올렸지만 인가 받지 못하였고, 다시 1352년 정월 상순에 천호암의 석옥청공을 찾았으며, 상원 9일 전날에 무심과 무념의 眞宗에 계합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어 청공을 떠나 휴휴암에 도착하였다. 당시 홍건적들이 도처에서 횡폐하여 뱃길이나 육로가 모두 막혔기 때문에 1개월간 客食으로 휴휴암에서 머물렀다. 경한은 휴휴암을 떠나 중국 장쑤성 大倉에서 2월 말에 출항하여 3월 22일에 고려에 도착하였다. 이로 보면 경한의 귀국 노정은 명주로부터 약 20일에서 30일 정도의 소요 여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自休는 1378년 무렵 일본을 유람한 뒤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 시기는 원명 교체기에 해당하므로 자유로운 왕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고려말에도 승려의 왕래가 확인되는 점에서 검토의 여지가 크다.

1364년에는 공민왕대 국사로 활동한 화엄종의 千熙가 해로를 통하여 杭州로 입원구법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4〉원증국사의 불교 교류와 임제종 전법 계보

 

 

 

 

 

 

 

양기방회

992-1049

 

 

 

 

 

 

 

 

 

 

 

 

 

백운수단

 

 

 

 

 

 

 

 

 

 

 

 

 

 

오조법연

1025-1104

 

 

 

 

 

 

 

 

 

 

 

 

 

 

 

 

 

 

 

 

 

 

 

 

 

 

 

 

 

 

 

 

 

 

 

 

 

 

 

 

원오극근

1063-1135

 

불안청원

 

불감혜근

 

대수원정

 

개복도령

1113

 

 

 

 

 

 

 

 

 

 

 

 

 

 

 

 

 

 

 

 

 

 

 

 

 

 

 

 

대혜종고(1089-1163)000000

 

 

호구소륭(1077-1136).....

 

 

 

 

 

대위선과

 

 

 

 

 

 

 

 

 

 

 

 

 

 

 

 

 

 

 

 

 

 

 

 

 

 

 

 

 

 

 

 

 

 

 

 

 

 

 

 

 

 

 

송원숭악

1132-1202

 

 

파암조선

 

 

 

 

 

 

 

 

 

 

 

 

 

 

 

 

 

 

 

 

 

 

 

 

 

 

 

 

묘봉지선

 

 

멸옹문례

 

 

 

무준사범

1177-1249

 

 

 

완산정응

 

죽엄묘인

 

 

 

 

 

 

 

 

 

 

 

 

 

 

 

 

 

 

 

 

 

 

 

 

 

장수선진

 

횡천여공

 

석림행공

 

 

설암조흠

1218-1287

 

 

 

몽산덕이

 

직옹 圓

 

 

 

 

 

 

 

 

 

 

 

 

 

 

 

 

 

 

 

 

 

 

 

 

 

 

 

 

 

 

원수행단

 

축원묘도

 

동서덕해

 

고봉원묘

 

 

급암종신

 

지공

 

철산소경

 

무능 敎

 

 

 

 

 

 

 

 

 

 

 

 

 

 

 

 

 

 

 

 

 

 

 

 

 

 

 

 

 

 

초석범기

1296-1370

요당유일

 

설창오광

고목자영

 

중봉명본

1263-1323

석옥청공(1272-1352)00000

평산처림

1279-1361

무극도

 

축원수성

=

 

 

 

 

 

 

 

 

 

 

 

 

 

 

=

 

 

 

 

 

 

 

 

무극장로

 

 

 

 

1284-1357

천암원장

백운경한

태고보우

 

나옹혜근

 

원명충감

 

월동백 등

 

 

 

 

 

 

 

 

 

 

 

 

 

 

 

 

 

 

 

 

 

 

 

 

 

 

 

 

 

 

만봉시울

 

찬영/혼수

 

환암혼수

 

무학자초

 

 

 

 

 

 

 

 

 

 

 

 

 

 

 

 

 

 

 

 

 

 

 

 

 

 

 

 

설산천희

 

 

 

 

 

 

 

 

 

 

 

 

 

 

 

 

 

 

 

 

 

 

 

 

 

 

이 시기 여원 불교계의 해상 교류와 관련하여 대장경의 수입이 주목된다. 1340년대 천태종의 의선은 원도 연경 대연성사에 주석하였는데, 대장경을 원에서 구입하여 고려에 봉안하였다.이 원판대장경은 ‘餘杭墨本’이라 하여 원의 江浙 지역에서 印成한 것으로 해상 선편으로 수입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고려말 왕실 및 권문세가의 원찰에서 필요한 대장경을 원의 강절 지역에서 해양을 통하여 수입한 일에서도 확인된다. 우왕대 문하시중을 지낸 尹桓은 충목왕 4년(1348)과 공민왕 16년(1367)의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의 강절에서 대장경을 구입하여 중건한 원찰 報法寺에 봉안하였다.

한편, 麗元交流期에는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듯 고려 국왕 및 관료를 비롯한 재원 고려인의 불교 교류가 다수 확인된다. 충선왕 王璋은 원도에서 활동하면서 강남의 불적을 순례하는 한편 고승을 역방하였다. 1319년 3월 이제현 등과 함께 천목산 환주암의 중봉명본을 찾는 한편 항주 혜인사에서 盤谷禪師를 맞아 화엄대의를 듣기도 하였다. 충선왕과 명본이 서신을 교류한 기록이 남아 있고, 초석범기는 그 서신을 필사하여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불교와 관련된 활동은 불적 순례, 불교학 교류, 대장경 기진 등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승의 일본구법은 了然法明(-1251-)이 알려져 있다. 법명은 원나라 경산의 無準師範(1178-1249)에게 參學하였고, 일본땅이 佛地라는 이야기를 듣고 淳祐 7년(1247)에 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1251년 3월 18일에는 出羽國 善見村에 玉泉寺를 개창하였고, 이어 北越에 주석하고 있던 조동종의 道元(1200-1253)을 찾아 불법을 계승하였다. 또한 일본 조동종과 관련된 고려승으로는 일본 조동종의 弘化系譜傳권2에 의하면, 峨山下의 無外圓昭(1311-81)가 있다. 이외 고려승으로는 고려 水精寺 空室妙空이 일본에 입국하여 高峯顯日(1241-1316)의 교학을 배우고 慶芳禪師(?-1381) 등을 배출하였다. 또한 고려말에 일본을 유람하고 중국의 강남에 구법하려 한 自休, 復菴, 莫莫 등이 있다. 이는 고려승이 入日求法하여 불교계에서 활동한 사례로 주목된다.

 

2. 태고보우의 원과 일본승 교류

 

고려에 입국한 원나라 승려는 1304년 입국하여 활동한 鐵山紹瓊, 1326년의 指空, 14세기 중엽의 無極長老 등이 있다. 1304년 원나라의 江南에 있던 鐵山紹瓊은 해로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철산소경은 임제종 蒙山德異의 법통을 이었는데, 고려후기 몽산의 간화선풍이 유행하는 가운데 사법제자가 고려를 방문한 셈이다. 소경의 입국을 주선한 인물은 당시 원나라에서 유력하고 있던 沖鑑이다. 沖鑑은 중국의 강남 지역을 유력할 때, 소경의 도행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함께 고려로 와서 3년간을 수행하였다. 또한, 1324년에는 全忍이 중국에 가서 禪源寺의 堂宇를 丹靑할 안료를 구하기도 하였고,

한편, 1344년 전후 1369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회암사에는 원나라 승려 무극장로의 기록이 확인된다. 이렇듯 고려와 원의 불교계간 활발한 교류와 교섭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료의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회암사 무극장로에게 부침 寄高麗檜巖至無極長老

 

지난 해 고려를 유력한다 하더니 요즘은 회암사에 머문다 전하네 当年自説游高麗 近日人伝住桧巌

회하의 대중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앞뒤로 한없이 많으리니. 会下不知多少衆 前三三与後三三

오관산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 아래로 서늘한 못 만길이나 깊으리 五冠山上看飛瀑 下有寒潭万丈海

신룡이 내려온 지 이미 오래라 하니 전신을 발우에 넣으면 크기가 침과 같으리. 見説神竜降已久 全身入鉢大如鍼

 

이는 원의 楚石梵琦가 고려의 회암사에 머물고 있는 무극장로에게 보낸 서신이다. 원의 楚石梵琦(1296-1370)는 임제종 大鑑下 제21세 元叟行端(1255-1341)의 法嗣로 大慧宗杲派에 해당한다. 범기는 明州 象山縣人으로 嘉興府 秀水縣의 本覺寺와 海鹽縣의 天寧寺에서 도화를 폈다. 무극장로의 출신은 분명치 않고, 다만 범기의 게송에는 회암사, 오관산, 통도사, 강릉 오대산, 금강산 등의 주요 불교 성지를 나열한 점으로 미루어 고려에 대한 정보가 교류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 임제종의 대혜파 범기의 서신은 나옹혜근과 태고보우가 사법한 虎丘紹隆派 이외의 교류 내용을 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여원 불교계의 교류와 인적 교섭은 주로 해상 교류의 양상을 띠고 있다.

무극은 고려와 원에서 활동한 승려 가운데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다. 우선 원대의 무극장로는 철산소경의 제자인 無極導禪師를 들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①고려국의 승속이 위와 아래가 비등하여 자주 왕래하였다. 무극도공은 사의 체도제자로 따로 사전이 있다.

②마침내 철산소경선사를 따라 체발하여 현요를 물었다. 及菴宗信이 도량산에서 법을 설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나아가 뵈었다.

③무극 스님의 시에 次韻하여 그의 문도인 景楚가 錢塘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쓴 시

④기묘(1339) 봄에 소요산 백운암으로 갔는데, (중략) 중국승 무극이 바다를 건너와서 재주와 달변으로 여러 곳을 파척하였다. (중략) 남조에 임제의 정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가서 인가받을 만합니다. (중략) 임제 하에 설암 적손 석옥청공 등 수인이 있다.

 

위의 자료 ①과 ②의 무극도선사(1268-1332)는 吳興 趙氏로 송나라 종실이며, 몽산덕이의 법사인 철산소경의 체도 제자로, 현요를 묻고 뒤에 圓悟克勤의 법사인 호구파의 급암종신에게 나아가 법을 들었다. 기타 무극의 전기는 소략한데 국외로 떠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자료 ③의 무극에 대해서는, 가정 이곡(1298-1351)이 무극의 문도인 경초가 중국의 錢塘으로 돌아감에 따라 무극의 시에 次韻하여 시를 지어 송별하였는데, 무극과 경초에 대한 기록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이곡의 작품 연보에 따르면 이 시를 지은 때는 충숙왕 6년(1329) 이후 1333년 1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南嶽下 21세인 仰山欽禪師의 법사인 匡山無極源禪師가 있지만 철산소경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또한 南嶽下 제18세인 育王印禪師의 법사인 無極觀禪師가 있지만 이들의 전기가 없어 그 상관성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한편 자료 ④는 태고보우가 1339년에 소요산 백운암에서 원나라 승려 무극을 만나 석옥청공 등 원나라의 임제종의 계파 및 정보를 듣고 구법을 준비한 내용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범기(1296-1370)는 회암사에 체재하고 있던 무극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이 무극은 태고보우가 1339년 봄에 소요산 백운암에서 해로를 통해 고려에 온 원나라 승려 무극이다. 이때 보우는 무극을 통하여 석옥청공 등 원나라의 임제종의 계파 및 정보를 교류한 바 있다. 중국 임제종의 대혜파 범기의 서신은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이 사법한 虎丘紹隆派 이외의 불교계 인물과 교류 내용에 해당한다. 또한, 충숙왕 6년(1329) 이후 1333년 1월을 전후한 시기에 이곡(1298-1351)이 무극의 시에 次韻하여 그의 문도인 경초에게 전별시를 보냈다. 이로 보면, 무극이 경초와 함께 고려에 체재하였고, 경초가 스승인 무극보다 먼저 원나라 전당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여원간 불교계의 교류와 교섭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인도 출신의 지공은 원도에서 활동하던 중, 1326년 3월 고려에 와서 1328년 9월까지 2년 7개월 체류하면서 불교계와 교류하였고, 원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고려말 불교계를 주도한 태고보우, 나옹혜근, 백운경한 등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지공이 입적한 뒤 회암사에는 그의 사리탑과 탑비가 세워졌다. 지공의 고려 불교계 활동으로는 승속에게 安禪, 수계와 계법 전수, 범어 불전의 교정, 불적의 성지인 금강산 순례 등이 있다. 기타 원대 승려로서 고려 불교계와 교류한 인물로는 원나라 천태종 승려 湛堂性澄(1265-1342)이 至治 연간(1321-1323)을 전후 하여 고려에 와서 천태 서적을 구하여 돌아간 바 있다.

특히 태고보우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354년에 湖州(현, 浙江省 湖州市) 霞霧山 天湖庵의 승려 法眼이 해로를 통하여 입국한 일이다. 법안은 석옥청공의 문도로 백운경한을 만나 스승의 임종게를 전하였다. 이는 태고화상어록에는 확인되지 않는데, 장을 달리하여 서술한다.

다음으로 일본승의 고려 불교계 활동이나 교류를 살펴보면, 고려와 일본의 불교 교류는 오래 되었지만 단편적인 자료가 대부분으로 그 실상은 분명치 않다. 이에 대해 분류하면, 일본승의 입려구법, 일본승의 入元 왕래시 체류, 불전 및 佛具 교류, 기타 왕래 기록 등으로 대분된다.

일본승의 고려 구법 및 활동은 고려사 고종 3년 2월조에 일본승이 고려에 와서 불법을 구한 기록, 1259년 일본 승려가 거제도의 승려 洪辯을 찾아와 법화경을 구한 일, 1359년의 中菴守允(1333-?), 1340년대의 石翁, 1378년 일본 東福寺의 승려로 추정되는 大有, 1390년 永茂 등이 개경의 인근 사원에 머물면서 승속과 교류하였다. 1344년 혜근이 회암사에 이르러 한 방에서 장좌불와하며 수도하였는데, 당시 일본 승려 석옹화상이 있었다. 석옹이 회암사에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어느 정도 체재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회암사는 외국 승려를 수용하고 상호 교류하는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고보우는 석옹에게 게송을 지어 보낸 일이 있는데, 이 시기는 석옹이 회암사에 체재한 1344년부터 태고보우가 원나라로 떠나는 1346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해당한다. 태고보우가 교류한 일본 승려로는 태고화상어록을 살펴보면, 石翁長老, 志性禪人, 雄禪人, 中菴壽允 등이 찾아지는데, 웅선인은 원나라의 강남으로 떠나가는 선승이었고, 중암수윤은 1376년에 태고에게 자신의 호로써 게송을 구한 인물이었다. 수윤은 이색에게서 「跋黃檗語錄」을 받았으며, 어록에는 그의 사법 계통이 간략히 제시되어있다.

일본 승려가 원나라 왕래시 표착 등의 사유로 고려에 체류한 사례는 다수 확인된다. 충숙왕 11년(1324) 7월에 입원구법 일본승 大智(1290-1366)가 고려에 표착하여 고려국왕에게 게송을 바치고 귀국하였다. 일본승 如聞은 충목왕 즉위년(1344)에 제주도에 표착하였다가 고림청무(1262-1329)의 어록을 필사하여 돌아갔다.

태고보우는 중암수윤의 호에 대한 송을 지었다. 태고가 76세로 노령이라 글을 쓰지 않았지만 수윤이 간곡하게 부탁하므로 지어 주었다. 수윤은 일본 승려로 개경 인근의 영은사에서 머물렀다. 수윤은 1376년을 전후하여 여러 해 고려에 체재하였는데, 이색을 비롯한 유학자와도 교류하였으며, 둔촌과 도은이 연말에 영은사의 수윤을 찾아 교류하였다. 그의 종파나 활동은 분명치 않지만 고려의 개경 사원에 일본 승려가 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타 태고보우가 교류한 일본 숭려로는 석옹장로, 웅선인 등의 이름이 태고화상어록에 전한다.

 

Ⅱ. 원증국사 보우의 입원구법과 교류

 

태고보우는 1346년에 원나라 연도(燕都)에 가서 대관사에 주석하였고, 남소(南巢)에 있는 축원성선사(竺源盛禪師)를 만나러 갔지만 이미 입적하여 만나지 못했다. 태고는 문인들과 교류하고는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의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 나아가 가사와 주장자를 신표로 받고 반달 정도 머물다 연도로 돌아왔다. 원나라 천자의 명으로 영령사(永寧寺)에서 개당하였다. 태고는 원순제의 제2비인 고려인 기황후와 그의 아들의 귀의를 받았고, 1348년 봄에 고려로 돌아왔다. 이하에서는 태고의 입원구법과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태고보우가 원나라에 가서 대관사에 주석하면서 처음 만나려한 인물은 축원수성이었다. 축원성선사(竺源盛禪師, 1275-1347)는 남악하(南嶽下) 제21세인 무능교선사(無能教禪師)의 법사(法嗣)인 축원수성(竺源水盛)이다. 태고가 1347년 4월 연도를 떠나 남소(南巢, 현 安徽巢湖市)로 가서 만나려 했던 수성은 1347년 4월 24일에 입적하였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축원수성은 五祖法演-開福道寧-月庵善果-大洪祖證-月林師觀-竹巖妙印-真翁圓-無能教의 법통을 이었고, 月林師觀 法嗣의 또 다른 문하가 孤峰德秀-皖山正凝-몽산덕이-철산소경으로 이어진다. 당시 고려불교계는 개복도령계의 몽산덕이나 철산소경과의 교류가 다수 확인된다. 우선 간접적인 교류로는 수선사 10세인 만항(1249-1319)은 몽산에게 그의 글과 게를 보내었고, 일연을 계승한 보감국사 혼구(1250-1322)는 몽산이 보낸 ‘무극설’의 의미를 터득하여 호를 무극노인이라 하였다. 또한 동안거사 이승휴는 1297년 4월 12일 몽산이 보낸 법어를 받았다. 또한 직접적인 교류로는 충렬왕 21년(1295) 겨울에 고려의 요암원명과 각원, 각성 등 8명이 몽산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몽산법어는 고려에 전해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몽산의 제자인 철산소경은 1304년을 전후하여 고려에 입국하였다. 철산소경은 임제종 몽산덕이(蒙山徳異)의 법통을 이었는데, 고려후기 몽산의 간화선풍이 유행하는 가운데 사법제자가 고려를 방문한 셈이다. 소경의 입국을 주선한 인물은 당시 원나라에서 유력하던 沖鑑으로, 그가 중국의 강남 지역에 머물 때에 소경의 도행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초빙하여 고려로 돌아와서 3년간을 함께 하였다. 충렬왕이 불교계를 통하여 초청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1304년 7월에 소경이 오자 승지(承旨) 안우기(安于器)를 교외에 파견하여 궐내에 맞아 설법케 하였다. 당시 소경의 덕망은 높아 선풍을 크게 행하여 득도자가 매우 많았으며, 또한 홍재상(洪宰相)이 보설을 청해 듣기도 하였다. 이로 보면 고려불교계는 몽산덕이계의 간화선풍이 유행하였고, 따라서 태고보우는 처음에는 고려 또는 원도에서 개복도령계의 몽산이나 철산계의 고승을 소개받아 인가를 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보다 앞서 태고는 1339년 봄 소요산 백운암에서 바다를 건너온 원나라 승려 무극(無極)을 만나 강절 지역에 임제정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인가를 받으러 갈 만하다는 것과 임제 직하의 설암조흠의 적손인 석옥청공 등 제가의 소식을 들었다. 이후 태고는 1341년에 원나라로 가고자 하였으나 중흥사 주석 요청과 태고암을 세워 수도하는 일로 미루었고, 5년 뒤인 1346년에 입원구법하게 되었다. 태고는 무극으로부터 전문한 축원수성, 석옥청공 등 제가를 역방하여 인가를 받는 등 교류하였다. 원도에 체재하던 태고는 우선 축원수성을 찾았으니 다음과 같다.

 

丁亥四月 聞竺源盛禪師 在南巢 往則逝矣 其門人弘我宗月東白 將盛三轉語度師 其一曰 出家學道 只圖見性 且道 性在什麽處 其一曰 三千里外定䛥訛 對面因甚不相識 其一展兩手云 此是第二句 還我第一句來 請下語 師若接而眄 若眄而應 一偈透三關曰坐斷古佛路 大開獅子吼 還他老南巢 手脚俱不露 不露也明如日 不隱也黑似漆 我來適西歸 餘毒苦如蜜 二人齊出禮謝曰 此方衲子幾千萬箇 到此三關 摠不奈何 長老始與老和尙相見也 願許小留 師辭 且曰吾渉遠道 要見其人 人在何處 二人曰 先師甞言 江湖眼目 只在石屋

 

태고보우는 축원수성은 만나지 못하고 수성의 문인 홍아종(弘我宗)과 월동백(月東白)을 만났는데 그들은 삼전어(三轉語)로 태고의 법력을 시험하였다. 태고는 원대의 납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적의 응대함에 2인이 나와 예를 갖추었다. 이어 태고는 수성의 문인에게 당대 고승이었던 수성과 같은 인물이 있는지를 질의하였다. 이때 홍아종 등은 축원수성이 강호의 안목은 오직 석옥청공에게 있다는 말을 들었음을 전하였다. 이에 태고는 남소를 떠나 호주 하무산(湖州 霞霧山)의 천호암(天湖菴)으로 가서 석옥청공을 만나 인가를 받았다.

태고는 1247년 7월15일부터 8월1일까지 약 반 달을 석옥청공과 교류하였는데, 이 시기의 교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高麗南京重興萬壽禪寺長老 諱普愚 號太古 向曾爲此一段大事 立志 去下苦硬 工夫來見處透脫 絕意路出思惟 非言像之所能拘 欲潜隱遂結菴寺之三角山 以自號扁其菴 亦名太古 以道自適 放意於泉石間 述太古歌一章 丙戌春 出鄕至大都 不憚路途勞役 尋跡而來 丁亥七月 到余山石菴 寂寞相忘 道話半月 觀其動靜 安詳 聽其言語諦實 將別前出示向者所作太古歌 余乃 淸窓展翫 老眼增明 誦其歌也 淳厚味 其句也閑湛 眞得空劫已前消息 非今時尖新 堆飣者 而可方比 則太古之名 不謬也 余久絶酬應 管城子忽焉足+孛跳 不覺書于紙尾 復爲詞曰

先有此菴 方有世界 世界壞時 此菴不壞 菴中主人 無在不在 月照長空 風生萬籟

至正七年丁亥(1347)八月旦日 湖州霞霧山居 石屋老衲 七十六歲書(『太古和尙語錄』上, 한불전6, p.683)

②辭石屋和尙(석옥화상을 하직함)

弟子普愚 久嚮道風 不遠千萬里 尋此霞霧山頂 果參凾丈 若窮子逢其父然 於是侍留半月 決擇心要 飽受法乳 如斯大恩 雖碎身 實難爲報 今於辭也 豈無情義哉 謹頌德 兼發志願 作偈獻之 以表寸誠云 吾觀本師大圓鏡 亦觀弟子平等性

同是一體徧十方 廓然瑩徹了無影 無生無佛絕能所 靈通皎潔常寂照

萬像森羅現其中 吾師水月形亦露 亦有弟子空華身 淨穢苦樂皆現了

今以吾師大和尙 大圓鏡中弟子某 歸命禮弟子鏡中 本師和尙古佛老

發誠願語異加被 世世生生亦如是 師爲華藏世界主 我爲長子助其利

或住兜率演法時 我爲天主常衛侍 或坐菩提樹下時 我爲國王行法施

如我今日本誓願 種種莊嚴悉圓備 供養十方無盡佛 大乘菩薩及一切

普與法界諸佛子 同證如來常寂理 滅除煩惱無餘垢 一切妙行皆成就

當來佛佛會會中 互爲賓主須相遇 師爲主我爲伴 師爲伴我爲主

盡未來際作佛事 度盡衆生歸去後 同遊無上大涅槃 一如今日遊霞霧

吾雖幻質分彼此 此心終不離左右 (『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6, p.692)

③南遊偶吟

爲法行天下 經冬復歷秋 暮雨靑燈寺 凉風白鷺洲 孤身三歲客 萬里一扁舟 誰識海東僧 來作江南遊

법을 위하여 천하를 다니면서 겨울 지나고 또 가을 지내다. 푸른 등 달린 절에는 저녁비 내리고 해오라비 나는 삼각주에는 찬바람부네, 외로운 몸 세 해의 나그네 만리의 조각배, 누가 이 해동의 중이 강남에 와서 노닌다고 알아주리(『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6, p.692)

 

위의 인용문은 태고보우가 석옥청공을 찾아 교류한 내용에 해당한다. 태고는 1347년 7월 15일을 전후하여 호주 하무산 석암을 찾았다. 이때 처음 만나 반달 동안 불도를 담론하였는데, 청공은 태고에 대해 ‘그의 행동이 침착하고 조용함을 볼 수 있었고, 그의 말은 분명하고 진실함을 들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태고는 1347년 8월 1일에 청공을 하직하면서 「하직사」와 함께 전에 지었던 「태고가」를 청공에게 내보였는데, 이에 화답하여 「태고암」에 대한 「석암」을 소재로 화답가를 주었다.

태고는 「하직서」에서 “제자 보우는 오랫동안 도풍을 우러러 천만리를 멀다 않고 이 하무산정을 찾아와 마침내 스승을 참알하니 마치 빈궁한 아들이 아버지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이에 반 달 동안 곁에 머물면서 심요을 결택하고 법유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큰 은혜는 비록 몸이 부서져도 실로 갚기 어렵습니다. 이제 하직하니 어찌 감회가 없겠습니까, 삼가 덕을 칭송하고 발원하며, 게송을 지어 올려 작은 정성을 표합니다.”라고 하여, 사법의 제자로서 감사를 표하였다. 이때가 석옥청공 76세, 태고보우는 47세였다.

태고보우는 8월 1일 청공을 떠나 1347년 10월 15일 연도에 도착하였다. 태고는 연도에 돌아온 뒤에도 청공과 서신을 왕래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①石屋和尙書

記七月間 長老不憚萬里崎嶇 求決己事 來余峰頂 此時相見 老僧無一法可說 長老無一字可聞 是眞相見 若有毫端許言之 本末皆爲見刺 此是從上古人 相見底道理 長老當自保養 轉示將來 免隨邪見 臘月十七日 海門洪長老來山 喜聞長老 已回大都 不審歸鄕 去留如何 便中略此記達 萬萬以大法爲重 是禱是禱 至正丁亥臘月廿九日 湖州霞霧山居石屋老衲淸珙 手啓太古愚長老.(『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권6, p.694)

②上石屋和尙書

弟子高麗國重興禪寺普愚 九拜謹啓本師霞霧山石屋大和尙座下 自八月一日爲辭 無日不瞻企 善路行行 十月十五日 回大都 囊錐稍露 諸山碩德 朝廷大臣 奏聞聖旨 住持永寧禪寺 十一月廿四日 太子千秋令晨 賜金襴拂子若香 天使令嚴諸方四衆 僅百千萬人 擊皷圍繞 不得已陞座 首爇祝釐之香 次爲老和尙 拈出懷香一瓣 開演宗乘 扶揚末法 此豈法乳之大恩也哉 不敢不告 家醜一場 狼藉卑辭 謹以寫呈 某願明春再叅 終身服勤儻業緣所拘 不果歸鄕 一依所敎 隨分二利 不賤賣佛法 以至後來 不斷種子 然此豈獨吾之所能 正是佛佛祖祖 本願提持也 向者遇謁和尙 所以嗣承大事 此日奉詔開堂 亦有其使 然豈敢以拙言 了陳鄙懷 伏唯照詳 重復再拜 祝願本師大和尙 起居萬福萬福 鄕人有便 慈悲垂問 以慰區區(『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권6, p.694)

③石屋和尙答書

啓復別後 老病日增 掩關自養 苟遣朝夕 戊子十月十三日 忽淨慈專人 遆至長老書 誦間 且知太古 時緣俱稔 諸山宿德 大臣宰官 奏聞聖旨 住持永寧禪苑 開堂演法 光揚宗敎 此乃長老 情眞契聖 行實感人 豈偶然哉 又知開堂日 辦香爲老拙拈出 且拙者退席從閑 少歇狂妄耳 焉敢妄想 爲人之師 今長老乃如是 豈非多生緣契也 然而出世爲人 要以本分事 激引來蒙 愼勿以機境上 遞相狐媚 大家草裏 輥斯何圖哉 當自勉旃 果能如此 始終不異 則皇恩佛恩 一時報畢 吾復何言 路途雖千萬里之遙 由目擊耳 老倦4) 具答不謹 可恕可恕 至正八年十一月初七日 霞峰石屋啓復(『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권6, p.695)

 

태고가 연도에 도착한 뒤에 영령선사의 주지가 되어 활동하는 즈음에 석옥과 서신을 교류하였다. 태고는 연도에서 석옥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보다 앞서 석옥은 12월 17일에 海門洪長老가 와서 태고가 대도에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12월 29일에 안부 서신을 보낸 것이다. 이에 태고는 「上石屋和尙書」라 하여 답신을 보내었는데, 여기에서는 1347년 8월1일에 하직하고 대도에는 10월 15일에 도착하였다고 하여, 약 2개월 15일여의 여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石屋大和尙」이라 경칭하고 제자를 자칭하여 사법제자임을 밝혔지만, 석옥 역시 「手啓太古愚長老」라고 하여 서로 예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옥은 태고의 서신을 받았는데, 1348년 10월 13일에 정자사의 전인으로부터 서신을 받고, 대도의 영녕선원의 주지가 되어 개당 설법한 사실을 특기하여 칭탄하고 다시 지정 8년(1348) 11월7일에 답신을 보냈다. 이에 대한 태고의 회신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원나라의 대도 영령사에 주석하는 시기에는 석옥과 서신을 교류하는 등 원 불교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고는 석옥청공의 인가를 받고 연도로 돌아와 태자의 생일에 개당설법을 하는 등 원황실의 후우를 받았다. 다음의 자료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①大都諸山長老告朝廷請開堂䟽 대도의 제산 장로가 조정에 고하여 개당을 청한 소문

道非弘人 人能弘道 是故佛佛授受 祖祖相傳 禪燈無窮 慧命不絶 今太古庵悉宗門可者 於一機上 豁明星眼 尋往南方湖州霞霧山 謁石屋和尙 和尙一見如舊 便知其器 以本分手段 不鎚成金 一印印破 太古放下重擔 決返擲機 佩印還都 若不是上根 烏能你也 光現祖燈 重興佛日 只在皇天臣僚 伏望大檀越 身心正直 稱揚正法 福利皇圖者 切以少林室九年默 神光斷臂覔心 石屋堂半月談 太古放身卸擔 古聖今聖之牓樣 先祖後祖之規模 不犯機絲 透脫關捩 兩行書兩家影 爲血脉之連枝 一條杖一領衣 但法印之標信 奚一世之罕遇 實萬劫之難逢 雪巖風及菴寒 天湖月太古色 上國皇天之德望 於斯益高 本朝人寰之喜心 夫復何語 擁護是神部諸將 弘揚實帝王大臣 扣擊玄關 䟽通密意 所冀金輪共法輪常轉 物阜民康聖日將佛日恒明 河淸海晏 和南謹䟽(『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권6, p.695)

 

②개당방開堂榜 : 江西袁州路 淸泉山 延壽禪寺 長老 善南詢仲 作

大元國大都永寧禪寺 伏値太子千秋令晨 欽奉聖旨 高麗國重興萬壽禪寺住持太古和尙 開演宗乘之榜 右伏以五色雲車駕彩龍 式瞻瑞氣 一縷香烟騰法界 大振雷音 花雨繽紛 風雲慶會 大地拔山河之秀 一暘甦草木之萠 杖屨南詢 行役豈勞於萬里 因緣北就闡揚方遂於平生 老石屋針芥相投 太古菴鉗鎚本分 稱師據位 竪拂降魔 水陸霑潤潭之功 人天恊歡騰之勝 書同文車同軌 共樂升平 河出圖洛出書 咸謌治化 一人有慶 萬福攸同 右恭惟三寶洞知 龍天昭監 至正七年丁亥十一月二十四日(『太古和尙語錄』下, 한불전권6, p.695)

 

③삼각산 중흥사에서 6년 동안 주석하시다가 지정 병술년(1346) 봄에 천하에 법을 구할 뜻을 품고 연도에 들어가셨다. 정해년(1347) 가을에 호주 하무산을 찾아가 석옥스님을 뵙고, 법을 이어받고 가사를 전해 받으셨다. 그해 10월에 대도로 돌아오시니 제산의 장로들은 대신에게 글을 올려 알리고, 우승상 朶兒赤과 선정원사 활활사팔 등이 천자에게 아뢰었다. 11월24일은 태자의 생일이었으므로 資政院使 姜金剛吉, 太醫院使 郭木的立, 宣政院同知 列刺秃 , 資政院 同知 定住怯薛, 官人答刺海 등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스님을 영령선사의 주지로서 개당하게 하였다. 이날에는 천자향, 금란가사, 침향불자, 제사향(帝師香), 삼전황후의 향 및 황태자의 향이 모두 이르렀다.

(중략) 법좌에 올라서 향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 향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러나 은근하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두루 통하며, 가운데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으면서 시방세계에 고루 사무친다. 받들어 축원 드립니다. 세상의 주인이시고 대원제국의 황상 폐하의 거룩하신 수명이 만세 만세 만만세 누리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의 정사는 삼천세계에 두루하시고, 자손들은 억만년토록 봄철과 같으소서.” 다음으로 또 향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 향은 정갈하고 청정하여 온갖 덕성을 머금었고, 고요하고 편안하여 모든 상서를 담고 있다. 삼가 3궁 왕후께서 모두 강녕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수명이 하늘과 같아 황손들의 영화를 굽어보시고 오랫동안 젊어 늙지 마시어 황모(皇母)의 즐거움을 향유하소서.” 다음으로 또 향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 향은 치켜들면 하늘처럼 높아지고 땅처럼 두터워지며, 내려놓으면 바다같이 아늑하고 강물처럼 맑다. 삼가 아유실리 태자께서는 수명이 천세 천세 천천세를 누리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황궁의 생활이 넉넉하여 천 년의 영락을 누리시고, 황상 폐하를 효도로 받자와 만세의 기쁨이 되소서.” 다음으로 품고 있던 향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 향은 부처와 조사도 알지 못하고 귀신도 헤아리지 못한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얻어진 것도 아니다. 전생에 신라를 행각할 때에 전단원에 가서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서 잡으려 했을 경우에도 실마리도 없었고 맥도 추지 못했었다. 그러한 가운데 만길 벼랑에 이르러서 온 몸을 통째로 내던져 완전히 죽었다가 홀연히 소생하여 가볍게 날아 내렸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죽은 걸로 생각했으므로 장차 그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굳게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더욱 드러나게 되어 나쁜 소문이 천하에 두루 퍼졌다. 그런데 오늘 성지를 받들어 그 옛날의 진실 그대로를 집어내어 인천의 무리 앞에서 이 향을 향로에 사루는 바이다. 전에 절강의 서쪽 가흥로 복원의 보혜선사에 주석하고 지금은 물러나 하무산 정상의 바위 아래에 계시는 석옥대화상께 공양함으로써 증명해 주신 그 은혜에 보답코자 한다.

 

위의 인용자료를 통하여 태고의 활동을 살펴보면, 태고는 연도에 1347년 10월 15일에 도착하자, 위의 자료 ①과 같이 「대도의 제산 장로가 조정에 고하여 개당을 청한 소문」을 통하여 제산의 장로들이 조정의 대신들에게 알렸고, 위의 자료 ③에서 보듯이 우승상 朶兒赤과 선정원사 활활사팔이 황제에게 태고의 일을 아뢰었다. 그해 11월 24일이 태자의 생일이라 축수재를 개설하는 것을 겸하여 영령선사의 주지로서 개당케 하였다. 이러한 개당 축수재에 있어 자료 ②와 같이 강서 원주로 청천산 연수선사의 장로는 「개당방」을 짓기도 하였다.

태고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영령선사의 주지로서 개당하며 태자를 축수하는 이날에는 천자의 향, 금란가사, 침향불자, 제사향(帝師香), 삼전황후의 향 및 황태자의 향이 모두 이르러, 법회가 위로는 천자로부터 신료들이 시주하여 참여하는 대규모의 불교의례로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다소 길게 인용되었지만, 개당 법회에서는 황제, 황후, 황태자, 석옥청공의 순서로 염향 축수가 이루어졌다. 이 축수재는 특히 황태자의 생일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고려인 기황후의 소생인 아유실리 태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원황실은 순제의 제2비 고려인 기황후(1315-1369)가 있었고, 황태자는 기황후의 소생으로 뒤에 소종이 된다.

한편 위의 자료 ③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절의 공덕주인 원사 상공과 여러 관리와 재상들이 불법을 공경하고 존중하여 이런 훌륭한 인연을 지었다고 하여, 영령사의 공덕주인 원사 상공과 관료를 특기하였다. 이들은 普愚가 도착하자 燕京의 永寧寺 長老인 如鐵舡과 功德主인 郭木的立 등이 간청을 하고, 그 밖의 여러 사찰에서는 普愚를 칭송하면서 皇帝와 大臣들이 모두 그의 檀越이 되어 줄 것을 상소했다.

또한 자정원사 강금강은 고용보, 박불화 등과 함께 기황후의 재용을 관장하는 자정원 소속 환관으로 모두 고려인이었다. 당시 기황후는 태고, 나옹 등 고려의 선승들을 후우하여 황실의 종교인 티벳불교보다 고려계의 선종과 가까웠다. 기황후는 고려의 사원에 많은 불사를 하였는데, 장안사 중창(1343-1345), 표훈사, 연복사의 범종 주조(1346), 경천사 석탑 건립(1348) 등이 이루어졌다.

당시 태고는 영령사의 개당법회 및 축수의례를 3일 3야로 설행하였는데, 이 법회에 대한 생생한 기억으로 서술한 朴通事諺解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마침 고려의 인질로서 연도에 머물고 있던 祺(恭愍王)가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하여 장차 자신이 고려에 돌아가 새로 정사를 담당하면 반드시 보우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이상을 정리하면, 태고는 당시 원황실의 기황후의 후원을 통하여 원나라 불교계에서 교류 활동을 하였다. 특히 당시 공민왕이 세자로 원도에 있었기 때문에 개당 법회 등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태고가 뒤에 공민왕대에 왕사가 되어 불교계를 통할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태고보우는 석옥청공의 법을 이었는데, 이는 원나라 고승전 「석옥청공전」에 인가를 받고 법을 계승한 사법으로 특기되었고, 특히 석옥의 사리를 봉안한 기록이 주목된다.

 

제자 태고보우는 고려국인이다. 사가 게를 설하여 인가하였고, 금린상직구지구(金鱗上直鈎之句)가 있다. 뒤에 돌아가니 왕이 존숭하여 국사로 삼았다. 자주 사의 덕을 말하니 왕이 매우 우러렀다. 사가 입적함에 원 조정에 상주하여 불자혜조선사로 시호를 내렸다. 강절에 공문을 보내 정자사의 평산처림에게 청하여 천호암에 들어가 사의 사리 반을 취하여 관반과 함께 귀국하여 탑을 세워 공양하였다.

 

태고는 석옥의 인가를 받고 연도로 돌아가 영령사에 주지하며 불교계에서 활동하였고, 1348년에 귀국하였다. 태고는 석옥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던 듯한데, 석옥청공(1272-1352)이 입적하자 원 조정에 상주하여 시호를 내리도록 표문을 올렸고, 원 조정에서는 「불자혜자선사」로 시호를 내렸다. 이어 강절에 공문을 보내 정자사의 평산처림(1279-1361)에게 청하여 함께 천호암에 가서 석옥의 사리를 취하여 관반사와 함께 귀국하여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태고화상어록 등 관련 기록에 언급된 바 없다.

석옥청공의 입적과 관련하여 주목할 일은 1354년 6월 4일에 호주 하무산 천호암의 승려 法眼이 해로를 통하여 입국한 일이 있었다. 이 법안은 석옥청공의 문도로 백운경한을 만나 스승의 임종게를 전하였다. 이에 백운경한은 6월 14일에 해주 안국사에서 재를 설하였다. 「백운화상어록」에는 석옥청공의 사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補續高僧傳』에는 사리를 가져와 탑을 세워 공양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당시 고려의 관계자가 사리를 가지고 천호암 승려 법안과 함께 귀국하였는지, 아니면 법안이 독자적으로 입국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분명치 않다.

이 일이 사실이라면 태고가 청공의 사리를 국내에 봉안한 것은 1352년에서 1361년 이전으로 국사로서 불교계를 주도하던 시기였다. 현재 청공의 사리탑에 대한 자료는 잘 찾아지지 않지만 임제정맥인 석옥청공의 사리를 봉안하여 사법의 정통성을 갖춘 셈이다. 이는 혜근의 지공 영골 봉안 및 부도탑비 건립 등과 함께 상대될 수 있는 사안으로 추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원증국사 보우 연보>

연도

국왕

태고보우의 행적

비고

1301

忠烈王 27

9月 楊根郡 大元里에서 출생, 俗姓 洪氏. 諱普愚 始名普虛

 

1313

忠宣王 5

出家, 楊洲 檜巖寺 廣智禪師를 찾아감.

 

1326

忠肅王 13

華嚴選科 합격.

 

1333

忠肅王 復2

城西 甘露寺에서 참선, 첫 번째 見性

 

1337

忠肅王 6

가을 佛脚寺에서 두 번째 見性, 栴檀園에서 冬結制.

 

1338

忠肅王 7

正月 세 번째 見性, 3月 고향 楊根에서 見性 완성.

 

1339

忠肅王 8

逍遙散 白雲庵에 주석.

 

1341

忠惠王 2

三角山 重興寺 太古庵에 주석, 禪門 개창.

 

1346

忠穆王 2

봄 元으로 감, 11月 順帝의 청을 받고 《般若經》강설.

 

1347

忠穆王 3

4월 연도를 떠나 축원수성을 만나기 위해 남소로 감

7月 天湖庵에서 石屋淸珙 만나 傳法 받음.
10월 燕京 도착, 11月 永寧寺에서 開堂法會 개설.

나옹혜근 구법

(1347-1358)

1348

忠穆王 4

봄 歸國, 三角山 重興寺에서 夏結制.
여름 龍門山 기슭에 암자 짓고 小雪山이라 칭하고 칩거.

 

1352

恭愍王 1

5月 王宮에서 설법, 敬龍寺에 주석. 가을 小雪山으로 퇴거.

백운경한 구법

(1351-1352)

무학자초 구법

(1353-1356)

1356

恭愍王 5

3月 奉恩寺 開堂法會 개설.
4月 王師에 책봉됨. 廣明寺에 圓融府 설치.

 

1357

恭愍王 6

正月 왕궁에서 鎭兵法會 개설. 2月 小雪山으로 퇴거.
紅巾賊 침입 예고하며 성곽 수축 건의. 彌智山으로 피난.

 

1366

恭愍王 15

10月 王師 사퇴, 兜率山에 우거. 1367 화엄종 천희 국사

천희 구법(1364)

1368

恭愍王 17

봄 全州 普光寺에 우거. 여름 俗離山에 금고됨.

 

1369

恭愍王 18

3月 금고에서 해제되어 小雪山으로 돌아감.

 

1371

恭愍王 20

國師에 책봉됨. (나옹혜근 왕사)

신돈 사망

1378

禑王 4

瑩原寺에 주석. 이듬해 小雪山에 퇴거.

 

1381

禑王 7

겨울 國師에 다시 책봉됨, 加恩 陽山寺에 주석.

 

1382

禑王 8

여름 小雪山으로 돌아옴, 12月 24日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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