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응(동방불교대학 총장)

차 례

I. 들어가는 말

II. 전법포교의 의의

III. 불교웅변을 통한 포교 

IV. 불교웅변의 현대적 응용

V.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이 소론은 대한불교웅변인협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불교웅변의 중요성과 의의에 대해서 인식을 새롭게 하고,전법포교(傳法布敎)의 수단으로서 불교웅변의 시대적 응용을 살펴볼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대개 우리는 웅변이라고 하면 웅변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그리고 웅변술의 이론적 ·체계적 연구를 수사학(修辭學)이라고 한다. 웅변은 서양에서만 시작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데,이것은 아주 잘못된 이해이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전국시대에 유명한 소진 장의와 같은 유세가(遊說家)들이 있었고,인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변론가(辯論家)들이 있었다.나는 이 소론에서 불교적 입장에서 불교웅변의 의의와 불교웅변을 통한 포교활동에 초점을 맞춰서 이 논문을 전개하고자 한다.불교웅변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부처님으로 부터서 비롯됐다.부처님은 당대의 세속적 학문을 다 탐구하고 출가하신 분으로서 이론적 연구가 아닌 실천적 명상의 길을 택해서 진리의 궁극적 피안(彼岸)에 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부처님은 고행수도를 통해서 진리를 터득하여 일체를 알게 된 깨달은 분인 각자(覺者)가 된 것이다.그리고 부처님은 설통(說通)의 능력을 얻으셔서 말씀이 사통팔달한 대 자유 설법가이셨다.

이 세상에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대웅변가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석가모니 부처님은 45년 간 팔만사천가지의 법문을 설하셨는데,이 내용은 전부 수사학적 웅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부처님은 그리스.로마의 웅변과는 다소 다른 양상의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대화형, 내지는 설득형의 웅변술을 구사한 것이다.부처님은 직설적인 법문을 통해서 진리를 설파하시기도 했지만,주로 제자들과 대화를 통한 대화에 의한 화술을 구사하시기도 했다. 

웅변이라고 하면 대개 정치가들이 애용하여 구사하는 수사학적 웅변술을 말하지만,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 플라톤과 대화형의 웅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전파한 것이다.그렇지만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다른 방식의 수사학을 구사 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리고 로마시대의 키케로는 이른바 요즘 웅변연습과 같은 프로짐나스마타(progymnasmata)에 의한 법정에서의 변론과 철학적인 사색에 의한 학술적 발표와 같은 형식의 수사학을 적용하여 발전시켰다.주로 공중 앞에서 말할 때에 사용되었던 테크닉이다.대체로 이런 형식을 라틴스타일이라고 하는데,이것은 키케로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 시대에는 풍부한 인문사회적인 지식과 함께 위트와 유머가 섞여서 사용되었고,강조형의 웅변이 특징이며 감정도 가미하여 대중에게 호소하는 형식의 수사학을 구사한 것이다.  

한국웅변계에 대한 소감이나 어떤 견해가 있다하더라도 주제넘게 촌평을 가할 입장은 아니지만,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면서 양팔을 벌려서 크게 휘두르면서 손짓을 해가며,입에는 거품을 품어내면서 얼굴은 찡그리고 악을 쓰는 스타일의 열변을 토하는 정치가들의 수사학은 이제 퇴색해가는 느낌이 없지 않다.세계적인 정치가들도 보면 자신의 전문지식과 성공적인 경력을 바탕으로 조용하게 설득형의 수사학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다.‘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한 것은 웅변을 너무 수사학적 측면에서 웅변술에만 의지하여 타성적인 웅변에 치우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그러므로 21세기 현대사회에서는 웅변도 변화의 모습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특히 불교 웅변의 현대적 응용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불교계에는 이와 같은 웅변술이나 적극성이 더욱 요청되는 입장이라고 하겠다.그나마 이 정도의 적극적인 웅변활동도 없기 때문이다.단지 불교웅변인협회에서 그동안 40년 간 이 분야에서 꾸준하게 정진해 왔다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해가 갈수록 교세가 약해져 가고 있다.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불교의 포교활동이 매우 침체된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와 문제점이 있을 것이지만,이것은 불교에 대한 수행과 불교지식의 부족에서 오는 이유가 가장 큰 것일 수도 있겠다.게다가 전법 포교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사찰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무사안일하게 타성적인 운영을 하고,어린이 법회나 청소년 법회 같은 또는 청년회 법회는 귀찮고 소득이 없다는 이유로 꺼리는 편이다.하기야 성인을 상대로 하는 일반법회 마저 무시당하는 입장이다.근자에는 절에서 불교대학을 운영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론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철저한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교육이 아니라 단순히 신도확보나 유지를 위해서 형식적으로 운영하는데,사원에서 신도들을 위한 불교교육을 보다 체계있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불교교육에는 반드시 전법포교를 위한 불교웅변 교육이 첨가돼야한다.그리고 어느 정도 전법포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포교방법의 수단으로서 웅변술 즉 설법의 수사학적 방법론을 익혀서 불교를 타인에게 전하는 포교사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는 일을 해야 한다. 

수행을 오래하고 불교지식이 풍부하고 열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불교인들에게 적응되는 수사학적 대화술로서 접근하지 않으면 설득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화의 단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단순한 수사학적 웅변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불교의 진리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현대의 지성인과 일반 교양인들에게 쉽게 접근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학적 방법론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본 소론에서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염두에 두면서 이 논을 작성하려고 한다.그리고 좀더 부연하면 불교웅변은 전법포교가 목적이며 웅변은 수단이나 방편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지식과 정보가 요청되는 21세기에는 어느 정도 수사학과 웅변술로 설득형의 대화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설득형의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웅변 테크닉을 익혀서 효과적으로 응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II. 전법포교의 의의   

 

석가세존은 6년 고행을 통해서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대 해탈의 자유를 얻으셨다.우주만유의 근본진리와 인생을 다 알아버린 다음에는 더 이상 의문도 궁금증도 없었다.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법열(法悅)을 즐기면서 조용히 명상을 하면서 인생의 고(苦)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즐거움에 만족하였다.몇일을 이런 상태로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밤 하늘에서 범천(梵天)의 계시가 있었다.세존께서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다음 날 과거에 함께 수행했던 동료들인 교진여(안나 콘단냐,Anna-Kondanna)등 5비구를 찾아서 바라나시로 향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했던 부다가야를 출발해서 바라나시로 향한 것은 불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왜냐하면 불교역사는 이 다섯 비구를 만나서 최초의 설법을 함으로써 불교사(佛敎史)는 시작되기 때문이다.부처님의 성도도 중요하지만,더 중요한 것은 바로 전법(傳法)이다.부처님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로 갔으나 함께 수행했던 동료들은 보이지 않고 다수의 고행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고오타마 부처님은 이들과 진리에 대해서 논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논파하고 결국에는 그들로 하여금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성불했다는 인정을 받고,동료들을 찾아서 녹야원(사슴동산)으로 향했다.저 멀리서 그를 알아본 교진여 등은 가까이 오면서 부처님의 몸에서 방광이 나면서 서기(瑞氣)가 감도는 것을 보고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이미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했음을 직감하고 바가완(Bagawan) 즉 부처님(깨달은 자의 칭호)으로 부르면서 부처님의 발등에 입을 맞추어 예를 표하고 최초의 설법을 듣게 된다.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들에게 연기(緣起)와 중도와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법문을 설하게 되는데, 이것을 전법륜(轉法輪)이라고 부른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의미이다. 불교 웅변도 바로 이 시점에서 출발한다.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한 설법은 연기사상과 사성제 법문이다. 그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그대로 설파하여 주신 것이다. 이로 부터 부처님은 45년 동안 열반에 드실 때 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설법을 하셨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웅변을 통해서 만천하에 알리신 것이다. 부처님은 이 다섯 비구와 더불어서 최초의 불교승단(佛敎僧團)을 구성하게 되고, 성도(成道)한 직후에 만나게 된 타푸사(Tapussa)와 발리카(Bhallika)라고 하는 두 사람은 최초로 재가신자가 되었는데, 이들은 결국 재가와 함께 사부중(四部衆)으로 구성되는 불교교단의 시초가 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동체의 사부대중이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다. 비구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남자 스님으로서 독신 청정한 수행승을 말한다. 비구니는 청정하게 독신으로 수행하면서 포교하는 여자 스님을 말한다.우바새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믿고 비구 비구니를 외호하고 재정을 부담해주는 재가생활의 남자 불교신자를 일컫는다. 우바이는 남자 우바새와 함께 재가생활을 하는 여자 불교신도를 말한다.이 네 분들을 총칭해서 불교에서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한다. 이것을 출가이중(出家二衆)과 재가이중(在家二衆)이라고도 한다. 출가이중을 줄여서 출가중(出家衆)이라고 하는데, 출가중에도 사미와 사미니가 있고,사미와 사미니 중간에도 출가도 재가도 아닌 중간에 속하는 신분이 있다. 그렇지만,일반적으로 불교승단 또는 교단이라고 하면 4부대중이 원칙이다.본래 불교승단은 이렇게 출가이중과 재가이중으로 구성된 것이 기본단위이다. 

이 사부대중은 승가공동체의 아주 중요한 기본 구성단위이면서 실제로 승가를 운영해 가는 주체들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이 승가에 대한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승가라면 출가이중만을 생각하는 듯하는데, 승가 본래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대로 사부대중이 원칙이다. 말만 사부대중이고 실제로는 승단을 출가이중만이 주도한다면 이것은 승가 본래의 기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승가의 기본 개념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승가가 원만하게 운영되고 공동체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할 때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 이제 다시 부처님의 초기 승가로 돌아가 보자.           

부처님께서는 그가 출가하여 수행의 길로 들어설 때 그를 지도해 주었던 최초의 스승들인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부타(Uddaka Ramaputta)그리고 탄생할 때 예언했던 아지타(Asita) 선인(仙人)을 방문하여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설명하려 했으나 그 분들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부처님께서는 콘단냐 등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자 콘단냐는 이내 수다원과(Sotāpanna)를 얻었고, 다른 제자들도 곧 바로 차례로 수다원과를 얻고 모두들 아라한(Arahant)과를 얻었다. 다음에는 야사(Yasa)와 그의 친구 54명이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두 달도 되지 않아서 60여명이 아라한과를 얻었고,가섭(카사파,Kassapa) 3형제와 그의 제자들인 이백,삼백 그리고 오백 명 등 1,000명의 제자가 순식간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교단이 형성됐다.  부처님께서 최초의 설법을 하시고 교단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전법과 포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불교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교는 부처님의 성도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부처님의 전법으로 인하여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 점이 더욱 더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전법을 하게 되고 포교를 하시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부처님의 출가 동기는 고의 해결에 있었다. 고제(苦諦, Duhakaha Satya)란 고통의 진리를 말한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의 바탕이 고통이라는 통찰이다. 고통은 크게 생노병사 등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고(苦苦), 변화하고 무너지는 괴고(壞苦),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이상 피할 수 없는 행고(行苦)등의 3고(三苦)로 분류된다. 3고는 팔고(八苦)로 세분되기도 한다. 고를 해결한 이상 더 이상 그에게 수행이나 전법 같은 생각은 없었으나 범천의 권청(勸請)을 받아들여 법륜을 굴리신 것은 바로 일체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이다. 중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부처님 자신이 고통스럽게 여기고 궁금해 했던 의문을 해결했듯이 사바고해에서 허덕이는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벗어나서 깨달음을 얻어서 열반에 들도록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즉 불교의 가르침은 지혜와 자비로 압축할 수가 있다. 일체중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전법은 바로 지혜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고, 포교는 자비로써 일체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전법 포교는 단순하게 불교의 교세를 넓히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바고해에서 허덕이는 일체중생들을 지혜와 자비로써 구제하여 제도한다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이런 목적아래서 전법 포교하시다가 열반에 드신 것이다. 석가세존께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성인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삼의일발(三衣一鉢)의 무소유(無所有)정신으로 일체중생을 제도하셨는데, 그는 이른바 8만4천이라는 방대한 양의 설법을 하셨으며, 여기에 동원된 수사학은 주로 비유법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설법의 수사학으로서의 테크닉은 주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사용하셨다. 부처님은 첫째 상호설법(相好說法)을 하셨다. 부처님의 상호만 봐도 감명을 받아서 존경심과 신심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32상(相)80종호(種好)를 구족하신 분이다. 둘째는,문답법(問答法)을 사용하셨다. 대승경전(大乘經典)은 대개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금강경》,《원각경》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전의법(轉意法)이다. 상대의 논설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그 내용을 전환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가는 방법이다. 외도(外道)들을 제도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는데,《육방예경(六方禮經)》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묵언법(黙言法)이다.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질문의 경우에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14무기(無記)등을 가리킨다. 다섯째는 운문(韻文)은 기억과 암송에 편리하게 대답한 것으로 《법구경》《숫타니파타》가 이에 포함된다. 여섯째는 인연담(因緣談)이다. 인과법을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설하신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중국에서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의 방법으로 부처님의 45년 간의 가르침을 범주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설법은 나중에 삼장이 되었으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팔만대장경으로 확대.발전되었다.

 

III. 불교웅변을 통한 포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는 지혜와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석가세존께서 녹야원에서 최초로 법륜을 굴리신 것은 일체중생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지혜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해탈을 하지 못하면 세세생생 윤회전생(輪廻轉生)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뜻에서 광도중생(廣度重生)의 서원(誓願)을 세우시고, 전법포교(敎化)의 보살행을 일생동안 행하시다가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불교웅변이란 바로 이 석가 세존의 큰 뜻을 받들어 일체중생들을 지혜와 자비로써 제도한다는 원대한 서원을 세워서 실행하는 보살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단순히 교조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캠페인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불법의 진수를 전파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설법사(說法師)의 자격을 갖추고서 열변을 토하는 것이 바로 불교웅변인 것이다.  

웅변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가와 같은 웅변술을 구사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진리의 내용을 전파하여 지혜를 얻고 사바세계의 고통으로 부터서 벗어나는 해탈도(解脫道)를 얻게 하기 위해서 웅변을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부처님은 특별한 수사학적 기교나 특이한 웅변술이 아니었어도 깨달은 자라는 법력(法力)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 중생들을 제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부처님과 같은 법력 있는 깨달은 자가 출현한다는 것은 실로 희유한 일이 되기  때문에, 오늘날의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던 진리를 부처님을 대신해서 전파할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라는 유계(遺誡)를 내리시고 열반에 드셨는데,‘법의 진리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등불 삼아서 수행하고 전법포교 하라’는 유훈을 하셨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촉(咐囑)하신 유일한 가르침이다.  

부처님 재세 시에도 부처님 십대제자인 부루나 존자는 설법제일이라고 해서 웅변에 뛰어 나셨는데, 부루나 존자가 설법을 잘했다는 것은 진리를 잘 설파해서 설득에 능했다는 의미이다. 기교적이거나 수사학적인 웅변술에 뛰어났다는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진리에 정통해서 바르게 잘 전파했다는 것이다. 이 후에도 부처님이나 부루나 존자와 같은 위대한 대 설법사들은 불교역사상 수없이 많이 배출되었다.『묘법연화경』서품에서도,‘보살마하살팔만인(菩薩摩訶薩八萬人)이 개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불퇴전(不退轉)하야 개득다라니(皆得陀羅尼)와 요설변재(樂說辯才)하사 전불퇴전법륜(轉不退轉法輪)하시며(또 보살 마하살 팔만 여명이 있었는데 모두들 최상의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다라니(經)와 말을 잘하는 변재를 얻어서 불퇴전의 법륜(法輪)을 굴리어)’라고 했다. 변재를 얻어서 설법에 뛰어난 대보살들이 팔만명이라면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 말을 잘하는 웅변가 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구식의 수사학이나 웅변술을 통한 정치적 목적이나 중국의 유세가들 처럼 자신의 방책이나 권모술수를 왕에게 설득하여 등용되려는 세속적 목적이 아닌 그야말로 고통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얻어 대 자유인이 되는 지혜의 길을 전파하려는 설법으로서의 웅변을 했던 것이다. 이런 설법사들은 특별한 기교가 없어도 깨달음과 법력이 있었기에 많은 대중을 감화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었음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이런 변설(辯舌)에 뛰어난 설법사를 찾는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불교는 본래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전법 포교를 하는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만들어진 포교사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어느 정도 불법지식이 있으면, 이 지식을 수사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화술의 기술을 익혀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설득의 방법을 알아야 효과적인 전법포교의 결과를 얻게 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불교웅변도 현대적 응용이 필요하다.  

 

IV. 불교웅변의 현대적 응용  

 

불교웅변의 현대적 응용은 고전적인 의미의 설법 스타일에서 이제는 보다 현대적인 방법으로의 기교적인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불교에서 주로 하는 방식의 설법 스타일은 옛날식 그대로이다. 모든 것이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세상이다. 법당안의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법문 스타일은 변해야 한다. 종정 급이나 총림의 방장이나 조실 급이라면 몰라도 누구나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설법은 불교 전통의 설법의식에도 맞지 않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도 탁발을 갔다 와서 발을 씻으시고 깨끗한 방석(풀잎)에 앉아서 설법을 하시고, 공양을 하셨다. 불교가 중국에 오면서 법상이 높아졌다.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아무나 법상에 올라가서 설법하는 것은 시대변화에 맞지 않고 현대사회의 생활상이나 현대인들의 의식에도 영합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정각을 이룬 깨달은 자가 아니라면 감히 법상에 올라가서 상당법문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종정 급이나 방장 조실이 아니면 상당법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설법이나 불교 강의는 시대에 맞게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해야 한다.그렇다면 현대적인 방법의 설법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타종교의 포교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불교는 좋은 내용을 갖고도 설법방식의 미숙과 수사학적 응용 부족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 포교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웅변스타일도 현대인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데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 논리정연하게 설득형이나 설명형의 설법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큰 스님들처럼 선법문(禪法門)을 해서도 안 된다. 일반 불교신도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교는 선법문 식으로 해서는 어필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 불교도 과감하게 설법 스타일을 바꾸고 전문가들로부터 스피치 교육 특히 수사학적 기교를 배워야한다. 이런 맥락에서,21세기의 불교웅변도 변해야하고 시대에 적응하는 불교웅변의 응용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V. 나오는 말   

불교웅변인협회의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난 40년 간 불교포교에 크게 기여해 왔다. 불교웅변협회를 통해서 많은 연사들이 배출되어서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 40년 간의 공로와 노력은 크게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이제는 불교웅변인협회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주문하고 싶다. 앞에서 고찰해 본대로 과거 스타일의 웅변도 웅변이지만, 너무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인 단순한 웅변 컨테스트(경연)로서의 행사형 웅변대회는 이제 지양되어야 하고, 진정한 불교포교를 위한 설법사 내지는 전법사 양성으로의 전환과 현대에 맞는 설법 스타일을 구사하는 새 시대의 설득형이나 설명형의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불교웅변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웅변술의 방법과 기교면에서도 변화가 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앞으로 불교웅변협회가 제 역할과 기능을 발휘하려면 협회 관계자나 회원이나 출연 연사나 할 것 없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해서 이런 목표가 실행돼야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불교지식의 확충이다. 둘째는 불교수행을 통한 체험을 쌓아야 한다. 셋째는 공동 워크샵(workshop)이다.  

첫째는 불교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한다. 불교웅변의 실수(實修)도 중요하지만,우선은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이는 전법포교는 허약할 수 밖에 없다. 체계적인 불교지식을 갖춘 다음에 전법포교에 나서야 남에게 불교가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하여 전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축적해야 하는데, 그 축적 과정에 있어서는 문사철(文史哲)중심의 불교인문학적인 폭넓은 법주의 통불교적인 지식을 함양해야 한다고 본다. 상좌부 대승 티베트 불교권의 불교경전은 물론 역사와 논문 등을 많이 읽어야 불교가 체계가 설수 있다. 이런 연후에는 한국불교는 동아시아 불교라는 특수성이 있으므로 한국불교에서 주로 공부하는 경론서를 섭렵해야만 불교 지식을 체계적으로 온축할 수가 있다. 둘째는 불교수행을 통해서 체험을 쌓아야 하는데, 이론만 알고 실천이 없는 불교활동은 자칫하면 사상누각과 같은 공허한 신앙놀음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불교는 특히 체험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불교에 입문하면 승가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습의(習儀)를 배워서 익혔던 것이다. 출가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재가불자도 최소한의 불교예절이나 기본 교양을 익혀서 사원에서 신도들과의 대인관계라든지 법회나 행사 때, 종교인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셋째는 공동 워크샵인데, 적어도 불교를 전법 포교할 정도의 설법사나 포교사가 되려면 워크샵을 통해서 사회와 소통하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토론과 대화의 방법을 연구하고 실습하지 않고서 전법포교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참고로 이 소론은 불교웅변인협회에서 주관한 ‘불교웅변인협회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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