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평화통일 전망

지난 8월 27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종교평화세미나에서 본종 동방불교대학 총장 원응 스님이 -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평화통일 전망-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지난 8월 27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종교평화세미나에서 본종 동방불교대학 총장 원응 스님이 -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평화통일 전망-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I. 시작하는 말

II. 불교의 평화사상

III. 불교의 국가관

IV. 결론: 평화통일 지향의 남북불교교

 

원 응

<태고종 종립 동방불교대학 총장. 철학박사>

 

I. 시작하는 말

 

한반도 평화통일을 전망하고 어떤 대안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본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접근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통사적(通史的) 관점에서 평화통일을 어떻게 보고 단계적으로 이룩해 가야 하는가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면서 국제정치. 외교 군사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할 범주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종교인의 역할과 사명도 지극히 추상적이고, 종속적인 관점일 뿐이지 종교가 한반도 평화통일에 직접적인 이니셔티브(진취성)를 쥔다거나 상황을 바꿀 정도로 큰 역학적(力學的) 추동력(推動力)이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적어도 한반도평화통일에 대한 보조적 분위기 조성에는 정치 경제적 범위에서 접근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사상적 정신적 영역이 있다는 것은 확신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본 발제자는 불교의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전망하는 의견을 개진해 보고자 한다.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평화통일에 불교가 어떻게 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대안을 제시한다든지 하는 실제적인 주창이나 구호, 당위적인 민족사적 결합을 막연하게 호소한다는 것보다는 불교의 평화사상과 국가관을 먼저 살펴보고, 그 실천적 대안으로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남북불교교류에 초점을 두고, 발제문을 정리하고자 한다.

 

II. 불교의 평화사상

 

대체로 우리가 평화를 말할 때, 평화의 상대적 개념으로 폭력성의 투쟁을 생각한다. 평화가 없다는 것은 전쟁상태이거나 폭력이 난무하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뜻한다. 그렇지만 불교에서의 평화를 말할 때는 매우 정신적인 관점에서 평화를 말한다. 인간이 고뇌할 때 평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이란 바로 갈망에 의한 극단적 탐욕으로부터 생긴다고 보았다. 고통은 또 지극히 싫어하는 혐오인 공포와 망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평화운동이란 이런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개인적 평화성취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이 평화성취의 대안으로서 사성제라는 진리의 철학을 제시했다.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이면서 불교 철학적 기초가 되는 사상이다. 불교에서의 평화란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적 마음의 평온 상태를 평화로 본 것이다. 내적 평온의 상태가 바로 고통이 소멸된 상태로서의 행복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음의 평화가 있고나서야 외적 평화가 있게 된다는 논리인데, 우리가 여기서 의미하는 평화통일은 정치군사적 협약이나 힘의 논리인 전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비폭력적인 방법에 의해서의 평화적 접근을 의도하는 개념이 강하다. 하지만, 관념적 평화통일 사상이나 철학이란 것은 때로는 얼마나 허무적인 이상론인가 하는 우려를 낳게 되는데, 적어도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이 수식어로 들어가는 평화통일은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평화성취의 내적 평화로서 고통의 소멸은 평화철학으로서의 사상이 되며 실천적 평화운동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성제란 한마디로 네 가지의 진리를 뜻하는데, 고통을 소멸하여 평화에 이르게 하는 단계적 과정을 ‘네 가지 높은 깨우침이 있는 진리’로 파악한 것이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놨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III. 불교의 국가관

 

우리나라의 경우는 광복 이후에 전통적인 나라의 개념 위에 새로이 근대적 국가의 개념이 첨부되어 국가관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남북을 의미한다. 남북이 법적·정치적인 개념으로는 별개의 나라로 파악되지만, 적어도 광복 이전의 나라에 대한 개념으로서 말과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공통적인 역사적 유산을 소유한 집단으로서의 영토를 함께한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다. 한반도라는 용어는 적어도 남북이 오랜 세월 동안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온 공통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공통의 역사적 체험과 고향으로서의 영토의식이 복합적으로 결집되어 나라의식을 향유해 왔음을 의미한다.

 

인도에서 불교의 국가관은 절대적이다. 부처님 자신이 왕자 출신이며, 부처님 승가공동체가 성립하면서 국가 즉 왕실의 지원 아래 존립했기 때문에 불교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 왔다. 불교의 전파는 민간보다는 왕권에 의한 왕실로의 전파였기 때문에 불교는 처음부터 왕실불교였다. 불교가 남.북방으로 전파되면서 왕실에서 수용했기 때문에 불교의 국가관은 불법의 숭상과 나라의 수호는 동일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전통이 통일신라에서 강하게 전승되었으며, 고려시대 또한 계승되었다. 신라인들은 자기 나라를 부처나 보살들이 사는 깨끗한 땅, 즉 정토(淨土)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즉불정토사상(新羅卽佛淨土思想)’이다. 신라인들은 자기 나라를 저주받은 땅이 아니라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고 여겼기에 우리는 신라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호국정신은 불법 수호와 나라 수호를 일치시킨 신라인들의 나라의식에서 우리는 화랑도가 펼쳤던 애국활동의 철학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이 사회적으로 팔관회(八關會) 및 백고좌(百高座)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의 <십훈요 十訓要>에 보이는 팔관회의 뜻과 의종의 팔관회 부활 취지도 단지 불교적 행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의 정신을 부활시켜 나라의 융성에 이바지해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몽고의 고려 침략 때 이루어진 대장경판 제작도 저 신라 정신의 의지를 승계한 것이고, 그 경판 제조 때 이규보(李奎報)가 쓴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의 정신도 이러한 전통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불교는 국가적 이념에서 배척되었고, 그 전통과 여파는 근.현대에 이르게 되고, 불교의 국가관에 변화를 가져 왔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휴정(休靜)의 호국정신도 신라 원광의 <걸사표(乞師表)>에 나오는 정신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고려불교는 신라불교만큼 불교신앙을 통한 나라 흥륭의 강렬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인들은 불교에 바탕을 둔 정법(正法) 수호가 곧 국가를 수호하는 것과 같다는 국민정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평화세미나에 참석한 200여명의 각 종교대표자들이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종교평화세미나에 참석한 200여명의 각 종교대표자들이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IV. 결론: 평화통일 지향의 남북불교교류

 

남북불교 교류를 위한 담론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북한의 체제를 전제해야 하는데, 북한체제에서의 종교인식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의 종교인식은 칼 마르크스의 종교관에 기인하지 않는가 하는 선입견이 있다. 흔히 마르크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때문에 보수적인 종교인들로부터 반(反)종교적 인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현실 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적 도피경향을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환상적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종교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실 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말이라고 해석해야 하며, 실제로 민중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계급투쟁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 때는 하늘나라, 극락, 메시아, 미륵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 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종교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주체사상에 의해 신권체제를 갖춘 독특한 국가이다. 북한체제에 적응하면서 생존해온 북한의 종교는 종교적 요인과 국가체제로 인한 요인들에 의해 종교지형이 변해왔다. 북한의 종교지형의 변화역사는 항상 최고 권력자에 의해서만 변화된 것이 아니다. 해방 후 북한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종교내적 요인인 북한체제에 대한 기존종교들의 이데올로기적 해석과 시선이 가장 중요했다. 이때 각 종교들이 새로운 체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체제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종교지형이 달라졌다.<북한의 종교, p113,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ACTS연구원 刊 참조>

 

북한불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면, 북한에도 불교사찰이 존재하고 승려가 있으며 불교 도가 있느냐하는 문제인데, 불교사찰이 있으며 승려도 있고, 불교도들 또한 존재하고 있음은 현실이다. 남한 쪽에서는 북한방문도 여의치 않고, 통일부의 접촉 승인 등을 거쳐야 하며, 북한 측으로부터의 타당한 초청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재미 교포들은 북한을 관광차원에서 방문할 수가 있다. 미국 뉴욕에서 발행하는 월간《미주 현대불교》를 발행하는 김형근 편집인이 불자들과 함께 북한사찰 순례를 하고 기록한 ‘북한사찰순례와 문화유적 답사기’에 의하면 북한에도 사찰이 있고, 스님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내용가운데 잠깐 소개해보면, “우리 일행이 간 곳은 평양을 비롯하여 묘향산, 원산과 금강산, 함경북도 칠보산과 주을 온천(경성), 남포를 거쳐 서해갑문과 구월산, 개성과 사리원 성불사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묘향산에는 보현사란 절이 있다. 절의 엣 건물이나 스님이 사진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불교가 분명 존재하고, 스님은 태고종의 스님들처럼 홍 가사를 하고 있었다. 안변 석왕사도 옛 모습 그대로 있고, 금강산 표훈사와 보덕암 등이 소개되고 있다. 재미교포불자들의 북한사찰순례의 마지막 코스는 정방산 성불사였다.

 

“14시 50분경에 박연폭포를 떠난 우리는 이번 북한방문에서의 마지막 탐방지인 정방산 성불사를 향해 달린다. -중략- 빗속을 허겁지겁 달려 돌계단을 오르고 ‘正方山 成佛寺’라는 현편이 붙은 입구 건물에 들어선다. 지금 소낙비를 피하고 있는 이 건물이 淸風樓(청풍루)이고 정면으로 안쪽에는 빗줄기 사이로 주불을 모셨을 極樂殿(극락전)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應眞殿(응진전)이, 좌측으로는 雲霞堂(운하당)이 있다. 요사로 보인다. 이 청풍루와 나란히 우측 뒤로는 冥府殿(명부전)이 있다. 마당 중앙에는 석탑이 있다. 짜임새가 사찰배치로 아담하고 푸근하다. 어린 시절에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를 통해 이름을 알게 되어 막연히 상상해 보았던 성불사가 바로 여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이고 ‘풍경이 어디 있을까’는 호기심이 앞선다. 이은상 시, 홍난파 곡으로 온 국민이 애창하던 그 노래의 고향이니 만큼 감회가 크지 않을 수 없다. 빗줄기가 다소 수그러든다. 우리를 맞으러 나오신 ‘주승’은 50대 중반 쯤의 연세로 보이는 분이다.” <미주현대불교 2018년 1월호 통권 327호>. 북한에 직접 가보지 않고도 간접경험이나마 할 수 있는 북한사찰순례기가 실감난다. 이로써 보면, 북한에도 사찰과 스님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불교련맹중앙위원회’에서 발행한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이란 소책자<2001년>에 의한 ‘평화’에 대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평화와 평등, 우의와 친선의 리념을 꽃피워 주시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만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려는 것은 불교도들과 전 인류의 한결 같은 갈망이며 막을 수 없는 오늘의 시대적 흐름으로 되고 있 다. 그것은 자유와 평화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 의 본성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다 같이 평등하며 이것은 자유와 평화의 기초이다. 착취와 억압, 지배와 예속을 받기 위해 태어 난 사람은 없다. 본성적인 인간의 평등은 세존이 성도 후 사바세계에 처음으로 선고한 《일체중생 실유불성》 사자후에도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때문에 불법의 가르침도 일체중생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공화국 북반부 전체 불교들은 위대한 ...과 경애하는 ...께서 밝혀 주신 자주, 평화, 친선의 대외적 리념과 현실의 요구에 부합되게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선행에서 언제나 세계의 모든 불교도들과 련대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본래의 자유와 평화는 인류의 똑 같은 갈망이며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설파하면서, “인간은 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다 같이 평등하며 이것은 자유와 평화의 기초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착취와 억압, 지배와 예속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본성적인 인간의 평등은 세존이 성도 후 사바세계에 처음으로 선고한 《일체중생 실유불성》 사자후에도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때문에 불법의 가르침도 일체중생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부처의 불성론(佛性論)을 연계하여 평화사상의 철학적 논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따라서 세계평화 실현을 위하여 국제 불교 기구인 아세아불교평화회의(ABCP)와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남북한 불교도들의 접촉은 국제 불교 기구를 통해서였다. 냉전체제하에서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제3국에서의 접촉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었고, 같은 민족이면서도 같은 불교전통을 공유했던 불교도들이었지만, 소통은 불가능했었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가입되어 있는 세계불교도우의회(WFB)는 남북 불교도가 만나는 유일한 창구였으며, 세계불교도들의 관심사항이기도 했다. 다음은 아세아불교평화회의(ABCP)이다. 이 기구는 1970년에 몽골에서 공산사회주의권 불교대표들이 가입하여 활동한 국제 불교 기구이다. 한국에서는 한국-몽골 수교이후 이치란 박사가 최초로 가입하여 1998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로에서 열린 제8차대회에 처음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한 바 있다.

 

이후 남북한 불교도들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게 되고 남북불교도가 공동으로 법회를 열고,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하는 등, 교류를 해오고 있다. 한국불교태고종에서는 금강산 유점사 방문과 홍 가사 100점을 북한 스님들에게 제공한다는 제안을 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8월 15일 조계사 대웅전 광복절 기념법회에서 남북의 불교계가 공동으로 채택한 발원문이 부처님 전에서 낭독됐다. 민족공동체추진본부는 광복 73주년을 맞아 북측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와 8.15 남북공동발원문을 채택했다. 이번 8.15 남북공동발원문은 지난 2014년 이후 4년 만에 채택된 것이며, 올해 들어서는 부처님 오신 날 남북공동발원문에 이어 두 번째로 채택되는 공동발원문이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 원택스님은 발원문에는 "우리들은 분단의 비극을 하루빨리 가시고 남과 북(북과 남)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기 위해 판문점선언을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법등으로 삼고 그 실천 행에 떨쳐 나서겠습니다"며 남북의 불자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속적인 서원을 하기로 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종교인의 역할과 사명-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평화통일 전망은 결국 남북한 정치풍향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기왕의 불교교류가 지속되어서 남북불교도들이 평화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염원과 기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남북한은 오랜 세월동안 불교란 종교를 공통으로 공유해 왔고, 북한의 명산대천에는 아직도 사찰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통일 이후의 남북한불교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종교적 역할과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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