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승려들의 역경활동

 전회에서도 소개했지만, 주로 서역 승려들이 역경에 참여했다. 파르티아 왕자였던 안세고(148∼170)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등을 번역한 최초의 한역경승(漢譯經僧)이다. 로카세마(지루가참)는 쿠샨국 최초의 대승경전 번역승이다. 안현(181년)은 중국에서 득도한 파르티아 상인으로 안세고의 제자이다. 지요(185년)는 쿠샨국 승려로서, 로카세마 후계자로서 제 2세대 한역경승이다. 강맹상(194∼207)은 강거(康居,기르기스탄)에서 왔고, 지겸(220∼252)은 쿠샨국 승려로 그의 조부가 168∼190년간에 중국에서 정착한 바 있었다. 지예(230년경)는 남경에서 활약한 쿠샨국 승려다. 강승개(247∼280)는 중국의 남단에서 태어났으며,  탄티(254년경)는 소그디안 상인의 아들로서 파르티아 승려이다. 포옌(259년경)은 쿠차국의 왕자이고, 담마락사(265∼313))는 여러 세대가 돈황에서 살았던 쿠샨 출신이다. 안 파친(281∼306)은 파르티아 출신이고, 포 스리미트라(317∼322)는 쿠차국 왕자이며,  구마라지바(401년경)는  쿠차 출신으로 가장 중요한 역경승 가운데 한사람이다. 포 투텡(4세기)은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중국조정에서 고문으로 일했다. 파라마타(진제)와 아모가다바즈라(불공금강)는 중국의 4대 역경가의 한 사람들로 추앙받고 있는 분들이다.

“중국에서 한역경을 했던 초창기에는 인도 쪽 승려들보다는 중앙아시아의 서역 승려들이 주로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 왔다. 실크로드란 무역이 주된 업무였지만, 문화적인 교류 또한 활발하게 가동되었다.”

파란 눈의 서역 승려가 동아시아 승려를 가르치는 모습.
파란 눈의 서역 승려가 동아시아 승려를 가르치는 모습.

 역경승들의 이름에 지(支) 자 돌림이 많은데 이것은 월지(月支)국인 쿠샨제국 출신들을 한자식으로 앞에 지(支)자를 접두어로 사용한 것이며, 안세고 등의 안(安)씨는 안식국(페르시아=이란) 출신들의 이름을 그렇게 접두어로 사용한 것이다. 초창기 한역승들은 쿠샨제국이나 파르티아(페르시아)국 출신들이 주도한 것이다. 안세고는 안식국의 왕자였지만, 불교 전도승이 되어 중국에 와서 파르티안 후작이라고 하면서 중국식 성인 安 氏로 부르면서 주로 소승경전을 역경했다. 그의 이름 安은 파르티안의 안시(安息)에서 따왔으며, 모든 파르티안 사람들은 안 씨로 통했다. 148년 안세고는 중국 한나라 수도 낙양에 도착, 불전 번역장을 설치했다. 소.대승 경권 35종 41권을 한역했다. 현재 22종 26권이 현존한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안세고는 최초의 한역경승이다. 또 다른 역경승은 안현이다. 도안법사가 그를 칭송하기를 ‘道安法師譽之義理明晰,文字允正,辯而不華,質而不野’라고 했다. 안세고는 소승불교의 설일체유부의 비담학(毘曇學)과 선정이론(禪定理論)을 명석하게 번역하였고, 동한(東漢) 말년에는,중원에서의 난을 피하여  광주로  갔고, 최후에는 소주에서 입적했다。안세고는 《安般守意經》 등을 역출했다.

담마락사(竺法護)는 중국 서진 때의 역경승이다. 돈황보살로 존칭되었다. 8세 때 출가하여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방등경전을 번역하고 36개국의 서역 언어에 통효(通暁)했다고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축법호를 존중해왔고, 축법호가 한역했던 경전은《공찬반야바라밀경(光讃般若波羅密經)》 《십지경(十地経)》 《정법화경(正法華経)》 《유마힐경(維摩詰経)》《보요경(普曜经)》 등 대소승 150부 300권이다. 구마라즙의 역출을 현장의 신역경(新訳経)에 대해서 ‘구역(旧訳)’이라고 하며, 축법호는 구마라즙 이전의 역경으로‘고역(古訳)’이라고 한다. 그의 역경 활동은 《출삼장기집(出三蔵記集)》에 의하면 266년부터 308년에 걸쳐서 약40년 간 활동했다. 그의 역경장소를 보면 돈황, 장안, 낙양과 각지를 유방(遊方)했다. 역경의 양과 질의 면에서 축법호의 역출 경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정법화경(正法華経)》은 구마라즙 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経)》의 등장 이전에 법화신앙과 관음신앙을 중국에 가져왔던 경전이다. 《유마힐경(維摩詰経)》은 청담전성(清談全盛)의 서진으로부터 동진에 걸쳐서 귀족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이다. 《광찬반야경(光讃般若経)》도 노장사상이 주류를 이루는 서진의 사상계에 수용하게 한 반야경전 계통이다. 230년에 출생하여 인도출신 스승  축고좌(竺高座) 문하에서 공부하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266년에 낙양으로 와서 한역활동을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 장안을 중요한 불교센터로 만들었다.

구마라지바(鳩摩羅什 334년∼413년)는 일설에는 그의 생몰연대가 350년에서∼409년이다. 남북조시기의 역경승으로 구마라집, 라집으로 약칭하였다. 중국불교사상 4대  역경사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쿠차 출신 승려이다. 아버지는 인도 귀족 출신이며 어머니는 쿠차의 공주였다.  그는 처음 붓다스와미 문하에서 설일체유부에서 공부했고, 나중에는 대승불도로서 나가르주나의 中論을 공부했다. 그는 장안에서 활동했으며, 역경 승으로서 범본에서 한역을 다산(多産)했다.

파라마타(真諦 499년∼569년)는 구마라즙、현장과 불공금강 삼장과 더불어서 중국불교의 4대역경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서인도 태생으로 《続高僧伝》에 실려 있다. 대승불교가운데서도 유가행파(瑜伽行派)・유식학파(唯識学派)의 논을 전했다. 양나라 무제가 부남국의 고승에게 부탁하여 초청한 고승이다. 그는 양나라 말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76부 315권을 한역했는데, 《섭대승론(摂大乗論)》、《구사론(倶舎論)》 등의 중요한 경론을 한역했다. 만년에 남해를 경유하여 인도로 다시 돌아가려했으나, 자사(刺史)의 요청으로 광주에 머무르면서 역경에 종사했다. 진제의 역경의 특색은 강학(講学)과 역경이 표리일체였다는 점이며, 항상 역출된 경전에는 ‘의소(義疏)’나‘주지(注記)’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그가 번역한 《摂大乗論》을 소의로 하여 구사종(俱舍宗)의 일파인  섭론종(摂論宗)이 생겼다. 진제가 번역한 《大乗起信論》은 중국 일본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모가다바즈라(不空金剛705∼774)는 인도출신 아버지와 소그디안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사마르칸트(우주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불공삼장은 중국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승려였다. 그는 10세 때 중국으로 가서 득도했으며,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었다. 중국에서 외국 승려 추방령이 내려지자, 동남아와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구법 순례했다. 순례 중에 바즈라보디의 스승인 할아버지인 나가보디를 만나서《真実摂経》을 배웠다. 그는 746년에 500권의 경론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110부 143구 ᅟᅥᆫ의 경전을 한역하고、구마라즙・진제・현장 삼장과 함께 4대 역경가로 불린다.

이처럼 중국에서 한역경을 했던 초창기에는 인도 쪽 승려들보다는 중앙아시아의 서역 승려들이 주로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 왔다. 실크로드란 무역이 주된 업무였지만, 문화적인 교류 또한 활발하게 가동되었다. 이미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쿠샨제국 출신의 로카세마(지루가참)나 지요 같은 승려들이 낙양에 와서 역경에 종사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지 3백년이 지나자 중국 출신 승려들에게 인도란 어떤 곳인가 하는 동경이 싹트게 된다. 이런 구법의지와 취경(取經)을 위해서 머나먼 구법의 길을 떠난다. 중앙아시아인 서역보다는 인도행을 감행하고 싶어 했다.

4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구법승들은 동경하던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구법순례의 길을 떠난다. 한역경전이 성립 된지 3세기가 지나면서 오리지널 불교에 대한 동경과 궁금증은 중국이나 아시아 주변국 승려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승려는 법현이었다. 상좌부가 살아있는 스리랑카까지 갔다 와야만 그의 궁금증은 풀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2세기가 지난 후에 현장과 의정이 뒤를 따랐다. 거의 1세기가 지나서는 신라의 혜초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부단하게 전도승들은 중국으로 몰려오고 있었지만, 이 역사적인 동아시아 출신 구법승들은 인도를 향하여 여행하기 시작했다. 오리지널 불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법현(395∼414)과 현장((629∼644)과 의정(635∼713)과 신라의 혜초(704∼787)는 대장정의 발걸음을 옮기고야 만다. 법현과 현장은 육로로, 의정과 혜초는 해로를 택했다. 법현은 귀국길에는 해로로, 현장은 육로로 돌아오고, 의정은 해로로 귀국했으며, 혜초는 육로를 택했다. 이후에는 동아시아의 구법승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대두로 약 7세기말경이면 실크로드를 따라서 구법을 끝내게 된다. 이렇게 되자 실크로드 불교 전래의 중기부터 분기점이었던 돈황은 새로운 불교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돈황은 오랜 세월 사막에 묻혔다가 돈황문헌이 발견된 이후 세계불교계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인도로의 구법여행을 갔던 법현, 현장스님과 혜초스님 그리고 돈황문헌에 대해서 일별해보자. 법현(法顯, 337∼422)스님은 중국 동진 시대의 僧이다. 399년에서 412년 사이에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 가서 많은 불교경전들을 가져왔다. 그는 399년에 장안에서 慧景、慧応、慧嵬(외)、道整 등의 僧들과 함께 순례 길에 나섰다. 곤륜산 아래 호탄을 경유하여 중인도의 왕사성의 불적을 돌아보고 《마하승기율》《잡아비담심론》을 구했다. 413년 해로로 청주(산동성)로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불국기》 일명 《법현전》 《역유천축기전(歴遊天竺記伝)》을 남겼다. 당시 중앙아시아에 관한 중요한 사료가 된다. 당시 수도 건강(南京)에 와 있던 불타발타라를 만났고, 법현이 가져온 《대반열반경》 등을 역출(訳出)했다. 열반종 성립의 기초가 됐다. 《마하승기율》 40권도 역하고, 법현은 형주의 신사(辛寺)에서 향년 86세로 열반했으며, 몰후 《오분율》도 불타즙(仏駄什)이 번역했다. 그의 《불국기》는 초기불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실크로드 상에 있는 많은 5세기경의 국가들에 대해서 지리와 역사를 말해주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타발타라(359∼429)는 5세기에 최초로 《화엄경》을 번역했다.

현장(玄奘 602~664)스님은 당나라 초기에 중국과 인도불교의 가교를 놓은 구법승이다. 그는 17년간 구법순례를 하고 중국에 돌아와서 많은 범본경전을 역출했다. 그는 하서회랑을 경유하여 고창에 도착, 천산북로로 중앙아시아로부터 천축에 들어갔다. 인도 날란다에서 5년간 머무르면서 계현(戒賢) 논사에게 유식(唯識)을 배우고 각지의 불적지를 순례하고 천산남로를 따라서 귀국했다. 정관19년645년)1월、657부의 방대한 경전을 장안에 가져왔으며, 현장스님은 여행기록인 《大唐西域記》를 남겼다. 유식의 《유가사지론》 등은  불전연구에 있어서 원전역할을 하고 있다.

의정(義淨, 635∼713)스님의 본명은 장문명(張文明)이다. 그는 당나라 僧으로서 산동성 제남 시 출신이다. 15세 시에 법현과 현장을 사모하면서 서역행에 대한 뜻을 세웠다. 671년 37세에 산동성에서 동지 수십 명과 출발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중도 탈락하고 의정 혼자서 해로를 통해서 인도로 갔다. 인도에서는 녹야원 기원정사 등 불적지를 순례하고 해로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를 경유해서, 25년만인 695년에 귀국했다. 25년간 30여국을 유력했으며, 400부、50만송의 산스크리트어 本의 경율론(経律論)과 금강좌(金剛座)、사리 300 립(粒, 알)을 가져왔다. 측천무후는 낙양의 상동문밖까지 출영을 나갔으며, 불수기사(仏授記寺)에 머무르게 하고서 인도에서 가져 온 불전을 한역하도록 했다. 한역된 경전은 56부 230권에 미쳤으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帰内法伝)》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伝)》을 저술했다. 이 두 저술은 당시의 인도와 중국의 불교연구,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사회상황에 대한 귀중한 사료가 된다. 713년에 79세로 입적했으며, 법랍은 59년이었다.『宋高僧伝』巻1 참조.

혜초(704∼787)스님은 신라출신이다. 당나라에서 밀교를 공부했다. 수바카라시나(善無畏)와 바즈라보디(金剛智)아래서 공부했다. 그는 불경 오부에 능통한 승려로 추앙받았다. 723년 중국에 있는 인도출신 승려의 권유로 산스크리트어와 불교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대장정의 길을 떠났다. 719년경 중국 광주에서 남인도 출신인 僧 금강지로 부터 밀교를 배우고, 722년경 해로로 인도로 향해서 수년 간 여러 나라를 유력하고,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727년, 唐으로 귀착한 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国伝)》을 남겼으며, 장안의 대천복사(大薦福寺)에서 금강지와 역경에 종사하고、금강지 사거 후에는 불공 삼장(705~774)의 지도를 받았다. 혜초는 780년에 오대산에서《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乗瑜珈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教王経)》을 역출했다. 혜초는 《往五天竺国伝》에서, 인도에서 서쪽의 실크로드를 통해 토하라 페르시아 사라센(아랍) 까지 여행했으며, 그의 여행기에는 이곳의 지방 神 언어 기후, 문화 정치상황에 대한 귀중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혜초는 또 인도에서 불교가 기울어 가는 것을 보았고, 소떼들이 시내와 마을을 자유스럽게 다니는 것을 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908년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돈황석굴에서 발견할 때 까지 그의 《往五天竺国伝》은 석굴에서 잠자고 있었다. 원본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장의(張毅)가 《왕오천축국전전석往五天竺国伝箋釈》을 중화서국에서 출판했다.

돈황(燉煌)은 북남 실크로드의 교차점이다. 금타그 사막은 중국의 여섯 번째로 큰 모래산 사막이다. 돈황은 이 사막의 명사산(鳴沙山)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돈황은 실크로드의 분기점으로 영화를 누린 오아시스다. 근처에는 막고굴이 있으며, 여기서 돈황문헌이 발견되었다. 중국 감숙성 북서부의 도시이다. 근린에 있는 막고굴은 돈황문헌으로 유명하다. 청장고원(青蔵高原)의 북록、하서주랑의 서단에 있다. 옛날부터 중국과 서역과의 출입구로 사용되었다. 西는 타림분지 북은 고비사막 남은 기련산맥(祁連山脈)이다.

한역불교전래 초기에 불교승려들은 고대 북 실크로드를 거쳐서 돈황으로 진입했다. 장장 2600 km이다. 수세기 동안 서역에서 수집한 경론서들이 막고굴과 천불동의 장경동에 보존되었다. 약간의 기독교 서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90%가 불교전적들이다. 많은 돈황문서들이 국제돈황프로젝트 단체(the International Dunhuang Project)에 의해서 디지털화되어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축법호 같은 역경 승들이 이곳 돈황으로 오면서 막고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唐代에도 계속해서 서역으로의 현관 역할을 한 것이다. 돈황문헌은 1900년대에 돈황 시의 막고굴에서 발견된 문서군(文書群)을 총칭한다. 막고굴의 벽 가운데서 도사 왕원록(王円籙)이 우연하게 발견하였다.

唐代 이전의 귀중한 자료가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서《敦煌学》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돈황문서, 또는 돈황사본(敦煌写本)이라고도 한다. 1900년 막고굴의 제16굴의 중간에서 도사 왕원록이 허물어진 벽 중의 공간(耳洞)에서 문헌이 발견되기 시작됐다. 대량의 경전・사본・문헌을 발견하였다. 왕원록은 문자를 읽을 수 없었다. 왕원록은 지방관에게 보고하고、적당한 처리를 부탁하였다. 그 공간은 나중에 제17굴로 번호가 부쳐졌고, 「장경동(蔵経窟)」「보고(宝庫)」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도에서 발견소식을 들은 영국인 탐험가・오럴 스타인이 1907년에 마제은(馬蹄銀) 4매 (약500루피 )를 주고, 수천 점이 넘는 경전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옮겼다. 그는 그 공적으로 Sir(경 卿)의 칭호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와서 그는 중국어에 정통했던 이유로, 왕원록을 매수하여 산적한 문헌가운데서 특히 가치 있는 것만을 선별해서 수천 점을 사가지고 귀국했다. 신라 혜초의 《왕오천국전》도 여기서 발견되어,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청나라 정부는 돈황문헌의 보호를 명하고, 북경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왕원록은 일부를 숨겨서 가지고 있다가, 일본의 오따니(大谷) 탐험대 (1912년)와 러시아의 탐험대(1914년)에게 수백 점을 건넸다. 그 후에는 또 다른 탐험대(1924년)는 벽화(壁画)를 약품을 사용해서 떼 내어 약탈해 갈 정도로 귀중한 문헌들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미국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돈황문헌의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돈황이 서하(西夏)에 점령당할 적에 경전의 분서(焚書)를 두려워한 나머지 벽 중에 감춘 것이다. 하지만, 서하 왕조는 불교를 신앙한 나라였으므로 경전을 파괴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의 다른 설은 불필요한 문서들을 벽 중에 보관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불필요한 문서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가치 있는 돈황 문서가 되어 있다. 《敦煌学과 그 周辺』》藤枝晃講話, 1999年참조. 유진보(劉進寶) 지음, 전인초(全寅初) 역주. 돈황학이란 무엇인가, 대우학술총서2003년 참조. 

중국의 타림분지의 돈황 벽화에는 한 무제(기원전156∼87)가 불상을 숭배하는 모습이 있지만, 중국의 어느 역사서에도 이 기록은 없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기원전 2년에 월지국의 사신이 구송으로 불교경전을 전해왔다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고 중국학자들은 말한다. 기원후 70년경 후한 明 帝가 장군 반초를 시켜 흉노를 격퇴시키고 75년경에는 이 지역을 통제했는데, 이때부터 서역을 통한 한역(漢譯)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응<주필. 종립동방불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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