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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2018)년 06월 21일 목요일
지허스님의 ‘대 선지식 방 거사 고찰’ (18)
지허스님의 ‘대 선지식 방 거사 고찰’ (18)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8.02.2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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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선지(禪旨) 격차에 일호(一毫)의 여지도 없지않은가
분별이 어디에 있으며 승속(僧俗)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방거사와 제봉 선사

방거사가 어느 날 제봉 선사에게 물었다.

“당당히 말하는 것은 할 수 없는지요?”

제봉 선사가 “이럴 때 방거사가 주인공을 나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방거사가 이르되 “그렇게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합니까?”

제봉이 말하기를 “좋게 물어 보았으나 물어본 것이 붙지 못했도다.”

방거사가 큰 소리로 “자! 왔다! 자! 왔다!” 하였다.

여기에서 당당히 말한다는 것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손색이 없다는 말이다. 일체제불과 역대조사 앞에서도 차별이 없는 말을 가리킨다. 그 말은 최상승 도리의 말 외에는 없다. 방거사가 제봉 선사에게 그 최상승 도리의 말을 하라고 다그친다. 이에 제봉 선사가 너의 주인공을 보내면 말해주겠다 했다. 현재 나를 대하고 있는 방거사는 형상의 방거사이니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구성 이전의 주인,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방거사를 보내라는 것이다.

일체중생에게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인연을 만나 모양을 만들어낸 가상의 내가 있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치 못하지만 누구에게나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참 주인이 있다. 이 주인 방거사를 내게 보내면 말해주겠다는 것이 제봉 선사의 말이었다. 방거사가 대답하기를 지금 나의 주인공을 대하고도 제봉 선사가 정신이 없어 못 보니 이를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제봉 선사가 이쯤에서 대답할 말이 막힐 법도 하지만 갈고 닦은 도인들의 맑은 선지(禪旨)는 심오하고 예리하여 가고 옴이 우리 중생계를 넘는다.

제봉 선사가 말하되, 방거사의 당당히 말해보라는 물음은 좋으나 그 물음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에 방거사가 “자! 왔다! 자! 왔다!” 하고 두 번이나 강조하는 것은 제봉 선사가 바로 보지 못하여 제봉 선사가 보내라는 주인공이 여기 당당하게 왔으니 보라고 하고 또 보라고 강조한 것이다.

참으로 두 분의 선지 격차(隔差)에 일호(一毫)의 여지도 없지 않은가. 분별(分別)이 어디에 있으며 승속(僧俗)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들도 누구든지 진실한 수행에 철저하면 방거사와 같고 제봉 선사와 같지 않을 수 없다. 뜻이 있는 젊은이들은 지은 때가 아직 마음에 묻지 않았으므로 발심하여 수행에 전력을 다하면 된다. 나이가 들었다 해도 그간 경험한 세상 일이 덧없는 줄 아니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나면 순풍에 돛 단 듯 수행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오로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방거사와 단하 선사 (1)

어느 날 단하 선사(739~ 824)가 방거사를 찾아갔다. 대문 앞에서 방거사를 만나 눈앞에 있는 방거사를 보고도 단하 선사가 “방거사 집에 있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방거사가 “배가 고프면 밥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단하 선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방거사에게 “방거사 집에 있는가?”하니 방거사가 “창천(蒼天), 창천(蒼天)!”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어서 단하선사도 “창천(蒼天), 창천(蒼天)!” 하고 방거사 집 대문 앞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 가버렸다.

단하 선사가 방거사의 대문 앞에 와서 방거사 집에 있느냐고 물었다. 본인을 보고도 본인의 거처를 객이 물으니 이는 우리 중생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식 밖의 일이다. 아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격이고, 어쩌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인(道人)과 도인은 차원이 다르다. 도(道)는 모양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단하 선사는 방거사 집에 와서 방거사의 마음 주인, 즉 방거사 주인공을 방거사에게 물어 찾은 것이다. 방거사가 배고프면 밥을 가리지 않는다고 대답한 것은 방거사를 만나러 찾아왔으면 방거사의 껍질인지 알맹이의 주인공이든지, 밥이 식었는지 따뜻한지 여부를 가릴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껍질이 있으면 알맹이 있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는가 라는 뜻이다.

단하 선사는 이에 또다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식은 밥이나 아무렇게 주는 밥은 먹지 않겠다는 뜻을 비춘다. 내가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주어야 된다는 것이 선사의 의중이다. 선사는 방거사의 껍질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하고 다시 방거사 주인공만을 찾았다. 주인공 방거사가 ‘창천(蒼天)’을 외치며 집으로 들어가 버리니 주인공을 찾던 단하선사도 ‘창천(蒼天)’을 외치며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창천(蒼天)’은 ‘푸른 하늘’이라는 자해석이고 ‘탄식(歎息)’이나 ‘개탄(慨嘆)’을 뜻한다.

이 대화는 방거사와 단하 선사의 두 주인공이 잘 만나 잘 놀았다는 이야기이다. 도인들은 이렇게 만나 도인 놀음을 한다. 주고 받는 놀이 속에 상부상조하여 확철대오의 세계가 명명백백해진다. 단하 선사는 유달리 방거사와 절친한 도반이었던가 싶다. 방거사 속가에 가서 방거사 뿐 아니라 방거사부인과 딸과도 법(法)을 거래했다. 이 글 처음에 방거사와 단하 선사와의 두 장면의 법 거래를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외의 일화 몇 가지도 소개하려 한다.

    방거사와 단하 선사 (2)

어느 날 단하 선사가 방거사에게 찾아와서 “어제 나를 본 것이 오늘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하니 방거사가 대답하기를 “어제의 여법(如法)함이 현실의 일로서 하나의 종지(宗旨)의 안목으로 나타내 보라”고 했다.

단하가 이에 “종지의 안목은 도리어 방거사로부터 얻었을까?” 하였다.

이 말 끝에 방거사는 “나는 단하선사의 눈 속에 있는데...” 하니 단하선사가 “도대체 이 눈이 좁아서 어떻게 몸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 한다. 방거사가 말하기를 “도대체 이 눈이 좁아도 어떻게 좁으며 이 몸이 어떻게 편안히 둘 수 있을까?”라고 했다.

이에 단하 선사가 말을 그쳤다. 방거사가 “다시 일구(一句)를 이 이야기가 원만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으나 단하선사가 또다시 대답하지 않으니 방거사가 “다만 이 일구(一句)만을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하선사는 어제가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지나왔는데, 방거사가 객관적으로 나를 볼 때 같은지 다른지를 물었다. 방거사의 대답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법(如法)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종지를 나타내보라고 했다.

종지(宗旨)란 그 종파가 지향하는 취지이니 생명과 같고 종풍은 풍습으로 실행하여 온 전통을 말한다. 종지와 종풍은 그 종파의 전제이고 실질의 이유이다. 수행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교법(敎法)대로 실행하는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처음 발심하여 실천함으로써 각고한 노력 끝에 결과를 맺는 것이기에 어제와 오늘이 지혜의 증득을 진행해야지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호수가 잔잔해 보이지만 꾸준히 흐르고 있고, 멀리 보이는 산은 숲이 없는 듯 하지만 울창한 숲에서 새가 우는 것이 도인의 길이며, 나타나는 듯 숨고 숨은 듯 나타나는 것이 도인의 모양이다.

절친한 도반 단하 선사가 방거사에게 머물러 있지 않음을 물었고 방거사의 눈에 도(道)가 살아있는 단하선사가 보이냐고 물은 것이다. 방거사가 대답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더 미래까지라도 단하선사의 도행(道行)이 변함없음이 보이니 보이는 그 종지(宗旨)를 나타내보라고 했다. 선조사들의 선시(禪詩)나 송(頌)은 바로 그 종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단하 선사는 방거사의 요청에 겸손한 대답을 한다. 나의 종지의 안목은 방거사로부터 얻었노라고. 단하 선사는 방거사가 종지를 나타내보라 하니 그 종지를 방거사에게 얻었다고 겸손하고 도정(道情) 넘치는 대답을 하니 방거사는 또 한 술 더 떠서 단하 선사의 눈 속에 나의 종지와 단하 선사의 종지가 함께 들어 있다 하고 종지가 다 들어가기에는 이 눈이 좁아서 어떻게 편안할까 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도반이 또 있을까. 참으로 후세에 사는 수행자들을 부럽게 한다.

도반은 도를 닦아 나아가는 벗이기에 한편이라도 도가 정지되어 있거나 퇴보하면 왕래가 끊어지고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수행자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누는 친화가 정(情)이라면 수행자들의 정은 도정(道情)이기에, 속인이나 친부모 친척 또는 옛 친구가 보면 무정(無情)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방거사와 단하 선사를 뵙고 싶은 그리움이 가슴을 적신다.

단하 선사가 눈이 좁은 것을 걱정하니 방거사가 이 눈이 어떻게 좁으며 이 몸은 어떻게 편안한지를 단하 선사에게 물었다. 이에 단하 선사가 말을 그치고 가만히 있었다. 이를 보고 방거사가 일구(一句)를 말하면 우리 둘의 이야기가 원만해질 것이라 했지만 단하선사가 여기에서도 가만히 있고 대답이 없으므로 방거사가 다시 일구(一句)를 말할 사람이 없다 했다.

그러나 방거사는 아내와 아들 딸이 다 함께 도를 닦았기에 가정의 정을 도의 정으로 승화시켜 가족이면서 도반이 되었기에 오히려 출가 수행자들을 부끄럽게 했다. 방거사의 도(道)는 당대를 주름잡는 종가(宗家)의 생존하는 조사(祖師)와 제방의 모든 선지들을 두루 참병하여 훤출하고 당당하게 법 거래를 한 위대한 수행인이었으니 어록에 나타난 그 가족과 나누는 상승법의 요지도 그 수준을 능히 짐작하고 남는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