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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2018)년 04월 24일 화요일
지허스님의 '대 선지식 방 거사 고찰' (15)
지허스님의 '대 선지식 방 거사 고찰' (15)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7.12.29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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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으면 일체의 삼라만상이 한마음 짓기에 있고
깨달음이 없으면 삼라만상 자체에 마음이 갈라지기를 천 갈래 만 갈래이다

사람은 누구나 오로지 한 번의 삶 이외에 더는 없다는 상식을 지니고 살고 있다. 한 번의 삶을 어떻게 무엇을 향해 사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길의 선택은 오직 자신 밖에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세상을 사는 길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크게는 물질에 치우치는 길과 정신에 치우치는 길 두 가지가 있다.

정신에 치우치는 길 중에 다시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세속에 사는 길과 세속을 떠나 사는 길이 있다. 세속을 떠나 사는 길을 ‘출가’라 한다. 부모 슬하에서 자라 세상을 보는 눈이 10대에 처음 열려 남녀가 다름을 알고 학문의 고귀함을 바라보기도 하며 부귀공명이 호화로움을 추측하게 된다. 이를 두루 보고 판단하여 자기 인생의 길을 정하고 적극 노력하며 인생을 살다 마친다면 죽어도 후회가 없다. 그러나 생사(生死)는 윤회한다.

생각해보라. 언제까지 생사고해(生死苦海)를 윤회만 하고 살 것인가. 살아도 살아도 끝이 없이 행복인가 하면 불행이고, 불행인가 하면 순간의 행복이 와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세속의 장난속에 언제까지 살 것인가. 이는 누구의 장난인가. 이를 단칼에 자르고 평정할 방법은 나 자신의 결단 밖에는 없다.

생사를 훌훌 벗고 승속을 떠나 성불하려면 화두(話頭) 하나를 들고 천길 철위산(鐵圍山) 문 없는 곳에 들어가서 이를 결사의 의지로 뚫고 살아나야만 견성오도 할 수 있다. 견성오도를 위해 출가를 했거나 속가에서 속인으로 수행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미리 겁먹을 것 없고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면 능히 이룰 수 있다.

여우는 잔재주가 많아 한 가지에 몰두하지 못하지만 재주 없는 고슴도치는 한 개의 굴에 몰두한다. 영리하기만 한 사람은 성불하기 어렵다. 불가에 들어와서 출세에 뜻을 둔 사람은 성불과는 반대 선상에 있다. 수행자는 영리하지만, 화두를 들고 불철주야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만이 성불의 성공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이 고금(古今)을 통하여 지극한 수행으로 견성오도한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는가.

중국의 방 거사는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냐’를 화두로 삼았다면 우리 부설거사는 ‘병만 깨지고 허공에 물만 남게 함’이 화두이다. 이것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화두와 같고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이며 개의 불성(佛性)을 물음에 ‘무(無)’라 했다는 화두와 같다.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이란 화두가 있다. 이 화두의 기원은 방거사가 찾아가 선문답을 나눈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중국의 낭주(朗州) 자사(刺史), 즉 지금의 도지사 이고(李고)가 약산선사를 찾아왔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사가 손가락으로 위와 아래를 가리키며 “알겠는가?” 하였다. 도지사 이고가 모르겠다고 하니 선사가 다시 이르기를 “雲在靑天水在甁-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느니라.” 하셨다. 이 말에 도지사가 깨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약산선사에게 바쳤다.

鍊得身形似鶴形(연득신형사학형)

千株松下兩函經(천주송하양함경)

我來問道無餘說(아래문도무여설)

雲在靑天水在甁(운재청천수재병)

몸은 연마하여 학같이 되었는데

천 그루 소나무 밑에 두어 권 경책이로다.

내가 와서 도를 물으니 다른 말씀 없이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다 하네.

부설거사가 제시한 화두와 약산유엄 선사의 화두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설거사는 신라 선덕여왕과 신문왕 시기인 634~691년에 생존했던 사람이요, 약산유엄 선사는 745~828년 생존한 중국의 대선사이다. 그러나 부설거사는 병과 물을 이끌어 도를 보였고 약산유엄 선사는 병 속 물을 화두 삼아 후학에게 깨달음을 얻게 한 공통점이 있다.

이 화두는 49재나 천도재 염불중에 하단관욕편에 있고 영가가 목욕을 한 뒤 종이옷을 갈아입고 난 뒤 법주가 영가를 향하여 생전에 지녔던 어두운 중생의 안목을 버리고 지혜롭게 눈을 바로 떠서 들으라는 뜻으로 이 화두를 염불로 쓴다. 이 염불은 중생의 안목이 탐진치(貪瞋痴)에 있으니 이를 버리고 한 생각 돌이켜서 모든 것을 씻은 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이 말에 몰입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몰입하다 보면 찰나에 깨쳐 생사를 해탈하니 영가가 이 화두를 알아듣고 자성을 돌아볼 줄 알아야 영혼의 천도가 이루어진다. 천도(薦度)를 주관하는 법주(法主)가 깨치지 못했다면 영가와 같이 이 순간에 깨쳐 자각각타(自覺覺他)가 되니 더욱 성공적인 천도식이 된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불성(佛性)을 마음 깊이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다. 다시 말하면 불성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을 일념(一念)하면 나와 아미타불이 둘이 아니다. 둘 아닌 아미타불을 찾는 그 자리가 극락정토(極樂淨土)이다.

장엄염불에 있지 않은가. “아미타불이 어디 있는가. 오직 마음 끝에서 생각이 끊어지면 생각이 다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있으니 안이비설신의가 자색의 금빛으로 항상 빛나리라.”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도는 어디에도 국한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천지 만유(天地萬有)에 유유 자재한 것이 도이다. 무명중생의 업장이 산만하여 부처와 조사가 화두를 제시함으로써 이를 벗어나와 일시에 타파하고 돈오(頓悟)에 이르게 하는 정점을 말한다. 깨달으면 일체의 삼라만상이 한 마음 짓기에 있고 깨달음이 없으면 삼라만상 자체에 마음이 갈라지기를 천 갈래 만 갈래이다. 그러니 도를 통하고 못 통하고는 마음을 짓느냐 못 짓느냐에 따라 달렸다.

세상을 사는 작은일의 결단에도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흔히 말한다. 하물며 도(道)를 이르는 데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형체 없는 마음을 지으려면 형체 없는 마음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엄경(華嚴經)>에 모든 것이 마음 짓는데 있다고 사구게(四句偈)로 쓰여있어 절에 아침마다 쇳송(종송, 鍾頌)에 읊고 천도재 시식(施食)에도 빠짐없이 외운다.

若人慾了知(약인욕요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을 완전히 알려고 한다면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성품을 직관하라.

모든 것은 마음 짓기에 있느니라.

여기에서 ‘만약’이란 만일(萬一)이고 이는 ‘만에 하나’라도 라는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좋아하고 향락에 빠져서 업(業)만 짓고 살다가 허무하게 죽고 생사(生死)를 윤회한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일상적인 모든 생각을 폐기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면 그 사람은 그날이 그날 같은 허무함을 절감하고 생사 윤회를 벗어나려 할 것이다.

벗어나는 길은 도(道)이니 도는 수행이고 수행은 깨달음에 있고 그 확연한 깨달음의 이름이 부처이다. 부처는 한량없는 시간 속에 본래 부처이니 이를 나누어 삼세불(三世佛)- 과거부처, 현재부처, 미래부처라 이른다.

과거의 일곱 부처님이 있으니 1은 비바시불(毘婆尸佛), 2는 시기불(尸棄佛), 3은 비사부불(毘舍浮佛), 4는 구류손불(拘留孫佛), 5는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6은 가섭불(迦葉佛), 7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다. 그 중 석가모니불은 현재 부처이지만 과거 부처에 포함되어 있다.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의 분상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가 중생들에게는 인지되어 있지만 미래의 부처님은 인지되어 있지 않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재 부처이기도 하고 과거 부처이기도 하다. 미래부처는 삼천불조(三千佛祖) 오십삼불(五十三佛)이 있다. 부처의 수를 헤아리자면 끝도 없고 가도 없어 항하(恒河) 모래알만큼 많다고 한다. 일체 중생 모두가 본래부처였기에 본래 중생 또한 하나도 없고 모두가 부처였기에 필경에는 부처 뿐이라 한다. 이를 알려고 하거든 우주 만유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을 오로지 곧바로 안으로 들여다 보아라. 우주만유는 오로지 마음 하나 깨치는데 모든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불교를 믿으면서 부처를 모르면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고 배부른 줄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지허스님.
지허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