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범패 계보연구 - 봉원사를 중심으로

서정매(부산대 한국음악학과 강사)

 

서정매 교수

Ⅰ. 서론

한국의 불교의식음악인 범패(梵唄)는 통일신라시대 진감선사에 의해 하동 쌍계사에서 많은 스님들이 전수를 받아 전국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지역에 따라 그 지방성이 곁들어진 또 다른 새로운 범패문화가 생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에는 크게는 윗녘소리인 경제와 아랫녘소리인 영제로 나뉘며 이외 호남제와 충청도제(또는 중제), 제주제 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2)3)

경제범패의 대표 사찰로는 1950년대를 전후로 개운사, 봉원사, 백련사 등이 대표되는데, 1968년부터 현재까지는 봉원사 출신의 범패승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1968~1969년에 봉원사에서 범패강습회를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즉 봉원사는 한국의 불교의례의식을 전승ㆍ보존ㆍ교육하는 대표사찰로, 1973년 11월 5일에 봉원사 출신의 범패승인 송암(1915~2000), 운공(1907~1984)4), 벽응(1909~2000)5)이 국가무형문화재6) 제50호 '범패'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봉원사는 본격적으로 한국불교의례의식을 전승ㆍ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1987년 11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범패>는 <영산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동시에 단체종목으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이후 장엄부분에 지광(~1996)7), 작법부분에 일응(1920~2003)8)이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불교의식의 전승은 음악적 요소인 범패, 미술적 요소인 장엄, 무용적 요소인 작법 등으로 세분화되어지면서 분야별 전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단체종목으로 새롭게 거듭난 <영산재>는 한국의 불교의식을 대표하는 의례의 하나이지만, <영산재>가 문학ㆍ무용ㆍ철학ㆍ연극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형식을 띠고 있고, 종교의식을 넘어서서 공연문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2009년 9월 30일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9)에 등재되었다.

<범패>에서 <영산재>로 변경된 이후 봉원사 범패승들은 1996년부터 불교의식을 공연문화의 형태로 발전시켰고, 전통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식의 콘텐츠화를 시도하면서 문화예술로서의 대중화작업을 시도하였다. 2006년부터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게 되면서 현재까지 세계 54개국의 초청공연이 이루었다.

특히 봉원사는 옥천범음대학의 모태인 1969년 옥천범음회를 설립하여 오늘날까지 이어 지고 있는 역사를 지닌다. 옥천범음대학은 종단을 초월하여 모든 승려들이 한국 전통불교의 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목적으로 3년 과정으로 이루어져있는데, 2007년 9월부터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정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ㆍ실시하여 학승 뿐 아니라 일반인까지도 수강이 가능한, 한국불교의식의 대표적인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봉원사 출신의 경제범패승들의 계보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즉 봉원사 범패승의 계보와 함께 봉원사계보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볼 것인데, 이는 봉원사 출신의 범패승들이 단순히 서울ㆍ경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역별 불교의식 무형문화재의 보유자가 봉원사에서 교육받은 범패승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제범패가 전국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먼저 한국의 불교의식음악을 대표하는 범패승을 대거 배출한 봉원사의 역사와 그 연혁을 살펴보겠다. 두 번째로는 봉원사에서 이루어진 불교의례의 전승과 불교의식 교육의 역사 및 전승현황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전후, 그리고 1970년부터 현재까지 봉원사의 범패계보를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봉원사 범패의 영향을 받은 시도무형문화재의 분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를 통해 지역별 무형문화재가 봉원사 범패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로 이루어져있는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봉원사가 한국 불교의식음악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바를 점검해보고자 한다.

 

Ⅱ. 봉원사의 연혁과 역사

1. 봉원사의 역사10)

봉원사(奉元寺)는 통일신라 제51대인 진성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연희궁 즉 현재의 연세대학교 터에 창건11)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12)가 크게 중창하였다.13)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으로 하여금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고, 태조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14)을 봉안하였다.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 25년(1592)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각이 소진(燒盡)되었고, 제17대 효중 2년(1651)에 지인(智仁) 대사가 중창15)하였으나 동ㆍ서 요사채가 소실되어, 극령(克齡)ㆍ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다시 중건16)되었다. 이후 제21대 영조 24년(1748)에 찬즙(贊汁)ㆍ증암(增岩)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로 이전되었는데, 이때 영조가 친필로 봉원사(奉元事) 현판을 현액하였다. 이때부터 신도들 사이에서는 새로 지은 절이라 하 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해 봉원사에 팔도승풍규 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고, 제25대 철종 6년(1856)에는 은봉(銀峯)ㆍ퇴암(退庵) 화상 등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 제26대 고종 21년(1884)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때는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1881년 행방불명되기까지 봉원사에 5년간 주석하였고, 산내 암자인 용암사에도 주석하였다고 전한다.17) 즉 봉원사와 용암사는 1884년 갑신정변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갑신정변의 요람지였다. 이후 1894년(고종 31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이내 소실되었다. 1899년에는 인천 감옥에서 탈옥한 백범 김구가 공주 마곡사를 떠나 서울 서문 밖인 새절(지금의 봉원사)에 머물면서 후일을 도모하였고, 봉원사에서 인연이 닿은 사형 혜정(慧定)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을 해후했다.

1908년 8월 31일에는 지금의 학극학회인 국어연구학회가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 하기도 하였다. 1911년에는 주지 보담(寶潭)이 봉원사를 중수18)하였고, 사지(寺地)를 확보하여 가람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48년에는 백범 김구가 봉원사를 다시 방문하였다. 1950년 9월 28일에는 9.28 서울수복19) 당시, 총탄과 폭탄으로 인해 광복기념관이 소실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과 이동인 스님 및 개화파 인물의 유물까지 화마(火魔)로 소실되었다.

1966년에는 주지 영월(映月)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大院君)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20)을 헐어 옮긴 것이다.

1991년에는 주지 김성월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 도중에 대웅전21)이 소진되었으나,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지 혜경(慧鏡)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ㆍ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건립22)하였다.

2009년 9월 30일에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세계유네스코 정부간위원회 4차회의에서 봉원사 범패승들로 구성된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1년에는 봉원사가 전통사찰로 등록되었고, 2014년 7월 3일에 <범종>(1760)23)과 <아미타괘불도>(1901)24)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3호와 제364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2017년 9월 18일에는 봉원사로의 용암사에서 현왕도(現王圖)25)와 감로왕도(甘露王圖)26)가 각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8호,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인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대중 50여 스님, 신도 10만이 넘는다. 또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단청> 보유자인 이만봉 스님,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를 전승하고 있는 영산재보존회에서는 봉원사에서 각각 단청과 범패로 후학을 지도ㆍ양성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 불교교양대학, 영산불교문화원이 있고, 신행 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인경회, 거사림 등이 있다. 이외 대외적으로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 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는 등 태고종 총본산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봉원사의 역사와 연혁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2. 봉원사의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

 

한국불교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에는 유형문화재 세 점과 무형문화재 두 종목이 있다.

이외에도 봉원사 범패어장이었던 故 송암의 부친 운허가 주석했던, 봉원사 인근에 위치한 용암사에서 최근 유형문화재 2점이 지정고시 되었다. 용암사는 봉원사에 적을 둔 운허가 1925년부터 주지로 주석하던 사찰로, 봉원사와 무관하다고는 보기 힘들다.27) 따라서 이를 포함하여 봉원사와 용암사의 유형문화재를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봉원사의 무형문화재로는 단체종목인 <영산재>가 대표되며, 이외 개인종목인 <단청장> 제1대 보유자인 만봉을 들 수 있다.28) 특히 <영산재>는 개인종목29)에서 단체종목으로 변천되면서 더 크게 성장하였고, 이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한국을 넘어서서 세계 속에서도 주목받는 무형문화재이다. <영산재> 변천과 흐름, 그리고 <단청장>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Ⅲ. 봉원사의 불교의례의식의 전승과 교육 현황

 

1. 영산재보존회와 옥천범음대학

봉원사의 불교의례의식 단체로는 크게 ‘영산재보존회’와 ‘옥천범음대학’을 들 수 있다.32) 둘 다 불교의례의식을 전승하고 교육하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전승적인 면에서는 ‘영산재보존회’를 들 수 있겠고 교육적인 부분으로는 ‘옥천범음대학’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할 수는 없다.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산재>는 국가무형문화재이고 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보유자 김구해를 위시하여 전수교육조교 4인인 이경암, 마일운, 이기봉, 한동희를 중심으로 하며, 그 아래로 이수자 64명, 전수생 70명, 회원 179명 등 총 313명으로 이루어져 전통불교 의식을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33) 그리고 영산재는 국가무형문화재이므로 주기적으로 정기교육34) 및 연1회 해외교육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1988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6월 6일(현충일)에 <영산재>를 시연하는 등35) 전승과 보존에 주력을 다하고 있다.

<옥천범음대학>은 한국 불교전통의식의 이론과 실기를 가르치는 교육단체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영산재>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보존회의 부설대학이다. 따라서 그 역사는 범음범패의 중흥조인 이산 월하의 뜻을 이어, 남벽해ㆍ김운파ㆍ조일파ㆍ김화담ㆍ안덕암ㆍ김운공ㆍ장벽응ㆍ박송암 등의 여러 어산스님들이 불교의식의 전승을 위해 노력했던 1969년의 옥천범음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당시 하안거를 기해 매년 범음범패를 가르친 것이 현재의 옥천범음대학으로 성장한 것이다. 특히 현재 옥천범음대학의 교수진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의 기능보유자인 김구해와 전수 교육조교인 이경암, 마일운, 이기봉, 한동희, 그리고 이수자들로 구성되는데, 이외에도 학계의 저명한 교수진들도 포함된다. 즉 옥천범음대학은 영산재보존회와는 분리할 수 없는 매우 긴밀한 관계인 것이다.

특히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이기도 하지만, 종파의 구분 없이 <영산재>의 이론과 실기를 교육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또 2007년 9월부터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정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하게 되어 학문적인 터전까지 굳건히 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산재보존회 회원과는 별도로, 옥천범음대학은 전국에서 찾아와 교육받는 승려의 수가 해마다 누적되고 있으므로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만큼 옥천범음대학은 이제 한국불교의례의식의 전승과 보전을 위한 대표 교육장으로 우뚝 서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각 지역의 많은 승려들이 옥천범음대학에서 경제범패를 교육받은 뒤, 거주 지역 또는 출신 지역에서 불교의식을 전승하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 봉원사 범패승의 분포가 전국으로 점점 확대되는 추세라는 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옥천범음대학에서 교육받은 범패승들이 단순히 지역의 범패승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도문화재의 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승활동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Ⅳ항에서 살펴볼 것이다. 본 항에서는 1950년을 전후로 활동한 경제범패의 계보와 함께, 1968년 봉원사에 개설된 범패강습회이던 옥천범음회를 발주한 범패승들, 그리고 이후 옥천범음대학의 이수자들 등을 표로 만들어 1950년부터 현재까지 봉원사의 범패승 계보를 시대별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2. 경제범패승의 시대별 계보

현재 경제범패승의 계보는 근현대의 계보조사로 한만영(1935~2007)36)이 작성한 계보와 홍윤식 조사 계보37), 법현이 조사한 계보, 그리고 현재 봉원사 영산재보존회에서 소개하는 계보가 있다. 이외에도 1929년 일본인 다카하시가 쓴 『4이조불교』에 일제강점기에 활동 하던 당시 서울중심의 범패승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아래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근년까지 경성 교외의 백련사에 만월이란 노승이 있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쪽산과 서쪽산에 각각 만월이 있어 선성이 서로 백중하였다38)

즉 ‘만월’이라는 범패승이 두 명이 있었는데, 각각 동쪽과 서쪽에 주석하고 있었으므로 양(兩) 만월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한만영 역시, 그의 저서 『K한국불교음악연구 』1980)39)에서 동교와 서교에 각각 범패승 이만월(李滿月)이 있고, 그들의 제자가 동교와 서교로 구분 되어 전승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본 항에서는 먼저 홍윤식, 한만영, 법현, 봉원사영산재보존회의 순으로 살펴보고 비교해 볼 것이다. 다만 홍윤식, 법현, 영산재보존회는 각 표로 정리되어 있지만, 한만영의 경우에는 서술식으로 설명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토대로 하여 동교와 서교의 계보를 구체적으로 정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 연구에서도 한만영의 계보를 표로 정리한 바가 있지만, 내용에서 빠진 부분이 발견되므로 이를 보충하고 보완하여 새롭게 표로 제시하고자 한다.

 

1) 홍윤식 조사 계보

홍윤식은 1965년~1966년동안 전국을 돌며 범패자료를 조사하면서 계보를 작성하였다.

그는 범패승 계보를 크게 경산조와 영남조로 구분하였고, 경산조는 다시 서울중심소리, 전라도, 충청도 소리로 구분하고 있다. 그가 조사한 서울중심소리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표 4> 홍윤식 조사 계보

 

홍윤식의 조사는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진다. 동부에는 김월해로부터 시작하여 청송, 김현하, 전우운으로 이어진다. 전우운 아래로는 권수근, 손무각, 박수원, 도선익, 류태화, 이일운 등 총 6명의 제자로 이어져서 당시 전우운은 이름난 대어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부에는 봉원사에서 주석했던 이만월로부터 시작하여 범호와 월하로 이어진다. 범호는 안덕암, 유창렬, 김운공 등 크게 3명의 제자를 두었고, 월하는 남벽해→박송암→한동희40), 강동진으로 이어진다. 다만 자료에 등장하는 범패승들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근거가 분명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다.41)

 

1) 한만영 조사 계보

 

위의 표는 한만영의 내용의 그대로 정리하되, 내용을 좀 더 추가 보완한 것이다. 한만영 조사에서는 동교의 서만월의 제자는 총 5명으로 대원, 벽봉, 금운, 완담, 동화이며, 이중 대원으로부터 운월, 벽봉으로부터 황성기, 운공, 덕암으로 이어지며, 금운으로부터 재은으로 이어진다.

서교는 만월로부터 이월하, 김운제, 이범호 총 3명으로 이어지며, 이중 김운제를 제외하고 월하는 운파, 벽해, 송암, 덕산, 일파, 화담, 영월 등 7명의 범패승을 배출하였고, 이범호는 유창열, 김추성, 벽응, 운공, 만허 등 5명의 범패승을 배출하였다. 한만영의 조사 계보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70년을 전후로 활동한 범패승의 계보이며, 범패승들의 구체적인 사항까지 조사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3) 법현 조사 계보

봉원사 계보는 법현에 의해 좀 더 확립되어졌는데, 42) 이를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표는 법현의 『불교의식음악연구』2012)의 계보를 옮긴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법현 조사에서는 동교에서의 만월의 제자는 대원, 벽봉, 완담, 표금운, 한재은 총 5명으로 한만영과 동일하다 다만, 이중 벽봉의 제자로는 박운월, 황성기, 김운공, 안덕암 종 4명 이며, 이중 김운공은 1973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영산재 전수교육조교인 마일운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법현의 동교 계보는 한만영과 조금 차이가 있다. 즉 동교 서만월의 제자가 5명인 것은 동일하지만, 한만영의 조사에서는 박운월이 대원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하였으나, 법현 조사에서는 벽봉으로부터 이어진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43)

그런데 채혜련의 『영산재와 범패』2011)와 이일호(병천)의 연구(2011)에서는 한만영의 것과 동일하게 박운월은 대원으로부터 이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44) 즉 법현의 조사에서는『한국의 불교음악』(2005). 『불교의식음악연구』(2011) 등에서 확인되듯이 한만영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동교계보는 한만영ㆍ채혜련ㆍ이일호는 법현과 서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현재 봉원사 홈페이지에 소개된 영산재보존회의 동교 계보에서도 운월은 대원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으로 되어있어서 법현과 동일하다.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법현의 서교는 크게 이월하와 이범호 2명으로 나뉜다. 이는 한만영의 조사와는 달리 김운제를 제외시켰다. 그 이유로는 진관사 출신의 김운제가 봉원사 범패승을 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만영의 조사에서 나오지 않았던 이월하의 스승이 동명, 대원이라는 점을 밝혀내었다. 동명, 대원으로부터 범패를 배운 이월하는 봉원사에 주석하면서 남벽해, 박송암, 김운파, 김화담, 이만봉, 조일파, 최영월 조덕산, 김혜경ㆍ김학성, 득성, 박원명, 영선, 이벽암, 기월, 금해, 용해, 경해, 만성 등 19명의 제자를 두었다. 그리고 서울 백련사 출신인 이범호는 김운공, 유창렬, 김추성, 장벽응, 인덕암, 만허, 김운제, 윤동하, 도선억, 도봉 등 11명의 제자를 두었다. 김운파의 아래로 현재 영산재를 이끌어있는 김구해, 최성담, 최구연, 마일운으로 이어진다. 김구해와 마일운, 최원허는 서교 이범호의 제자였던 벽응으로부터도 범패를 전수받았다.

결국 서교의 만월은 이월하와 이범호를 배출하였고, 이월하와 이범호는 당대 최고의 범패어장으로 활동하면서 봉원사 범패승을 대거 배출하였다. 동교의 만월 역시 벽공으로 이어졌고, 벽공은 김운공을 배출하였다. 이후 1973년 영산재 보유자로 동교의 김운공, 서교의 박송암, 장벽응이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로보아 과거에는 동쪽 만월과 서쪽 만월, 즉 동교와 서교가 나누어져 각각 전승이 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물론 서교의 범패승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봉원사 범패승은 동교와 서교가 어우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현재 영산재보존회 회원 수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즉 2006년 1월에는 이수자 26명, 전수생 44명, 준회원 71명으로 총 145명이었고, 2011년45)에는 이수자 50명, 전수생 38명, 준회원 136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와 같이 2012년에는 이수자가 55명, 전수생은 49명으로 1년 사이에도 점차적으로 증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4) 봉원사 영산재보존회 계보(2017)

현재 영산재보존회는 홈페이지로 관리되고 있어서, 회원 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46) 아래 표는 봉원사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의 최근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산재보존회에서는 동교 계보는 만월로부터 시작하여 대원, 벽봉, 표금운 총 3명으로 압축되었다. 이는 한만영과 법현이 대원, 벽봉, 금운, 완담, 동화 총 5명이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완담, 동화가 봉원사 범패승을 배출하지 않았으므로 봉원사 계보에서는 제외한 것으로 짐작된다. 벽봉으로부터는 운월, 운공, 덕암, 한재은으로 이어지는데, 운공은

현재의 전수교육조교인 마일운을 배출하였다. 결국 영산재보존회 계보는 법현의 조사에서처럼, 기존의 경제범패 계보를 봉원사 범패승의 계보로 구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표에서 확인되듯이, 영산재보존회 계보에서의 서교는 이월하와 이범호로 귀결된다.

이월하 아래로 벽해, 운파, 송암, 덕산, 화담, 일응, 지광 총 7명으로 이어지며, 이범호 아래로는 운공, 벽응, 덕암 총 3명으로 이어진다. 즉 서교 계보는 법현의 계보 조사와 마찬가지로, 봉원사 범패승을 배출하지 못한 진관사의 김운제는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존의 범패승 중 일파, 영월이 제외되고, 일응, 지광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일응47)과 지광48)은 영산재 제2대 기능보유자로, 각각 해남과 전주로 호남 출신이지만 송암과 함께 활동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한 범패어장이다.

결국 현재 봉원사 범패승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동교의 만월로부터 시작하여 대원, 벽봉, 표금운의 총 3명, 그리고 벽봉으로부터는 운월, 운공, 덕암, 한재은 총 4명으로 이어지는데, 운공은 현재의 전수교육조교인 마일운을 배출하였다. 물론, 마일운은 서교의 운파, 송암으로부터도 전수받았다. 그런데 법현의 계보에서는 김운파의 아래로 김구해, 최성담, 최구연, 마일운으로 이어지던 것이, 영산재보존회에서는 김구해와 마일운으로 축소되었다. 또 법현의 계보에서는 김구해와 마일운, 최원허는 서교 이범호의 제자였던 벽응으로부터 이어지지만, 영산재보존회의 계보에서는 현재의 기능보유자인 김구해는 운파와 송암49)으로만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즉 벽응으로부터의 계보를 제외한 것인데, 이는 벽응으로부터는 범패보다는 호적을 주로 배웠으므로 의도적으로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영산재보존회 회원의 현황은 홈페이지에 제시된 바와 같이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다만 2017년 현재의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에서는 이수자 64명, 전수생 70명, 회원 179명 총 313명으로 되어있으나, 실제 계보 표에는 이수자 33명, 전수생 53명으로의 표기된 회원 수와 매우 차이가 난다. 이수자와 전수생은 감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영산재는 국가무형문화재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속하는 중요한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예술문화이다. 적어도 반년, 또는 매년의 주기로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의 주기적인 업데이트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Ⅳ. 봉원사에서 파생된 지역별 무형문화재

 

경제범패의 어장(魚丈)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범패승 박송암((松岩, 1915~2000)은 장벽응, 김운공, 이일응, 정지광과 함께 1968년에 봉원사에서 옥천범음회를 개설하여 범패를 가르쳤고, 이후 옥천범음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범패수업을 하게 되면서 많은 소리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송암은 1960년대를 전후로 서울 곳곳의 사찰 일대에서 범패강습, 주로 고급반인 상주권공, 각배, 영산, 짓소리 등을 지도하였면서50) 많은 범패승을 배출하였다. 특히 송암은 제자들의 녹음기를 통해 녹음된 그의 음원51)이 모두 음반화되어52) 세상에 공개되어 졌으므로 그의 영향은 앞으로도 더욱 지대(至大)할 것이라고 본다.

현사실 봉원사범패승은 경제범패승을 통틀어 대표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으며, 대부분 송암스님의 소리를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소리를 이어받은 봉원사 범패승들은 단순히 서울ㆍ경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있으며, 특히 각 지역의 불교의식 무형문화재의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이유는 옥천범음대학이 종파를 막론하고, (지금은 일반일들까지도) 수강이 가능하였으므로, 이러한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본 항에서는 봉원사에서 범패를 배운 후 지역에서 활동하는 범패승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의 시도 불교무형문화재 중에서는 보유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봉원사에서 범패를 배운 범패승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지역 무형문화재를 중심으로 봉원사범패승의 분포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한국의 불교의식 무형문화재를 지정일자별로 정리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 확인되듯이, 총 14종목 중 부산 2종목, 마산지역 2종목, 완제 1종목을 제외한 나머지 9개 종목은 모두 경제범패이거나 경제범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는 비율로 보았을 때 자그마치 64%에 달하는 과반수를 넘어선 높은 수치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정 해제된 <범음범패>54)를 제외하면, 경제범패의 비율은 13종목 중 9종목에 해당되므로 69%에 달한다.

영남지역 즉 경상도지역인 영제는 경제범패 즉 봉원사 범패의 영향이 매우 낮다고 할 수 있으며55) 전북지역 즉 전라도지역인 완제도 경제범패 즉 봉원사 범패의 영향력이 낮은 편이다. 반면 서울ㆍ경기ㆍ인천,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등의 무형문화재는 대부분 봉원사에서 범패를 배워온 범패승들이 추축을 이룬다. 특히, 문화재 종목을 이끌고 있는 범패어장일 경우에는 그 아래 범패승은 모두 어장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므로, 그 파급력은 더욱 크다.

그런데 아래 종목 모두 범패어장은 모두 봉원사 영산재의 이수자이거나, 심지어 전수조교이기도 하며, 봉원사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찰의 재 의식까지 어장으로 도맡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으로 봉원사를 중심으로 한 경제범패의 계보를 살펴보았다.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이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를 전승하고 있는 사찰일 뿐 아니라, 1969년에 설립된 옥천범음대학에 학점은행제를 도입ㆍ실시하여 한국불교의식의 대표적인 교육전문기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 2006년에는 <영산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영산재를 보존하고 전승하고 교육하고 있는 봉원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이에 따른 사회적 책임도 막중하게 되었다.

불교의식교육의 전문기관으로 봉원사가 선두에 서게 되면서 봉원사의 영향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범패승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고, 영산재보존회 회원 수도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봉원사에서 범패를 배운 지역의 범패승들이 지역의 불교의식 무형문화재의 어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의 불교 관련 무형문화재는 총 14종목이며, 지정 해제된 <범음범패>60)를 제외하면, 13종목인데, 이중 경제범패의 비율은 13종목 중 9종목에 해당되므로 69%의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경제범패를 전승함과 동시에 옥천범음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봉원사 범패승, 즉 영산재 보유자를 비롯한 이수자와 전수자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범패의 올바른 전승과 보존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Ⅴ. 결론

 

이상으로 봉원사를 중심으로 한 경제범패의 계보를 고찰하였다.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이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를 전승하고 있는 사찰일 뿐 아니라, 학점은행제와 연계한 옥천범음대학을 과거 1969년에 설립된 옥천범음대학에 학점은행제를 도입ㆍ실시하여 한국불교의식의 대표적인 교육전문기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 2006년에는 <영산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영산재를 보존하고 전승하고 교육하고 있는 봉원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이에 따른 사회적 책임도 막중하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봉원사에서 배출된 범패승의 계보를 시대별로 정리하였고, 아울러 지열별 무형문화재가 봉원사범패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로 이루어져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원사의 역사는 통일신라(889)의 도선국사에 의해 현재의 연희궁 터에 창건되었고, 고려 말에는 태고 보우가 크게 중창하였으며,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가 태고 보우의 문도임을 자처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또 영조 24년(1748)에는 지금의 터로 이전되었을 때 영조가 친필로 봉원사 현판을 현액할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러한 봉원사가 2011년에 전통사찰로 등록된 것은 실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둘째, 봉원사는 전통사찰로 지정된만큼 유형문화재 2점과 무형문화재 2종목이 보유되어 있다. <범종>(1760)과 <아미타괘불도>(1901)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3호와 제364호로 각각 지정되었고 이외 봉원사 범패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봉원사와 인접한 용암사에서는 최근 현왕도(1878)와 감로왕도(1925)가 각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8호,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는 (지금은 작고하였지만) 1972년에 단청장 제1대 보유자로 지정받은 6세에 봉원사로 동진출가하여 96세까지 봉원사에서 주석한 만봉(1910~2006)이 있고, 1973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영산재가 있다.

셋째, 봉원사의 불교의례의식 단체로는 크게 ‘영산재보존회’와 ‘옥천범음대학’을 들 수 있다. 둘 다 불교의례의식을 전승하고 교육하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영산재보존회가 전승적인 측면이라면, 교육적인 측면으로는 ‘옥천범음대학’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옥천범음대학은 교수진이 <영산재>의 기능보유자, 전수교육조교, 이수자들로 이루어져있으므로, 영산재보존회와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매우 긴밀한 관계이다. 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영산재보존회와 옥천범음대학은 서로 상생을 이루는 관계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옥천범음대학은 종파의 구분 없이 <영산재>의 이론과 실기를 교육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또 2007년 9월부터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정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하여 학문적인 터전까지 굳건히 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산재보존회 회원과는 별도로, 옥천범음대학은 전국에서 찾아와 교육받는 승려의 수가 해마다 누적되고 있어서 회원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는 옥천범음대학이 한국불교의식의 대표적인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다섯째, 현재 경제범패승의 계보는 홍윤식, 한만영, 법현 조사 계보가 있고, 봉원사의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계보까지 총 4가지로 귀결된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까지의 범패승을 조사하였는데, 공통적으로 동교와 서교로 나누어지지만 세부적으로는 각각 차이를 보인다. 홍윤식은 자료에 등장하는 범패승들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으며, 한만영은 범패승들의 구체적인 사항, 특히 어장으로서의 시력 및 자격여부까지 조사하였다는 점이다. 법현은 일제감점기~1970년대, 1970년

대~2012년 최근까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었고, 동국대 자료 및 보유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범패승들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까지 조사하였다는 점에서 각기 차이를 보인다.

여섯째, 한만영과 법현의 조사에서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 발견된다. 법현 조사에서는 동교는 대원ㆍ벽봉ㆍ완담ㆍ표금운ㆍ한재은 총 5명으로 한만영과 동일하지만, 이중 벽봉의 제자로는 박운월ㆍ황성기ㆍ김운공ㆍ안덕암 종 4명을 들고 있다. 그런데 한만영의 조사에서는 박운월이 대원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하였고, 채혜련과 이일호(병천)의 연구(2011)에서는 한만영의 계보을 따르고 있다. 반면, 법현은 박운월이 벽봉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하였고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에서는 법현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박운월의 계보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일곱째, 한만영과 법현의 조사는 동교와 서교가 거의 일치하지만, 세부적으로 몇몇 차이나는 부분이 발견된다. 법현의 서교는 크게 이월하와 이범호 2명으로 나뉘는데, 이는 한만영의 조사에서 나온 김운제를 제외시킨 것이다. 이는 진관사 출신의 김운제가 봉원사 범패승을 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법현은 한만영의 조사에서 나오지 않았던 이월하의 스승이 동명, 대원이라는 점을 밝혀내었다. 법현의 조사에 의하면 서교의 만월은 이월하와 이범호를 배출하였고, 이월하와 이범호는 당대 최고의 범패어장으로 활동하면서 봉원사 범패승을 대거 배출하였다. 동교의 만월 역시 벽공으로 이어졌고, 벽공은 김운공을 배출하였다. 이후 1973년 영산재 보유자로 동교의 김운공, 서교의 박송암, 장벽응이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로보아 과거에는 동쪽 만월과 서쪽 만월, 즉 동교와 서교가 나누어져 각각 전승이 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물론 서교의 범패승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봉원사 범패승은 동교와 서교가 어우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여덟째, 영산재보존회 계보에서 서교는 이월하와 이범호로 귀결되는데, 서교 계보는 법현의 계보 조사와 마찬가지로 봉원사 범패승을 배출하지 못한 진관사의 김운제는 제외시켰고, 기존의 범패승 중 일파, 영월이 제외되고, 일응ㆍ지광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일응과 지광은 영산재 제2대 기능보유자로, 각각 해남과 전주로 호남 출신이지만 송암과 함께 활동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한 범패어장이다.

그런데 법현의 계보에서 김운파로부터 김구해, 최성담, 최구연, 마일운으로 이어지던 것이, 영산재보존회에서는 김구해와 마일운 2명으로 축소되었다. 또 법현의 계보에서는 김구해와 마일운, 최원허는 서교 이범호의 제자인 벽응으로부터 이어지지만, 영산재보존회의 계보에서는 김구해가 운파와 송암으로만 계보가 이어진다. 이는 김구해가 벽응으로부터는 범패보다는 호적을 주로 배웠으므로 보존회에서 의도적으로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아홉째, 영산재보존회 회원의 현황은 홈페이지에 제시된 바와 같이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즉 2017년 현재의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에는 이수자 64명, 전수생 70명, 회원 179명 총 313명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실제 명단에는 이수자 33명, 전수생 53명으로, 명단에서 매우 차이가 난다. 영산재가 국가무형문화재이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만큼 누구나 들어와서 정확한 확인을 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의 주기적인 업데이트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불교의식 관련 무형문화재는 14종목이며, 9개 종목이 경제범패이거나 경제범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는 비율로 보았을 때 자그마치 64%에 달하는 과반수를 넘어선 매우 높은 수치이며, 지금은 지정 해제된 <범음범패>를 제외하면, 경제범패의 비율은 69%에 달한다. 영제와 완제는 비교적 경제 봉원사범패의 영향력이 낮은 편이지만, 서울 ㆍ경기ㆍ인천,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등의 무형문화재가 모두 경제범패승이거나, 영산재보존회의 이수자 또는 전수자에 속한다. 즉 지역을 달라도 범패는 경제 봉원사의 소리로 의식이 설행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장단점을 가리기가 어렵다. 의식이 우선이고, 범패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지역별 범패는 경제 봉원사의 것을 모태로 하고 있지만, 각 지역의 환경, 즉 범패승의 음정, 음색, 시김새, 호흡, 연령대에 따라서 소리는 조금씩 변화될 수 있고 그 변화된 소리로 전승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베이스는 봉원사 범패를 기반으로 하므로, 봉원사의 영산재가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한, 그리고 옥천범음대학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은 봉원사는 한국범패의 전승과 보존을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리라 본다.

 

참고문헌

 

<논문 및 저서>

법 현, 『영산재연구』 운주사, 2001.

『불교의식음악연구』 운주사, 2012.

(사)일응어산작법보존회, 『어장 일응, 그 삶의 여정 영산에 꽃피다』 정우서적, 2013.

서정매, “부산지역 범패승 계보 연구”, 『한국음악연구』제51집, 2012.

『영제범패의 전승과 변화양상』 민속원, 2017.

“영남지역에 전승되는 생전예수재 연구” 『동아시아불교문화』제 30집, 2017.

이일호(병천), “범패승의 계보와 전승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서울: 효형출판, 2001.

한만영, 『韓國佛敎音樂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0.

홍윤식, 「범패자료조사기」 『문화재』제2호, 국립문화재연구소, 1966.

 

<신문>

<불교신문> 2007. 2. 18.

 

<사이트>

한국콘텐츠진흥원 용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영산재보존회 홈페이지 (http://www.yeongsanjae.or.kr/).

블로그 <융의 분석심리학적 미술치료>

블로그 <마음의 한자락을 붙잡고>

 

<인터뷰>

영산재보존회 이수자, 현 대성사 주지 법안스님과의 인터뷰. 2017년 9월 24일.

영산재보존회 이수자, 현 용왕사 주지 법현스님과의 인터뷰. 2017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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