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사와 현대포교 – 대륜화상을 중심으로”를 읽고

차차석(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논평자(차차석 교수)
논평자(차차석 교수)
 

-1.

이 논문은 법륜사의 창건 배경과 대륜스님의 행화, 현대포교에 대한 열정 등을 중심으로 분석한 논문이다. 특히 기존에 발표된 논문이나 문집 등을 참고하면서도 아직 활용되지 않은 자료를 통해 기존 발표된 연구보고서의 문제점과 한계 등을 교정하고자 한다.

근현대 한국불교학은 주로 종파사나 문헌학적 분석, 교리와 사상, 역사적 전개 등에 연구역량이 집중되었다. 역사나 사상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연구역량이 집중되다 보니 조선시대나 근현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응용불교학에 대한 관심도 최근의 일이다. 과학의 발전은 과거 경험하거나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해 종교적 판단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해방 이후 한국불교사의 전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대륜스님의 행화와 대륜사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교단사적 의의를 찾고자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은 목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본론에서 ‘대륜화상의 행화, 법륜사와 현대포교, 현대포교에서 대륜화상의 위상’로 구도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논평자 개인의 취향일 수도 있지만, 논평자는 근현대불교의 전개 내지 현황을 분석하고, 그러한 분석자료를 토대로 현대사회에 맞는 포교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한국불교계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불교세미나를 할 수 있으며, 현금 한국불교계의 학술적 활동 영역은 과거에 비해 매우 폭 넓은 주제를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제들, 즉 학자 개인의 취향이든 종단의 요청이든 현대사회의 흐름과 현 한국불교계의 상황(그것도 각 종단 마다 다르겠지만)을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필요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새로운 불교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토대사업에 해당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과거가 없는 현재도,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과거를 살펴 오늘을 통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더 없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과거에 지나치게 매몰된다면 발전적인 내일을 준비할 수 없다. 논평자는 그런 점에서 한국불교학계의 한계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과거는 존재하지만 발전적이고 창의적인 내일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이러한 세미나가 작은 일로 평가받아,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건강한 내일을 여는 단초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2.

이 논문을 읽으면서 논평자가 놀란 일은, 대륜스님에 대해 이미 여러 선구논문이 발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전문 연구자들이 아니다 보니 다양한 자료를 세밀하게 검토분석하지 않아서 교정되어야 할 사항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런 점은 이번 세미나를 기회로 종단이나 문도회에서 바로잡길 기대한다. 특히 각주 1)에서 밝히고 있듯이 법명이나 법호와 관련되어 혼용되고 있는 것들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발표자의 지적처럼 율맥과 관계된 사항은 향후 연구되어야할 숙제라 본다.

 

또한 각주 8) 인용문의 서두에서 스님의 행장을 소개하면서 ‘태고종의 개조’라는 표현이나 발표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밑줄 친 부분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발표자의 논문을 참고하되, 문도회나 종단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각주 27)의 인용문은 윤영해 선생의 발표논문을 참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대행스님은 근대의 대표적 선승인 한암스님과 탄허스님과의 道伴으로서 그 법력에 대한 신도들의 믿음이 깊다”는 구절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의 도반이 아니라 상좌이다. 대행스님은 탄허스님의 제자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한암스님의 제자는 아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있었다. 특히 대행스님과 한암스님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지만, 활동한 연대도 맞지 않는다. 이 부분은 조심스럽고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분명한 것은 잘못된 정보라는 점이다. 차후 수정을 요하는 부분이다.

각주 26)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지만 지광스님은 서울대를 입학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져 있다. 최근 어떤 스님이 s대를 졸업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도 후일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불이성 법륜사는 1920년대 후반기에 유점사 경성포교원으로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과 속의 소통이며,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다. 사람을 키우는 인재불사나 도시 안에 포교당을 건립하는 일이 수행이요,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先人들의 이상과 같은 의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세속적 욕망과 갈등이 불이성 법륜사에 투영되어 있다. 짙게 드리운 이러한 암영을 대륜스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 시점에서 한국불교태고종의 지향점이 무엇인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많지 않은 자료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자 한 점에 대해서는 논평자도 역시 찬사를 보내고자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해방 이후 전개되는 한국불교계의 혼란기에 활동한 스님의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감안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해방정국, 6,25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함께 진행되는 이농현상 등 급변하는 사회변동 속에서 스님이 한국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점은 이 시점에서 충분히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그다지 위대하게 보이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그 시점의 상황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분명하게 재평가 받아야 하는 점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되, 반성과 부족했던 점을 찾아 고치고 장점은 살려 계승해야 한다. 또한 현재는 내일을 설계하는 시점이란 점에서 사회변동과 흐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태고는 최신을 의미한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선두에서 시대를 선도한다는 의미도 있다. 대륜스님의 법신이 이러한 태고종의 정신을 찬란하게 꽃피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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