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민족정체성 고양시켜 사회 계몽과 참여에 중요한 역할 해
시대적 한계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 잃지 않으려고 다양하게 노력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후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기 위하여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법령을 제정하여 불교를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제에 협력하는 자가 생겨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의례가 변질 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생겨났다.
그러나 역경에 처한 한국불교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고 존재와 사회적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움직임이 근대 한국불교의 자강운동이다.
2월 22일 열린 2012학년도 동방대학원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근대 한국불교의 자강운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해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불교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불교정책에 맞서 전개된 불교의 자강운동과 그 운동이 오늘날 불교계에 미친 영향과 현대적인 의미를 살피고자 이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지해스님의 <근대 한국불교의 자강운동에 대한 연구> 논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주>

명진학교가 문을 열었던 동대문밖의 원흥사 전경, 현재는 창신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불교 100년>.


본 논문의 목적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불교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불교정책에 맞서 전개된 불교계의 자강운동과 그 운동이 오늘날 불교계에 미친 영향과 현재적인 의미를 살펴보는 데 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국가의 통치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되었다. 그로부터 500여 년 동안 불교계는 강력한 배불정책의 영향으로 종파의 축소는 물론 거의 말살지경에까지 이를 정도로 혹독한 억압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시작된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면서 민권의식이 크게 고조되었으며, 당시까지 억압받고 있던 계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지금까지 국가적인 통제와 사회적인 소외를 받았던 불교계도 다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적 관심 속에서 시작된 불교의 근대화는 불교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역량을 성숙시켰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강제된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저해하게 하였다.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한국불교를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법령을 제정하여 독자적 발전을 막았으며, 일본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한국불교의 변질을 도모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통제와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불교는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을 척결해야 했으며, 외부적으로 밀려드는 일본불교의 교세에 대응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불교인들은 국운이 위태롭자 외세를 배척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국가의 운명을 건설하고자 지향했으며, 불교계가 사회발전에 뒤처지지 않고 일제의 의도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현대사조를 수용하고, 서구의 문명을 수용하여 불교인들의 정신을 계몽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런 활동이 지속된다면 불교인의 지식과 실력이 증강되고, 나아가 한국불교가 자연스럽게 자강(自强)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자강운동의 연원을 살펴보면 근대화에 뒤져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은 일본과 중국의 정치적 운동에서 시작됐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무력에 의해 개국한 일본은 서구열강의 힘에 놀라 자강의 길을 도모하였다. 봉건체제를 해체하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민족국가를 설립하려고 추진하였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서양의 군수기술도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패하자 중국 내에서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이 캉유웨이에 의해 주장된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일어난 자강운동은 외부의 침략에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변화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한국불교 역시 근대에 이르러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개화기와 일제의 강점은 한국 사회와 함께 한국불교의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불교계는 일제의 지배에 의해 한국불교가 통제되고,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한국불교의 전통이 변질되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고유한 정신과 신앙적 자세만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다양한 노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추세에 따라 전개된 노력의 결과는 불교계의 위상을 정립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여기서는 자강운동(自强運動)이라 정의하고자 한다.
근대 한국불교 자강운동의 특징은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다. 그것은 불교계가 격변의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한 과오를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또한 타종교에 비해 사회적 역할이 부족한 점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훼손된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자강운동은 여러 방향에서 일어났다. 불교계는 그런 비판 이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제도와 함께 이념을 제시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포교방법들은 물론, 교육과 경제의 혁신 그리고 사회적 혁신 등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민족의식의 고취 및 애국계몽운동으로 확산시켜 일제 강점기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불교가 '미래 사회의 희망'이라고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 불교계 자강운동의 총체적 입장이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불교의 사회적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후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기 위하여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여러 법령을 제정하여 한국불교를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제에 협력하는 자가 생겨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의례가 변질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역경에 처한 한국불교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존재와 사회적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근대 한국불교계의 자강운동은 일제의 강점 이전 능동적인 자세로 주체적 활동을 펼친 것과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발전을 도모한 수동적 활동을 볼 수 있다. 일제의 강점 이후는 한국불교를 통제하여 식민지 정책에 활용하려는 일제에 맞선 불교인들의 노력과 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당시 불교계의 역량은 사회전반을 이끌어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중기이후 산중불교시대로 접어들면서 불조의 혜명(慧命)을 계승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교단의 힘이 쇠잔된 불교계의 현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895년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자 배불정책 속에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던 불교가 다시 도심 속으로 돌아와 포교하게 되자 결사(結社)를 통한 교단 개혁을 통해 불교계 자질향상을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그것이 경허스님에 의해서 주도된 정혜결사(定慧結社)이다. 교단적 자정 운동인 결사와 함께 개인적으로 한국불교의 변화를 주장하는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그것이 불교의 개혁에 관한 부분이다. 결사와는 달리 개혁사상의 대두는 불교계가 처한 시대적 위상과 함께 내재적 모순을 살펴봄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주장은 1912년 조선불교개혁론(朝鮮佛敎改革論)을 시작으로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그리고 1922년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으로 이어지면서 개항이후 축적된 시대인식으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지식인들은 문명은 날로 발전하여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시기이므로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민중의 무지나 사회의 빈곤 등의 문제의식을 지적하였다. 전근대적 사회체제에서 벗어나려면 사회계몽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불교인의 자각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교계의 염원이 담긴 일로서 해금 이후 진행되어온 불교계의 주체의식의 결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교계의 능동적 자강운동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불교의 발전을 도모한 정책이 있었다. 1908년 원흥사 창건과 1902년 사사 관리서 설치가 그것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의 자강운동은 일제가 제정한 통제 법령속에서 한국불교의 능력을 키워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1910년 8월29일 조선을 합방한 일제는 빠른 시간에 식민지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다. 즉 한국불교의 통제를 위해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제령(制令) 7호인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고 조선총독부령 제84호로 전문8조의 사찰령시행규칙령(寺刹令施行規則令)을 제정하여 그해 9월 1일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사찰 30본산과 그 말사를 등록케 하고 갖가지 규제로 1300여개에 이르는 한국사찰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불교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달은 불교 지도자들은 1906년 원흥사에 명진학교를 세웠다. 여기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한국불교의 모순을 척결하려는 개혁의지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이 불교를 근대화를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불교계의 교육적 열망은 해외유학으로 이어졌다. 개화기에 이동인(1849~1881)의 일본유학으로 시작된 유학생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였으며, 1910년대에 비해 1920년대에 유학생은 더욱 증가하였다. 불교인들은 사회가 변화되는 것에 맞춰 불교의 신행도 변화되기를 희망하였다. 침체된 신행수준을 높이고, 점점 조직화하여 지금 볼 수 없었던 사회활동을 통해 불교의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조직이 불교부인회, 여자청년회, 그리고 청소년조직 등이었다. 이러한 신행단체들은 우리사회에 불교의 역량이 강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계몽활동을 펼쳤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한국불교계는 좌절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극복하고 민족자존의 의식 고취와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한국불교계의 자강운동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민족정체성을 고양시킴으로써 사회계몽과 참여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런 움직임이 근대 한국불교의 자강운동(自强運動)의 의미를 갖는다 할 것이다.

   지해(智海)스님 약력
 - 1981년 해봉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81년 보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 2003년 혜초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 2008년 보덕사 비구니 강원 강사 역임.
- 2009년 법륜승가대학 강사 및 총무원 교무부장 역임.
- 2011년 혜초스님을 계사로 대승보살계 수지
- 2013년 2월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박사학위 취득.
- 현재 대구 기원정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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