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진경|지리산진경
그림·글 이호신
다빈치 刊, 값 120,000원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몇 달씩, 심지어는 몇 년씩 발로 뛰고 몸으로 체득하며 오랜 시간 공들여 우리나라의 자연과 사찰을 화폭에 담아온 진경산수 화법의 대가 이호신 화백이 20여 년의 세월 동안 지난한 작업에 매진한 결과를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하나는 이 땅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불교의 가르침이 집약된 사찰을 그린 <가람진경>이고, 다른 하나는 이 땅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역사와 문화, 삶의 터전이 되어준 지리산을 그린 <지리산진경>이다.

실재하는 경관을 사생(寫生)하는 진경산수 기법은 산세, 지세, 물의 흐름은 물론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까지 샅샅이 살피는 관찰의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제 발로 찾아다니고 제 눈으로 확인하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며, 이를 오랜 시간 지속해오기 위해서는 끈기와 집념도 함께해야 한다.

“지리산 실상사 같은 경우 그림을 완성하는데 20년이 걸렸어요. 실상사는 평지 사찰이라 구도가 잘 잡히지 않아요. 그래서 절에서 몇날 며칠을 자면서 구도를 새롭게 잡아 완성한 그림이죠. 운주사 천불천탑도 8년이 넘어 완성했어요. 지금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산천이라는 둥지에 알처럼 파묻힌 가람은 어느 한 곳에서 조망하여 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가람 주위의 산을 수차례 오르내리며 산세와 계곡물의 흐름, 지형을 살피고 가람 속의 건축물, 조형물, 조경, 원림 등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각 건물의 실측도를 사생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가람 배치도를 그려본 후에야 이들을 화면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마침내 화면에서는 대담한 필묵법으로 자연 경관이 표현되고 섬세한 필치로 사찰의 당우와 조형물 등이 묘사돼 조화미와 균형미가 가득하며 웅장함과 세밀함이 교차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나온 작품 중 이 책에는 83개 사찰 130여 점이 수록됐다.
넘실거리는 산맥과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 사이에 오롯이 드러난 가람들은 말 그대로 산과 계곡 속에 피어난 꽃과 같다. 가람을 품고 있는 주위 산세, 물의 흐름과 더불어 당우의 배치가 한눈에 드러나는 가운데, 탑과 불상 같은 조형물, 가람과 역사를 함께한 신목(神木)은 물론 스님들, 참배온 신도들, 산사에서 한가로움과 느긋함을 즐기는 이들까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땅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문화유산이, 박물관에 놓인 박제된 유물이 아닌 이 시대 사람들과 함께하며 살아 있는 문화유산의 진면목이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서 화가는 한국화의 전통 기법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탁본기법이나 목판기법을 응용하며 현대적인 색채와 기법을 가미하였다. 이는 화가 이호신이 늘 되새기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자세이며 천년 사찰을 오늘날의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이들 사찰그림들은 한국 진경산수화로서의 작품성에 더해, 역사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거나 화재, 대작불사 등으로 훼손되고 변형되는 사찰들의 이전 모습의 기록으로서의 가치 또한 지닌다. 그래서 책에는 각 사찰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창건의지, 관련 설화들도 함께 수록해 각 사찰의 문화, 역사적 의미를 살피도록 했다.

<가람진경>에 수록된 순천 조계산 선암사. 164×99cm.이호신 화백
<가람진경>에 대해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이는 단순한 이 시대 명찰의 진경화보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 건축과 조각, 회화가 한데 어우러져 숨 쉬는 이 시대 문화의 총화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진경화법 수련의 교본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 산’으로 불려온 지리산은 해발고도 1천5백 m 이상인 봉우리 20여 개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긴 능선 사이 큰 계곡들이 웅장하면서도 유현하게 흘러내린다. 이 아늑하며 풍요로운 산세는 지역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그들의 영고성쇠를 함께했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이 되었다. <지리산진경>에는 유장하게 출렁이는 산맥, 영기로 충만한 봉우리들, 기운차게 쏟아지는 폭포, 너른 옥토를 적시며 흘러가는 강, 수행과 경배의 도량 천년 고찰과 역사의 무대가 되어 피와 눈물을 쏟은 가슴 아린 현장, 위대한 문학 작품과 구성진 전통 가락을 뽑아낸 터가 있다.

넉넉한 산에 안겨 웃고 울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씨마저 서로 다르게 이질적이고 다양한 삶을 일구어가는 이들이 있는 지리산은 생동의 빛과 숨결로 가득하다.
이 화백의 그림은 지리산의 사계이다. 노란 산수유와 눈부신 벚꽃이 만발한 봄부터 흰 눈에 덮이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까지 모두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피어난 다섯 개 시, 군의 다채롭고 독특한 빛깔과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 160여 점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이 책의 장정도 특이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대부분 수작업으로 진행된 책의 장정은 불필요한 장식 서체나 이미지를 배제한 단정한 표지에 제목을 세로쓰기하고, 책등을 덮어 가리는 부분을 없애 실로 맨 부분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전통 서책의 느낌을 자아내, 한국적인 것을 가장 한국적인 기법과 정서로 그려낸 한 점 한 점 작품들의 의미와 가치,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경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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