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교와 만나다유응오 / 아름다운 인연 / 12,000원불교라는 프리즘을 통해 영화 52편을 새롭게 해석해, 불교와 기독교, 동양사상과 서구철학의 행복한 조우를 모색한 책. 책에서 주요 텍스트로 언급되는 영화는 모두 52편인데, 불교를 제재로 한 영화는 고작 8편에 불과하다. 이는 저자가 불교라는 프리즘을 통해 예술영화와 일반 대중영화를 분석하려 했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저자는 불교를 제재로 다룬 영화라고 해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불교영화로 꼽히는 ‘리틀 부다’나 ‘티벳에서의 7년’에 대해 “불교의 이미지가 왜곡돼 있다”고 간파하면서 서구인이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인 ‘오리엔탈리즘’에 빠졌다고 꼬집는다.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대해서도 “불교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은 온통 기독교적인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 근거로 성경의 원죄모티브를 따르고 있는 스토리를 든다. 그리고 저자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이 영화 바탕에 깔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기독교적인 영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나 잉마르 베르히만의 ‘산딸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와 같은 기독교를 제재로 다뤘거나, 기독교 사상에 입각해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해서는 외려 호평을 하고 있다. ‘밀양’을 해석하면서 저자는 ‘성속일여(聖俗一如)’의 가르침을 끌어온다. 저자는 ‘구원’이란 성(聖)의 영역에서 속(俗)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은밀한 햇볕(밀양 密陽)’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간/출세간, 차안/피안, 역사현실/하늘나라, 현상계/본질계, 시간/영원 등 이원론적으로 나눠서 생각하는 종교가 아니라 ‘여래장(如來藏)’사상이나 ‘하나님의 모상론’처럼 성속이 둘이 아닌 종교가 될 것을 주문한다. 저자가 ‘산딸기’나 ‘솔라리스’를 높이 평가하는 까닭도 같은 이유에서다. 저자는 이 작품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인 ‘인간의 시간’과 들뢰즈(Aion)의 아이온의 시간을 유추해내고 다시 불교의 화엄학이나 유식학과 상당히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다종교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종교의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나 불교의 입장에서 영화를 재해석한 책들이 간간이 출간됐으나, 대개의 책들이 종교와 영화라는 두 가지 텍스트 중 하나에만 너무 치중하는 우를 범했던 게 저간의 현실이다. 불교만 강조한 나머지 현학적이 되거나, 역으로 영화에만 방점을 찍어 공허해지지 않으려고 저자는 글을 쓰면서 불교서적은 물론이고, 서구철학 서적과 영화관련 책, 영화잡지에 실린 기사를 두루 참조했다. 저자의 노력은 각 글의 말미에 명기해둔 참고서적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영화와 불교를 한자리에 놓고 ‘성찰’이라는 주제를 다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영화란 무엇인가? 금세 사라지는 한 줄기 빛처럼 영화란 실체가 없다. 빛이 그런 것처럼 어느 일정한 시공간적 좌표에 머물 때만이, 즉 갇혀진 프레임 안에서만 영화는 형상을 지닌다. 몽환적이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예술이 바로 영화일 것이다.” 어찌 보면 ‘허무’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서구철학의 긍정적 허무주의(Positive nihilism)와 불교의 무아(無我)와 공(空)사상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아가 곡두 같은 세상에 진지한 성찰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각 주제별로 나뉜 글 속에서는 연기사상, 유식학, 화엄학, 여래장 사상, 선(禪) 불교의 가르침이 용해돼 있다.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사랑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대구를 이루는 글로, 인간사의 인연에 대한 성찰을 탐구한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주간불교신문’에서 ‘시네마 서방정토’라는 기획 기사를 연재하면서 임권택, 배창호, 장선우, 장윤현, 윤종찬, 김지운, 공수창, 김태용 감독에게서 직접 들은 영화 제작 배경이 녹아있어 독자에게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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