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도는 19세기 후반서 20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범종은 덕산 가야사에 봉안하기 위해 1760년에 이만돌과 신덕필 등이 조성
산신도, 독성도, 목패, 여래와 보살번, 이광사와 김정희가 쓴 편액 등도 중요 유물


서대문 봉원사 <하>

 
칠성도의 설채법은 녹색과 적색 위주로 사아사이에 백색과 청색을 칠하고 금륜과 본존 대의 등에 부분적으로 금니(金泥)를 사용했다.

(4) 칠성도
칠성도(七星圖)는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을 그린 불화이다. 칠성도는 불교가 한국에 유입된 후, 칠성신앙이 흡수되면서 104위의 화엄신중(華嚴神衆)에 포함되었으며 나아가 독립된 신앙의 주체로 발전하면서 그려졌다. 칠성각 내 중앙에 걸린 칠성도는 가로 200㎝×세로 140㎝의 비단바탕에 진한 채색을 사용하였다. 화면의 구성은 중앙에 북두칠성(北斗七星)인 금륜보계치성광여래(金輪寶界熾盛光如來)가 녹색으로 처리된 두광과 금판을 붙인 둥근 신광을 두르고 높은 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계)가 높이 솟아 있고, 정수리의 둥근 정상계주(頂上계珠)에서 빛을 발산한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보륜(寶輪)을 들고 있다. 붉은 대의는 변형우견편단으로 걸치고, 그 안에 승각기(僧脚崎)를 입어 수평으로 묶고 있다.

하단에는 치성광여래 앞에 일월광보살(日月光菩薩)이 지물을 들고 마주 서 있으며, 일광보살은 관(冠) 중앙에 붉은 색의 해[日]를, 월광보살은 관 중앙에 하얀 색의 달[月]을 표현하였다. 보살 좌우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으며, 상단의 칠여래(七如來)는 치성광여래를 향하여 몸을 옆으로 돌려 합장하고 있다.

중단의 칠원성군은 대부분 양손에 홀을 가지런히 잡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듯이 얼굴을 마주보고, 화면은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인물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감을 주어 본존 쪽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전체적인 설채법(設彩法)은 녹색과 적색위주로, 사이사이에 백색과 청색을 칠하고, 금륜과 본존 대의 등에 부분적으로 금니(金泥)를 사용하였다. 화면의 3단 구도와 존상들의 세부 표현 및 색을 사용한 방법 등에서 전형적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제작된 불화로 추정된다.
 
독성도는 화기(畵記)에 적혀 있는 년도로 보아 1904년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인다.

(5) 독성도
독성도는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아 스승 없이 스스로 독수선정(獨修禪定)하여 깨달음을 얻은 나반존자(那般尊者)를 그린 불화이다. 독성은 인도 남쪽의 천태산(天台山)에서 수행하면서 부처의 열반 후에 석가모니의 법을 전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자 하는 나한(羅漢)의 하나로, 독성도는 천태산을 배경으로 나반존자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삼천불전에 봉안 중인 독성도는 가로 178㎝×세로 148.5㎝의 비단바탕에 진한 채색으로 그려졌으며, 독성은 화면 중앙에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짚고, 지팡이를 잡은 왼손은 세운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채 편안하게 앉아있다.

독성은 눈썹과 수염 등을 흰색으로 칠하여 노스님을 표현하였으며, 머리에는 두광을 두르고 얼굴은 온화하며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착의법은 화려한 꽃무늬 깃을 단 붉은 장삼을 두르고, 하반신에 보라색 치마를 입고 있다. 독성의 배경에는 기암절벽에서 자란 소나무가 좌우에 그려져 있고, 중단에는 모란(牧丹)과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를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기존에 조사된 화기(畵記)에 ‘京畿右道楊州三角山奉元寺留田鎭」金魚 漢○堂○○」 大韓光武八年甲辰五月日」證明比丘 景芸’으로 적혀 있어 1904년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40년대 작성된 재산대장에 ‘후불탱(後佛幀) 1점, 높이 6.65촌(寸) 너비 7.70촌(寸), 대웅전(大雄殿), 광무 8년 혜고(慧고) 조(造), 화주 이보담(李寶潭)’이라 언급되어 혜고봉감의 작품일 가능이 있지만 기존 보고된 화기의 화원 이름과 다른 현황이다. 
 

산신도의 전체적인 색감은 산신과 인물들 주변을 옅은 황토색으로 처리하여 인물들을 돋보이게 한 것이 특징.

(6) 산신도
산신도는 수명장수와 현세의 복을 얻기 위해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불화이다. 이 불화는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면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산신에 대한 신앙이 유행하면서 산신각, 산왕각, 삼성각 등에 봉안하였다.

삼천불전에 봉안 중인 산신도는 가로 182㎝×세로 152㎝의 비단바탕에 진한 채색으로 그려졌다. 화면의 중앙에는 호랑이와 함께 앉아 있는 산신(山神)을 묘사하였다. 산신은 수염이 있는 백발의 노인으로 머리에 속이 비치는 검은 색의 망건을 쓰고, 망건자락이 어깨를 덮고 그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근 편이고, 윤곽선은 갈색으로 그리고 주위에 약간의 음영을 넣었다. 어깨는 넓은 편으로 도포식의 붉은 옷을 걸쳤으며, 옷깃과 소매단 가장자리는 화려한 꽃무늬[花文]를 그렸다. 산신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지 두 발이 보이고, 오른손은 수염을 쓸어내리고, 왼손은 부채를 들고 있다. 산신의 옆에는 앞다리를 세우고 뒷다리를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의 몸은 산신을 향한 채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고 있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머리카락을 쌍으로 묶은 쌍계형(雙계形)으로 붉은 색 옷을 입고 지물을 들고 있다. 동자 위에는 청록의 바위산과 도식화 된 폭포를 그렸다. 전체적인 색감은 산신과 인물들 주변을 옅은 황토색으로 처리하여 인물들을 돋보이게 하고, 적색과 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화면의 맨 아래쪽에 두루마리를 펼친 듯이 표현한 화기에는 ‘皇城三角山奉元寺」 山王幀奉安于」 比丘 隱庵○○」 證明比丘 廣濟○○」 比丘 玩海○○」 金魚比丘 慧果○○」 比丘 漢谷○○」 片手比丘 ○○」 施主秩 奉命」 尙宮淸信女乙未生……」 乾命庚申生金○○」 光武九年乙巳八月十日」書比丘○○’라고 적혀 있다.

산신도가 유리액자 안에 있어 하단의 글자를 확인할 수 없지만, 기존에 조사된 보고서를 참조하면 산신도는 1905년에 상궁이 시주하여 혜과봉간 스님과 한곡돈법 스님이 조성하였다. 이 불화승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전국 사찰에 불화를 조성한 스님들이다.

불교공예품
 
범종은 종신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덕산 가야산에 봉안하기 의해 제작 된 것임.

(1) 범종

범종은 예불 의식에 악기로 사용하는 의식구로서 북, 목어, 운판과 함께 중요하게 여겨지는 법구사물(法具四物)의 하나이다.

대웅전에 봉안된 범종은 전체 높이가 85.4㎝인 중형으로, 천판 위에 두 마리의 용(龍)이 반대쪽을 바라보며 몸을 맞대고 있는 용뉴(龍紐)가 달려 있다. 용의 얼굴은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단순하게 조각되었지만. 힘차게 벌린 앞 다리가 천판을 쥐고 있는 표현이 사실적이다.

천판 아래에는 8개의 범자(梵字)를 양각으로 두르고, 그 밑에 보살입상(菩薩立像)과 유곽(乳廓) 등을 번갈아 조각하였다. 보살상들은 두 손을 가슴에서 모아 공손히 합장(合掌)하고, 모두 두광(頭光)을 갖추고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길게 나부끼는 법의를 입고 있다. 종신(鐘身)에는 ‘……片手 李萬乭」申德必」朴○就 … 乾隆二十五年庚」辰○月日德山」伽倻寺……’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1760년에 덕산

가야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이만돌, 신덕필 등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범종 제작을 주도한 이만돌은 봉원사 범종 외에도 1761년에 충북 보은 영국사 만세루 범종을 만들었고, 부편수로 참여한 신덕필은 1759년에 충남 당진 영랑사 범종을 이만석과 조성하였다. 
 

봉원사 목패는 18세기 전.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2) 목패
패는 불·보살의 이름과 소원하는 내용을 적거나 왕과 왕비의 만수를 비는 내용을 적어 불단 위에 봉안하는 의식구이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져 목패라고 부르는데, 부처의 이름을 적은 불패(佛牌)와 기원하는 글을 적은 원패(願牌)로 크게 구분된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패는 높이가 97㎝로 두 점이 봉안되어 있다. 목패는 패두(牌頭), 패신(牌身), 패좌(牌座)를 따로 만들어 조립한 상태이다. 패신 중앙의 명문곽은 긴 직사각형으로, 검정 바탕에 ‘대한민국천추만세(大韓民國千秋萬歲)’와 ‘불일증휘법륜상전(佛日增輝法輪常轉)’를 금니로 썼다. 그 중 하나는 패두에 정면을 바라보는 황룡(黃龍)이 큼지막하게 배치되고, 패신 좌측에도 양쪽에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황룡을 조각하였다.

다른 하나는 패두와 패신에 날아가는 봉황을 배치하였다. 패좌는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원래 황룡이 새겨진 목패는 주상전하를 봉황이 새겨진 목패는 왕비전하의 축원문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패두와 패신이 하나의 나무에 문양을 새긴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후반에 두 조각을 붙여 투각한 목패와 다르게 제작되어 18세기 전·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봉원사의 중요한 유물로는 야외 불교의식을 진행할 때 걸어놓았던 여래와 보살번 등과 이광사(李匡師)와 김정희 등이 쓴 편액이 남아있다.

(문학박사,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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