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암혼수는 능엄경 25방편수행을 수학해 진수를 획득하고, 나옹혜근의 삼구법문에 명쾌한 답변으로 인가를 받는다. 평생 왕명을 피해 은거하며 능엄경 강의와 수행에 주력했다. 환암혼수의 생애에 관한 기본자료는 ‘충주청룡사보각국사환암정혜원융탑비문’ (1394년 건립)으로 그 출처는 ‘조선금석총람’ 下 pp.719-725 권근이 찬한 비문과 ‘조선불교통사’ 상 pp.339-343 권근(權近)이 찬한 비문 및 pp.344-345 이색이 찬한 환암기(幻菴記)가 이에 해당한다. 이를 바탕으로 환암의 생애를 더듬어보기로 한다.----------------------------------------------------------------환암(幻菴)의 비문은 혼수선사(1320~1392)가 입적한 2년 혹 3년 째 해당하는 조선 태조 3년인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고려말부터 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권근(權近 : 1352~1409)이 태조의 명을 받아서 지었다. 환암(幻菴)이라는 시호는 이때 조선 태조로부터 추증된 것이다. 환암혼수의 휘는 혼수(混修)이고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성은 조(趙)씨로서 아버지의 고향은 오늘날 지명으로는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내각리이고, 혼수는 당시 아버지가 현감으로 있던 부임지인 오늘날 지명으로 경북 예천 용주에서 1320년 3월 13일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숙령(叔鴒)으로 사헌부 소속의 정6품의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경(慶)씨로서 사대부 가문이었다. 혼수는 어려서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를 많이 하였다. 따라서 출가하면 연명할 수 있으며 또한 큰 인물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출가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었다. 12세 이후 계송(繼松)스님을 따라 마을상좌가 되었는데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계송스님을 따라 내전과 외전을 널리 공부하였고 22세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이로써 현몽이 있어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기 위하여 29세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2년 후 31세에 어머니의 병환소식을 듣고 가까운 경북 성주(星州)에서 5~6년을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법화경으로 명복을 빌고나서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식영감(息影鑑, 息影菴, 息影淵鑑) 스님에게 참하여 능엄경의 25가지 방편수행을 수학하여 그 진수를 얻었다. 조쌍중(趙雙重)의 청을 받아 휴휴암(休休菴)에서 널리 능엄경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3년을 주석한 후에 충주의 청룡사 연회암(靑龍寺 宴晦庵)으로 옮겼다. 회암사 주지를 맡아달라는 공민왕의 청을 뒤로하고 금오산(金鼇山)과 오대산(五臺山)에서 주석하였다.42세에는 궁궐로 들어가는 기회로 버리고 산속에 은거하였다. 50세에는 김황(金璜)의 초청으로 경기도 안성의 서운사(瑞雲寺)에 주석하면서 가람을 크게 일으키고 선법을 널리 폈다. 51세에는 회암사에서 공민왕의 명으로 공부선장(功夫選場)이 실시되어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덕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혼수스님도 이에 참여하였다. 나옹혜근이 감독관으로 있어 일착어(一著語)를 던졌는데 혼수만이 당문구(當門句)와 입문구(入門句)와 문내구(門內句)의 삼구법문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을 하여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 근방의 위봉산(威鳳山)에 몸을 숨겨버렸다. 53세에는 왕명을 받아 전남 나주의 불호사(佛護寺) 주지를 지냈다. 54세에는 내불당(內佛堂)을 맡아달라는 왕명을 피하여 경북 영덕의 평해에 몸을 은둔하였다. 55세에 마지못하여 내불당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왕과 그 권속들을 위해 널리 법문을 폈다. 같은 해에 공민왕이 승하하고 우왕이 즉위하여 광통무애원묘대지보제선사(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禪師)라는 법호(法號)를 내렸다.56세에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고, 57세에는 서운사(瑞雲寺)에 다시 들어갔다. 59세에는 치악산에 머물다가 다시 연회암(宴晦庵)으로 돌아왔다. 이때 왕명으로 광암사(廣巖寺)에 3년동안 주지를 하다가 원주의 백운암으로 남몰래 피하였다. 이후 용문산과 청평산과 치악산 등에서 수행으로 일관하였다. 64세에 조정의 뜻을 받아 연회암에 돌아가 국사에 책봉되었다. 국사의 호는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오불심종흥자운비복국리생묘화무궁도대선사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知雄尊者)였다. 그리고 충주 개천사(開天寺)를 주석사찰로 정하였다. 다시 서운사로 옮겼으나 궁궐로 초청하였다. 65세에는 도적들의 빈번한 출현으로 인하여 개천사에서 광암사로 옮겼다. 66세에는 왕명으로 광암사에 능엄법회를 개설하여 50일동안 천재지변이 없도록 기원하고 많은 명망 있는 유학자들과 고승(高僧)들에게 설법하였다. 67세에는 대비(大妃)의 요청으로 개성의 보국사(輔國寺)에서 선왕(先王:공민왕)을 위한 극락발원으로 능엄법회를 개최하였다. 68세에는 궁궐에서 국가적인 재앙을 물리치는 소재법회(消災法會)를 개최하였다.69세에는 창왕(昌王)이 즉위하였을 때 개천사로 돌아갔다. 이후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국사를 반납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국사에 책봉되어 개천사에 주석하였다. 72세에 대장경 조판을 마치고 서운사에서 회향법회를 봉행하였다. 73세에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노병을 이유로 국사직을 반납하고 청룡사로 옮겨 거기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국사의 직인을 되돌려보냈다. 이후 9월 18일 국사의 직인을 조정에 돌려주라고 말하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8일동안 앉은 자세로 모셔지다가 9월 25일 연회암 북쪽 산기슭에서 다비에 부쳤다. 태조는 부음을 듣고 애도하면서 시호를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부도를 건립하도록 하여 그해 12월에 청룡사의 북쪽 봉우리에 부도탑을 세우고 유골을 봉안하였다. 세수 73세이고 법랍은 60이었다. 혼수의 행리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경북 예천 용주에서 출생 - 계송(繼松)에게 출가 - 선시(禪試) 상상과(上上科) 합격 - 금강산 - 경북 성주(星州) -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식영감(息影鑑, 息影菴, 息影淵鑑) 스님에게 참함 - 휴휴암(休休菴) - 충주의 청룡사 연회암(靑龍寺 宴晦庵) - 금오산(金鼇山) - 오대산 신성암(神聖庵) - 고운암(孤雲庵) 방문 - 은거 - 경기도 안성의 서운사(瑞雲寺) - 회암사에서 공부선장(功夫選場) 응시 - 위봉산(威鳳山) - 전남 나주의 불호사(佛護寺) - 경북 영덕의 평해 - 내불당 입당 - 송광사(松廣寺) - 서운사 - 치악산 - 연회암 - 광암사(廣巖寺) - 원주의 백운암 - 용문산 - 청평산 - 치악산 - 국사에 책봉됨 - 충주 개천사(開天寺) - 서운사 - 개천사 - 광암사 - 개성의 보국사(輔國寺) - 입궐하여 소재법회(消災法會) 개최 - 개천사 - 치악산 - 개천사 - 서운사에서 대장경 조판 회향법회 - 청룡사 - 입적 - 연회암 북쪽 산기슭에서 다비에 부침 - 청룡사의 북쪽 봉우리에 부도탑을 세우고 유골을 봉안.<제458호> 06-07-21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