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가 했더니 어느새 삼림(森林)이 무성(茂盛)한걸 보니 또 하안거 결제(夏安居 結制) 기간이 돌아왔습니다.조계산록(曹溪山麓)에는 백화(百花)가 만발(滿發)하나 봉접(蜂蝶)은 오지 않고 청록(靑綠)이 무성(茂盛)하나 극락조(極樂鳥)의 명성(鳴聲)이 들리지 않습니다.태공(太公)이 낚시를 드리우나 소소(小鮹)하나 올라오지 않으니 수동(水凍)이면 어난약(魚難躍)이요 한산(山寒)이면 화발지(花發遲)하는 까닭입니다.산중(山中)에 향수해(香水海)의 법열(法悅)을 느끼기는 어렵고 수미산(須彌山)의 고창(高蒼)한 훈기(薰氣)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형주(衡主) 육왕산(育王山)의 홍통선사(弘通禪師)에게 어느 납자(衲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선사(禪師)의 가풍(家風)입니까?” 선사(禪師)가 대답했습니다. “온몸에 닷푼의 값어치도 없느니라” 납자(衲子)가 다시 물었습니다. “선사(禪師)께서는 너무도 가난하십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시설(施設 : 총림대중叢林大衆을 지도指導하고 이끄는 것)하시겠습니까?” 선사(禪師)가 대답했습니다. “집안의 형편(形便)대로 따르리니 나로서도 별수 있겠는가?”총림대중(叢林大衆) 여러분!달마(達磨)가 서래(西來)하여 수휴척이(手携隻履)하고 일조주장자(一條拄杖子)한 까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육조고사(六朝古寺)의 조계가풍(曹溪家風)이 날로 쇠미(衰微)하니 조주(趙州)의 삼봉(三棒)이 어디를 향해 가야합니까?초석(礎石)을 다시 놓고 기둥을 세워 상량(上樑)을 올리는 흥법불사(興法佛事)를 해야하겠습니다.그러나 고목(枯木)은 이미 쓰러지고 착목(娕木)은 아직 유약(幼弱)하여 법주(法柱)가 될만한 나무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대붕(大鵬)은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을 날아가고 주작(朱雀)만 두두남남(頭頭喃喃)이며 용반(龍盤)은 자취가 없고 호거(虎踞)역시 보이지 않으니 바야흐로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어디 따로 있으리오.태고(太古)의 법손(法孫)이여, 출가납자(出家衲子)여, 선암(仙巖)의 대중(大衆)이여 각성(覺醒) 또 각성(覺醒)하시오. 생각해보면 막급(莫急)하고 또 막급(莫急)합니다. 인무원견(人無遠見)이면 필유근우(必有近憂)입니다.(사람이 멀리 보는 눈이 없으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근심이 생긴다)어떤 스님이 노산(盧山) 귀종선사(歸宗禪師)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대중(大衆)들이 선사(禪師)의 말씀을 듣고자 모두 모였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둘둘(兩兩), 셋셋(三三) 이니라” “무슨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셋셋(三三), 둘둘(兩兩) 이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양양삼삼(兩兩三三)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의 이야기와 같은 뜻이거니와 오직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법(法 : 眞理)을 법(法)이라 말하면 이미 법(法)이 아니듯이 하나가 둘이요 둘 또한 하나인 것을 하나니 둘이니 분별심(分別心)을 내어 무엇에 쓰리오. 분별시비(分別是非)는 집착(執着)의 원인(原因)이며 참법(적연寂然)을 가로막는 마구니(魔性)입니다.얼마 전에 부처님오신날이 지나갔습니다. 불자(佛子)들 마다 부처님오신 뜻을 기리는 축하법회(祝賀法會)를 봉행(奉行)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성(佛性)을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자비희사慈悲喜捨)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성(佛性)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면 중생(衆生)의 범성(凡性)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폭포(瀑布)와 파도(波濤)는 한물(一水)이며, 물과 얼음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체계(本體界)의 실상(實象)은 파악(把握)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의 작황(作況)만 보고 시비분별(是非分別)을 일삼고 있습니다. 오늘에 우리 총림(叢林)의 현실(現實)과 똑같습니다.총림대중(叢林大衆) 여러분은 금년(今年) 하안거(夏安居) 기간 동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하는 절박(切迫)한 심정(心情)으로 모두가 몸을 던져 주춧돌을 다시 세우고 기둥과 대들보를 올려 육조(六朝)의 활인가풍(活人家風)을 되살리는데 노력(勞力)합시다.太古叢林 方丈 慧草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