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륭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

1. 삶과 죽음의 원환

인간에게 주어진 현생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종과 횡의 축으로만 정의될 수 없는 비가역적 원환을 형성한다. 본유적으로 현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쉽게 바뀌지 않는 불가항력적 선과 악의 끝없는 대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의 과정은 삼생의 업으로 둘러싸인 육신이 온전한 유심적 실재로 거듭나기 위한 윤회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에 드러난 현실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예고 없이 찾아들 수 있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도 중대한 삶의 과업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시각으로 죽음의 문제에 천착할 수 있을까? 우선 죽음의 본질이 오직 사유의 힘에 근거하여 역으로 의미를 재생산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루카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예술의 형식은 형이상학적 불협화음을 통해 정의되어 있는 바, 그 자체 내에 완성된 총체성을 토대로 삶과 죽음의 원환을 형상화한다. 여기에서 예술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반문을 던지므로 작가가 형식을 창조한다는 것은 불협화음의 현존재를 깊이 확증해 나가는 과정으로 상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깊이는 형식(기표)에 의해 특정된 본질(기의)로까지 파고들고, 그 넓이로는 서사의 총체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상상적 합리화의 과정으로 인간의 내부에 상주하는 사실 존재를 찾아가려는 하나의 접근법으로 헤아려진다. 예컨대 난해한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에 포함되는데 심오하기 이를 데 없고 지극히 어려운 작가로 정평이 난 작가 박상륭이 그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박상륭(1940~2017)은 1963년 「아겔다마」(『사상계』) 단편으로 신인상을 입선한 후 2008년 『잡설품』에 이르기까지 일평생 인간의 존재론적 탐구와 죽음을 궁구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상륭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종교소설의 형태로 보편적인 소설의 형식을 많이 벗어나 있다. 대체로 신화, 종교, 철학, 우주 그 이상의 사상을 아우르는 심오한 서사와 플롯, 주제 의식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까닭에 일반 독자에게 지극히 어려운 작가로 인식되어 왔다. 필연적으로 박상륭의 소설은 난해할 수밖에 없지만 존재의 근원과 비의를 속속들이 풀어낸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박상륭이 말하는 죽음의 형태는 또 다른 재생의 과정이자 구원이라는 맥락으로 귀결되는데, “화현된 세계에, 하나의 리얼리티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표어가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박상륭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죽음의 한 연구』을 탐독함으로써 우리는 이 존재론적 물음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2. ‘유리’에서 궁구하는 죽음의 구도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는 신화적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이 겪게 되는 사십 일간의 고행과 구도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유리로 향하는 여정에서 예기치 못한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어떤 원한이나 증오도 없는 그 살욕의 대상에는 스승, 존자, 애꾸눈 중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유리를 떠났다 다시 돌아온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인 수도부의 죽음을 목도하고 판관인 촛불승에 의하여 살인죄로 처형된다. 또한 이 소설의 주요 골자는 주인공 육조가 서른셋의 나이로 재생을 위한 죽음을 완성하는 데 있으므로 인간이 가지는 죽음의 원죄 의식과 고뇌를 통해 “나의 신,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영혼, 나의 몸”이라는 주제 의식을 심층적으로 확대한다.

유리에서는 그러나,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 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 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튼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벼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 처음에는 자기에게 마땅스럴 장소를 물색하겠다고 여기저기로 싸돌아다니다가, 찾기는커녕 마음에 진공만 키워버린 뒤, 타성에 의해서 그 진공 속을 몸 가지고 밖으로 한없이 구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아흔 살은 되었음직한 그 중의 얘기대로 하자면, 그러하다, 즉슨, 무슨 고장들이 다 그곳대로의 아름다움과 그곳대로의 고통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의 한 연구』(上), 문학과지성사, 9~10면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 박상륭의 소설 전반에는 만연체 문장이 상당수를 이룬다. 유난히 쉼표도 빈번하고 문장도 꽤 긴 편이라 집중력이 저하되면 중간에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 범상치 않은 소설에는 중생으로서 주인공이 불법을 거스르는 행위가 적나라하게 묘사되는데, 그것은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를 동시에 아우른다. 여기에서 소설의 공간성을 부연하자면 작가는 주인공이 겪는 온갖 고초와 생사윤회의 고행을 ‘유리’라는 신화적 공간으로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리’는 중국의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 주왕에게 잡혀 귀양살이를 하면서 도를 깨우친 장소로 알려져 있다. 7년의 구금 기간 동안 문왕은 동양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주역』 일서를 집필했다. 이 경전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올곧음을 잃지 않았으니, 어둠으로 밝음을 가렸다”(利艱貞, 晦其明也)는 도광양회의 진리가 함의되어 있다. 이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사십 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튼 누구라도, 가슴을 불을 끄고” 지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야 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유리’는 작가의 관념에 의해 재구성된 허구적 공간이지만, 문왕이 자연의 도를 깊이 궁구하고 생명과 인간의 이치를 밝힌 『주역』의 정신과 그 맥을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사립짝에 들어서는 길로, 어머니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치마를 끌어올려 더러운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그러면 어머니의 눈에 슬픈 색기가 서리고, 나와의 이별이 담긴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를 빼앗아가는 모든 아버지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질투와 증오 같은 것으로, 비질비질 울며 바다로 달려내려가서는, 그 고유한 물속에 나를 파묻어놓는 것이었다. (…) 그래서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어머니를 저주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른 새, 저 어린 잠지가 불어나서, 물속에 잠겨 앉은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돌출된 남근, 하나의 더러운 아버지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저 정중스럽지 못한 손들로 쳐들어 보이던, 저 음모 푸석한 사타구니며, 물크레해 보이는 둔부 같은 것을, 그러며 나는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러며 내 손바닥을 펴보는데, 그러면 내 손도 또한 저 때 낀 아버지들의 마디 굵은 손으로 변해져, 저 까스르한 바다를 물크레 더듬고 있었다. 손바닥에 가득 채워졌다 빠져나가는 바다의 감촉은 그리고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죽어버렸다. - 『죽음의 한 연구』(上), 문학과지성사, 85면

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에서 “여성은 저주며, 동시에 은총”이라는 의미를 도처에 흩트려 놓는다. “대지와 여성(어머니)이 있기에 윤회가 멈추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지와 여성은 저주(의 장소)이다”라고 역설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를테면 주인공의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수많은 남자를 상대하는 창부였다는 사실은 질곡 같은 생애의 비극성으로 환원된다. 그 불온한 현실에 대한 자기 투사는 “어머니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치마를 끌어올려 더러운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세상의 모든 남성을 향한 환멸적 응시에서 “어머니의 눈에 슬픈 색기가 서리고, 나와의 이별이 담긴” 단절로 인한 고통으로 잠식된다. 즉 ‘나’의 내적 체험은 서러움과 불안으로 증폭되어 “어머니를 빼앗아가는 모든 아버지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질투와 증오”로 일그러진다. 그 상실감은 절망의 심연에 깊숙이 뿌리내린 성숙되지 못한 자아의 ‘결핍’을 상징화한다.

여기에서 실재는 어머니의 모체를 빼앗아가는 남성성에 근거하므로 본유적인 ‘나’의 자의식과도 동일시된다. 예를 들면 “눈물을 떨어뜨리며 어머니는 저주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른 새, 저 어린 잠지가 불어나서, 물속에 잠겨 앉은 아이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돌출된 남근, 하나의 더러운 아버지”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나’의 본질적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미 “내 손도 또한 저 때 낀 아버지들의 마디 굵은 손으로 변해져, 저 까스르한 바다를 물크레 더듬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한 순간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남성성, 바로 본질적인 리비도적 징후를 읽게 된다.

그녀는 죽은 것이었다. 수치와 독한 울음이, 내 구멍에서 핏덩어리가 되어 토해져 넘어오려 했다. (…) 그 죽음에다 뭔지 수혈할 것이 있다면, 그리고 내것의 무엇인지를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직의 말뿐이었고, 그래서 그 말이 그녀의 저승방에 울려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혀끝을 이빨로 물어끊어 피와 함께 그 죽음의 깊은 목구멍에다, 깊이 깊이 밀어넣어주었다. 내가 애착하였던 것의 죽음에 바칠 산 희생, 산 제물이란 그것밖에 없던 것이다. 말을 나누는 것, 말을 저승 가운데로 올려 보내는 것, 그래서 이승에 앉아서도 그 혼령과 통화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말뿐이었다. - 『죽음의 한 연구』(下), 문학과지성사, 213∼214면

주인공이 중생의 불법을 체득하고자 방황하는 사이 수도부는 촛불승에게 능욕을 당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공이 유리로 돌아왔건만, 그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신열에 들끓는 여인의 육신이었다. “수치와 독한 울음이, 내 구멍에서 핏덩어리가 되어 토해져 넘어오려 했”던 비통한 심경으로 죽음을 목도한 순간 ‘나’는 ‘그녀’의 소원대로 마지막 합일을 이루려고 한다. 그것은 말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내 혀끝을 물어끊어” 현세에서의 말을 산 제물로 바침으로써 “이승에 앉아서도 그 혼령과 통화할 수 있는 것”으로 죽음을 승화하려는 제의적 의식으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언어란 발화의 집착으로 얻어지는 소산이 아니라, 존재를 떠받치는 대지가 내민 “빈 요니”를 보듬고, 그 영특함 때문에 스스로 버림받은 모종의 근원에 귀의하는 찰나를 깨닫는 이치다.

생태학적으로 만물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소립자들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이 유기체가 모여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반복하는 거대한 자연물을 형성한다. 근본적으로 자연 세계는 초월 세계와 얽혀 있고 덧없는 육신은 경험을 연속하므로 죽음의 사건은 주관과 객관의 정신을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현실적 존재에게 사건은 곧 자연으로 결부되고, 이 사실성은 구체적인 진술의 행위로 예속된다. 그 연속적이며 유사한 존재들의 호명은 이생에서의 한을 저승으로 올려 보내기 위한 제의적 공간으로서의 ‘유리’를 신성성으로 상정한다.

3. 요니로 현전되는 양극의 타원형

박상륭 소설은 어머니의 자궁(요니)에 주요한 맥을 함께한다. 그것은 죽음의 분리된 관념에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의 숨결, 대속되는 여성의 죽음 속에 드러나지 않은 삶의 진리를 함의한다. 예컨대 “여성은, 구원에서 멀리 떨어진, 보다 더 짐승에 가까운, 이 남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희생을 자초하여, 이 세상으로 오는 자들, 보디사트바(부처)일 것이다.”라는 작가의 발언에서 유추할 수 있듯 여성은 원형적 계시로서의 신성성으로 함축된다. 즉 작가에게 요니는 고등한 인간의 긍정과 부정의 양자를 모두 포괄하며 단순한 수용과 재현을 넘어선 창조적 변형을 추구하는 윤리적 의지이다. 그러므로 세계 내에서 물리적인 자극을 받음으로써 발생하는 존재의 번뇌는 윤회의 굴레에서 억겁을 세월을 돌고 도는 삼계육도의 과정을 유의미적인 깨달음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출발점으로서 너 자신을 재료로 택한 뒤, 너 자신 속에서 찾을 일이지, 네놈의 속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그 자신의 것으로 하고 말하기를 나의 신,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영혼, 나의 몸이라는 그것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슬픔이, 사랑이, 증오가 비롯되는 근원을 알작시라, 뜻이 없는데도 사람이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는가, 뜻이 없는데도 어떻게 쉬며, 자기의 뜻과도 상관없이 성내게 되는 일이나 애착하게 되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비롯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것이다. 만약에 네가 이러한 것들을 주의깊게 살핀다면, 너는 자신 속에서 그것들을 찾게 될 것이지. (…) 마음이 좁은 자는, 자기 곁을 스쳐지나는 것을 언제나 자기와 다른 것으로 보며, 마음을 더욱더 오그려싸아, 더욱더 좁은 것으려 만들려 한다. (…) 마음이 넓은 자는, 말 타고 강산을 지나더라도, 그 스치는 모든 풍경이 자기의 밖의 다른 것이라고는 보지를 않는다. (…) 작은 마음을 크게 한다는 일이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니 그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에 없다구. 글쎄, 한 질료가 금이 되기까지는, 열두 번이나 일곱 번의 죽음, 뭉뚱그려 적어도 세 번의 죽음을 완전히 치르지 않고는 안 되거든. - 『죽음의 한 연구』(上), 문학과지성사, 25∼26면

“출발점으로서 너 자신을 재료로 택한 뒤, 너 자신 속에서 찾을 일이지.”라는 발화에서 드러나듯이 그에게 ‘말하기’ 형식은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몸”의 형상성으로 귀착된다. 즉 “슬픔이, 사랑이, 증오가 비롯되는 근원을 알작시라”라는 존재 가치의 증명은 “자기의 뜻과도 상관없이 성내게 되는 일이나 애착하게 되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비롯되는지”에 대한 자기 인식으로부터 기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번뇌란 실존적 삶의 고초로부터 파생되는 불가항력적 자기 투쟁이므로 “성냄도 기쁨도, 옳음도 그름도, 선함도 악함도, 처음도 끝도 없는 것”으로 존재를 크게 하려는 잠재적인 가능성로부터 촉발된다. 여기에는 양가적인 자기 부정성이 함의되어 있다. 그 이원론적 감정을 이해하는 주안점은 “스치는 모든 풍경이 자기의 밖의 다른 것”이 아닌 내면으로 체화된 모상으로 정립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과정으로서의 철학은 세계와 나 사이에 무한하게 펼쳐지는 파악의 원리로 더욱 공고해진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근본적인 문제란 완성된 사실을 파악하려는 것”에 있으며 실체로만 사물을 파악하지 않고 ‘사건(event)’을 과정 철학으로 사유하고 현상을 직시하는 데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사실 존재들은 연속적인 까닭에 실체는 배타적이지만 ‘사실’은 우호적으로 매개된다. 본질적으로 세계는 질서와 무질서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외적으로 응시되는 대상의 ‘나’는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그 뒤섞임 속에서 ‘본성’을 ‘사건’으로 체화한다. 가령 ‘나’와 연결되는 심리적인 동인 사이에서 하나의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이 ‘우리’라는 ‘사건’으로 교접함으로써 번뇌라는 윤회적 사슬로 생을 선회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 질료가 금이 되기까지는, 열두 번이나 일곱 번의 죽음, 뭉뚱그려 적어도 세 번의 죽음을 완전히 치르지 않고는 안 되거든.”라는 대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는데 그 진리를 궁구하려는 태도에서 삶에 대한 실존적 고뇌가 경험으로써 존재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변적 상황을 참고 견디며 ‘있는 것의 있음’, ‘없는 것의 없음’의 사유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현존재를 찾아가려는 하나의 유기체적 구도관으로 헤아려질 수 있다.

‘생명’이 ‘상징’을 입을 수 있다면, 그러나 저 ‘양극을 갖는 타원형’ 말고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을지는 나만은 모른다. 그것은 머문 듯하여도 머물지 않으며, 채워져 있는 듯하여도 채워져 있지 않으며, 산 듯하여도 살고 있지 않으며, 죽어 있지 않으며, 형태인 듯하여도 형태가 아니며, 형태가 아닌 듯하여도 형태이며, 성별로 이름 붙여줄 듯도 싶으나 성별이 없고, 성별이 없는 듯하나 없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작은 듯하여도 가장 큰 것이 그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그래서, 금(金)이나 불(佛)처럼, 순수하지도, 완전하지도 못한데, 그런 탓에 그것은 진원(眞圓)이라도 불리어져야 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는, 생명이란 그런 것이라고 알기 시작한다. 죽음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한 마리의 물고기. - 『죽음의 한 연구』(上), 문학과지성사, 208~212면

『죽음의 한 연구』에서 눈에 띄는 표현 중 하나는 “양극을 갖는 타원형”에 대한 도식이다. 이 형상은 아스라이 굽은, 두 개의 활선이 맞닿아 뾰족한 뿔로 양극을 이룬 타원의 형태만을 가졌을 뿐 안이 채워져 있는 것인지, 비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성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이 연쇄의 고리는 체(體)와 용(用)을 하나의 소실점으로 교접하는 중용의 미덕으로, “머문 듯하여도 머물지 않”는 불완전한 형상성으로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일별한다. 말하자면 현재의 시간성으로 촉발되어 과거의 시간으로 집적하고 또다시 미래의 삼층 구조로 뒤얽혀 비로소 현실로 회귀하는 일신 삼격의 포착인 것이다. 마치 상하로 뿔을 가진 타원은 ‘생명’과 ‘상징’으로 삼세를 잉태하고 있는 임부 같은 모양을 취했다고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 두 개의 극점을 가진 길쭉한 형태는 양(陽)의 형태에서 보면 여성의 자궁과 음부를 상징하고, 음(陰)의 형태에서 보면 남근과 물고기의 윤곽을 합쳐 놓은 것과 같다. 그것은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서 심층적 파동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물아일체의 비극적 드라마는 “죽음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낚고자 하는 중생의 갈등 양상으로 극대화하며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해탈의 과정으로 존재의 비의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근본적으로 마른 늪에서는 물고기를 낚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불가항력적 자기 투쟁을 두고 촛불중은 “공양미 삼백 석에 해당하는 도 닦기”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즉 마른 늪에서 물고기 낚는 행위는 육조 촌장이 된 주인공의 죽음을 의미화하는 일종의 복선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죽음은 완전한 소멸로 귀결되지 않으며, 거듭되는 윤회의 과정과 육체라는 껍데기를 탈피하는 재생의 과정으로 획득되는 구도관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존재론적 균열과 낙차를 견뎌 내려는 주인공의 번뇌는 스스로를 탈각하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깨달음의 과정으로 터득된다.

4. 죽음,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

인간에게 가장 늦게 도달하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은 고통의 경험으로 수반되는 회한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불운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나아간다는 존재의 비극성에서 생의 덧없음을 통감하므로 경험에서 오는 ‘앎’의 영역은 가장 늦게 당도하는 미지의 세계이다. 현실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심층적 파동을 겪으며 성숙에 이르는데,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삶의 무의미성을 자각하고 생득적인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존적 경험으로 연계되는 주체의 ‘부름’에 대한 ‘다가섬’이자 사유 체계로 공고해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지향이다. 이것은 나를 인식하는 과정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역설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본질은 완결이 아닌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 속에 체화된다. ‘나’라는 구성적 요인은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전 생애를 떠받치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현재란 과거의 재생산인 동시에 집적 과정이라는 원리로 ‘나’를 스스로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제일 먼저 선취해야 할 것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으로 발원하는 만물유전의 직관력이다. 이러한 확고한 의식으로서의 지향은 현실적 존재로서의 ‘나’를 해명할 수 있는 진리를 찾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나’가 없으면 근거도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이는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내적인 터전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궁구하려는 ‘앎’의 의지를 통해 새로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과 죽음의 원환의 사변이자 박상륭 소설에 대한 연구로 귀착된다.

박상륭은 “평생 하나의 소설만을 써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 문학이라는 것과의 관계에선, 이야기의 형식 따위는 ‘기표’의 국면이라 치고, 그 내용 주제 등은 ‘기의’의 국면이라고 친다면, 한 작가가 일생을 통해 몇 편의 작품을 써왔느냐는 것이 매우 명료해질 듯하다는 것입니다. 기표는 많은 듯해도, 기의가, 전대인들의 것에서 별로 더 나아가지도, 다르지도 않다면, 그 작가는, 글을 썼다는 풍문만을 전했을 뿐, 한 편의 작품도 쓴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어떤 일련의 기표를 지키고 있되, 그 기의 면에 있어, 다각적으로 조명할 수가 있다면, 그 작가는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고 얘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와 같은 작가의 발언은 작품의 깊이를 읽어 내는 독자의 변별력과 독해력에 따라 한 편이 될 수도 있고, 여러 편으로 파생될 수도 있음을 함축한다. 환언하면 ‘기표’의 형식적 작품의 주제 의식을 새로운 담론으로 확대할 수 있는 ‘기의’의 자장으로 끌어들여 보다 심층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형식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보다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총체로서의 ‘기표’는 작품의 근간을 떠받치는 본체이므로, 근본적인 형식과 의미의 관계성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앞선 논의를 종합하면 박상륭의 소설은 “죽음이라는 비극에 맞선 유정을 구원할 수 있는 상극적 질서 체계를 이루는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로 문학의 존립 가능성을 사변의 논리로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즉 죽음도 하나의 방식으로 국한된 소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 속에서 ‘죽음,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상승과 하강, 생성과 소멸의 법칙이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 사유의 체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론적 고뇌가 깊어짐으로써 그 경험과 파악의 과정이 깊이 체화될 때 비로소 그 본질적 실재를 마주하고 ‘내면의 신’을 접신(接神)할 수 있는 것이다. “옴마니팟메훔*”

*옴마니팟메훔(Om Mani Padme Hūm)은 『죽음의 한 연구』(下) 마지막 문장(374면)의 표현에 해당한다. 이 종교용어는 산스크리트어 육자진언으로 ‘옴’은 날숨, ‘마니’는 보석, ‘팟메’는 연(蓮), ‘훔’은 들숨을 뜻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몸 연꽃 속에 담긴 보석’으로, 여기에서 ‘연꽃’은 여근으로서의 요니를, ‘보석’은 금강석·번개로서의 남근을 상징한다. 이른바 ‘옴마니팟메홈’은 우주의 음양의 화합을 의미하는 고차적인 어휘로 박상륭 소설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적 용어는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평론 심사평]

유성호 문학평론가
유성호 문학평론가

 

2023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이 나오지 못했고 가작이 선정되었다. 투고작을 여럿 읽으면서 심사위원은 우리 평단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적 작가로 정평이 난 박상륭의 소설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만날 수 있었다. 최근 유행 담론을 따라가지 않고 비교적 깊이 있는 작품론을 보여준 것이 꽤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오랜 숙고 끝에 박송희 씨의 「죽음,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가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비평문은 박상륭의 대표작 죽음의 한 연구에 대한 꼼꼼한 읽기와 그 결과를 불교적 사유로 녹여낸 측면이 높이 평가되었다. 더불어 해석과 평가 양면에서 균형 잡힌 태도를 보여주었고, 특별히 작품론이 취하기 쉬운 역사적 환원이나 서사의 요약적 나열을 뛰어넘어 작품 안팎에 나타난 작가의 종교 미학적 문양을 섬세하게 읽어낸 장점이 인정되었다. 가령 이 비평문은 삶과 죽음의 원환 구조 속에서 주인공이 궁구해가는 죽음의 구도관을 살피고, 나아가 가장 근원적인 양극의 타원형을 설계해가는 해석의 모험을 보여준 것이다. 비평가 스스로의 목소리와 문장의 개성이 아직 부족해 보여 가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정진을 바란다.

비평은 낱낱 작품의 전언과 미학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안목을 충실하게 갖추어야 한다. 작가의 사유의 결실인 각 작품의 미세한 장치들을 읽어내는 데 비평가로서의 일차적 자질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박송희 씨의 기본적 역량은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한국문학의 현재형에 대한 진단과 비판 그리고 충실한 대안 제시 같은 생산적 방향으로 이어져가기를 바란다. 수상자의 비평적 여정이 이러한 결실을 풍부하게 이루어가기를 희망해본다.

― 심사위원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입상소감]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

박송희
박송희

 

평론 입상 통보를 전달받기 바로 전날, 박상륭 선생님께서 제 꿈속에 나오셨습니다. 몽중이지만 기억은 이상할 만큼 선연했는데, 말씀의 요체는 『죽음의 한 연구』에 대한 유기체적인 가르침에 있었습니다. 즉 두 개의 상반되는 음과 양은 ‘요니’의 양극점과 맞닿아 있으므로 이를 삼라만상으로 고찰하자면, 만개한 ‘연꽃’은 나의 육신에 기거한다는 이치입니다. 그것이 박상륭 선생님께서 갈파하셨던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로 체득되는 ‘앎’의 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제가 일평생 궁구해도 그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이 상은 평생 읽고 쓰며 내 안의 우주를 밝히라는 박상륭 선생님의 깊은 뜻일 것입니다.

이 순간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은 오래전 하늘의 넋으로 상천하신 아버지십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기리며 딸로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때마침 신춘문예 원고를 보낸 나흘 후가 기일이었기에 아버지가 계신 사찰에서 절을 하고 왔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누구보다 기뻐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이내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가 계십니다. 홀로 마른 눈물을 훔치시며 일평생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셨던 어머니의 헌신으로 이런 감격스러운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늦은 나이까지 학업에 매진하는 저를 항상 격려해주는 내 평생의 반려자이자 뮤즈 호균 씨 늘 고맙습니다. 입상 소식을 전하자마자 환호성을 터트리던 당신의 고운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내 심장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첫째 딸 효림이, 둘째 딸 채림이가 없었다면 현재의 저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가 상을 탄다는 소식에 박수를 치던 두 딸의 꽃 같은 미소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에서 배움의 길로 인도해주신 존경하는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자를 이끌어주심에 가까스로 이 자리까지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절절한 마음을 하늘에 올려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한국불교신문에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 1982년 경기 성남 출생
- 현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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