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중흥사 주지 맡아 중창과 더불어 태고사 창건
33회-원나라 무극 스님과의 법거량
백운암에서 보우 스님은 마지막 번뇌까지도 완전히 여읜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렀고, 조주 선사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참선한 끝에 자나 깨나, 일어서나 앉으나 일여(一如)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생사의 관문을 부수고 태곳적부터 불어온 맑은 바람을 맞을 수 있었다.
기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우 스님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라는 화두에서 막혀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갇힌 상태였다. 암두밀계처는 덕산탁발(德山托鉢)에서 유래한 화두이다. 하루는 덕산 스님이 공양을 하려고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가는데, 설봉 스님이 “노장님은 아직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덕산 스님은 고개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설봉 스님이 암두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니 암두 스님이 “시원찮은 노인네 같으니. 말후구(末後句)도 몰랐구먼.”이라고 조소하였다. 덕산 스님이 이 말을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 스님을 불러 “나를 험담했느냐?”를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암두 스님이 덕산 스님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이튿날 덕산 스님이 법문을 하는데 전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암두 스님은 웃은 뒤 “노장이 이제 말후구를 알았구나.”라고 말했다. 말후구는 마지막에 하는 말 즉, 가장 궁극적인 진리가 담긴 말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암두 스님이 덕산 스님에게 귓속말로 전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암두밀계처인 것이다.
은산철벽을 깨부수고 나와 태고의 바람을 맞고 나니 보우 스님은 절로 “암두가 활은 잘 쏘지만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구나. 말후구를 아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혼잣말을 읊을 수 있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화두를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계속돼 온 화두 공부가 드디어 결실(結實)을 맺은 것이었다.
일대사의 본분을 마친 보우 스님은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던 중 낯선 스님이 백운암을 찾아왔다. 외모부터 고려사람과는 달랐던 원나라 출신 무극(無極)스님은 보우 스님을 보자마자 단박에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사(禪師)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보우 스님은 낯선 외모의 스님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다탁 앞에 마주 앉았다.
보우 스님은 원나라 말이 서툴렀고, 무극 스님은 고려말이 서툴렀다. 하지만 선사들의 거량(擧揚)은 두 손뼉이 마주쳐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만큼이 간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 스님 사이에 뺑뺑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가 보우 스님이 찻물을 끓이고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손짓만으로도 소리 앞의 한 소리(聲前一句)와 소리 뒤의 한 소리(聲後一句)를 펼쳐 보이니 무극 스님은 허공 속에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환영을 보았다. 무극 스님은 보우 스님이 말없이 펼쳐 보인 법이 임제 선사의 가르침인 무위진인(無位眞人) 즉, 차별 없는 참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간파했다. 임제 선사는 “이 빨간 몸뚱이 안에 한 차별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항상 우리의 눈, 귀, 코, 입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살피지 못한 이들은 살펴보아라.”라고 역설했다. 하여 무극 스님은 “중국에는 임제(臨濟)의 정통 종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가서 인가(認可)를 받으십시오.”라고 말했다. 무극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보우 스님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보우 스님은 중국의 강남지역에 임제종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맥(禪脈)은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이었다. 깨달음의 등불은 스승에서 제자로 전등(傳燈)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신라시대에 당으로 건너가 남종선(南宗禪)의 법맥을 받아온 고승들이 개창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기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고려가 들어서면서 선문만 남고 법맥은 끊겨버리게 되었다. 보우 스님은 중국에 가서 오후인가(悟後認可)를 받아 끊긴 고려의 법맥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 나라의 선맥(禪脈)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소?”
“임제선사의 직계가 설암(雪巖)스님이고, 그 적손이 석옥(石屋) 청공(淸珙)입니다. 석옥청공 스님이야말로 본분종사(本分宗師)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우 스님이 물었고, 무극 스님이 답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무극 스님은 바랑을 짊어지고 산길을 내려갔다. 무극 스님이 떠난 뒤 보우 스님은 어떻게 원나라고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권세가인 채하중(蔡河中)과 김문귀(金文貴)이 백운암을 찾아왔다. 채하중과 김문귀는 원나라에 팔려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라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기황후(杞皇后)를 추종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런 까닭에 훗날 공민왕의 자주정책을 반대하기도 했다.
채하중과 김문귀는 보우 스님을 보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렸다. 채하중과 김문귀가 백운암을 찾은 이유는 보우 스님을 중흥사(重興寺)에 모시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흥사는 사세가 기울어 폐사 위기에 놓여 있었다. 보우 스님은 원나라로 가서 석옥청공 스님에게 인가를 받는 일을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41세가 된 보우 스님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중흥사로 가서 주지 소임을 맡았다. 보우 스님이 중흥사 주지를 맡은 이유는 후학들을 지도해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대각(大覺)을 이룬 스님이 왔다는 소문을 들은 덕양(현재 고양시) 지역의 부호, 일반 신도들까지 시주해 중흥사를 중창했다. 1341년(충혜왕 복위2) 보우 스님이 홀로 주석하며 수행할 암자도 창건됐는데, 창건 당시 이 암자의 이름은 동암(東庵)이었다. 보우 스님이 입적한 뒤에는 태고암(太古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태고암은 폐사되다시피 했으나, 조선 숙종 대(代)에 중건돼 태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고사는 북한산성에 세워진 십여 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 중 하나이다. 승영사찰이란 승군이 주둔하며 산성을 수비하고 성곽을 관리했던 사찰을 일컫는다.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을 지휘하는 수사찰의 역할은 중흥사가 맡았으며, 중흥사에는 승군 최고직인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 머물렀다. 숙종이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한 성능(聖能) 스님은 30여 칸에 불과하던 중흥사를 중수해 136칸에 달하는 대찰로 만들었으며, 태고암 자리에 사찰을 중건했다. 중건 뒤 성능 스님은 ‘태고(太古)’라고 쓴 편액을 걸어 보우국사를 기렸다. 이처럼 동암에서 태고암으로, 태고암에서 태고사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태고암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보우 스님은 중흥사에 선원을 개원하고 제자들을 받았다. 보우 스님이 선원을 열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의 많은 청풍납자(淸風衲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만수선원의 규칙은 엄격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는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따라 학인스님들이 밭을 일궈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했다. 학인스님들의 화두 참구를 점검하는 한편 《금강경(金剛經)》 《반야경(般若經)》, 《원각경(圓覺經)》을 강설하기도 했다. 중흥사 주지로 재임할 때 보우 스님은 찬영(粲英)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훗날 찬영 스님은 공민왕의 왕사 역할을 했다.
중흥사에서 보우 스님은 후학들에게 수행의 지남이 되고자 〈참선명〉을 남겼다.
해와 달은 마치 번갯불 같으니
실로 세월을 아껴야 하느니라.
삶과 죽음은 호흡 사이에 있으니
아침과 저녁을 보장하기 어렵다.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 치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정진에 용맹정진을 더하여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수행하라.
정진하고 또 정진하되
마음을 고요히한 가운데 또렷하게 하여
부처님과 조사의 뜻을 깊이 믿고
모름지기 분명히 판단해야 한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니
왜 힘들게 밖에서 찾고 있는가?
모든 일을 다 놓아버리면
길이 다하고 철벽처럼 단단해지리라.
쓸데없는 생각이 모두 다 없어지고
없어졌다는 생각마저 지워버리면
몸과 마음이 허공에 기댄 듯하여
고요한 광명이 빛나리라.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되물어
화살이 순식간에 돌을 꿰뚫듯 하면
의심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큰마음이 하늘을 덮어 푸르리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