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태고세미나 한중국제학술대회】수많은 차별상 설정, 다시 이를 융섭하는 사상 표방
14세기 고려후기의 불교사상과 한·중 불교문화교류②
3. 선종의 동향과 사상
13세기 선종은 수선사(修禪寺)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는데, 지눌(知訥)과 혜심(慧諶) 이후 무신정권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제4대 혼원과 제5대 천영이 차례로 주석하면서 수선사는 불교계의 중심에 있었다. 선종계의 수선사는 지눌의 저술 이외 《육조법보단경》, 《정법안장》, 《종경촬요》, 《선종송고련주집》등을 간행하였고, 특히 굴산문 담진 이래 송나라에서 신경향의 선종을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구산선문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자산문과 법안종의 전통을 가진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사 지겸(志謙)은 《종문원상집》과 《조동오위》를 간행하였다. 이 시기는 고려 전통 구산선문의 사자산문에서 왕사를 배출하였지만, 수선사를 중심으로 선종의 활동과 영향력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13세기 중엽에는 몽골의 침략이 있고, 이에 대응하여 《고려대장경》이 조성되었다. 선종은 분사도감(分司都監)을 통해 《조당집》, 《종경록》, 《선문삼가염송집》, 《선문염송집》, 《선종유심결》, 《선원청규》, 《종문척영집》, 《천태은사한산습득시집》, 《주심부》등을 간행하였다. 기타 수선사계에서는 지눌의 저술인 《원돈성불론》등 이외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를 간행하였는데 당시 보현행원 신앙의 유행을 알 수 있다. 기타 보환(普幻)이 1265년에 《능엄경신과》와 《수능엄경환해산보기》를 간행하여 선종의 능엄경 활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외 가지산문계 일연이 《선문염송사원》, 《중편조동오위》등, 혼구의 《중편염송사원》등이 편찬되었다.
수선사는 혜심 이후 무신정권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제4, 5세주인 혼원과 천영이 차례로 주석하면서 수선사는 불교계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 일연 계통의 가지산문이 부각되었다. 13세기 말 1282년(충렬왕 8)에 가지산문계 일연이 국존에 책봉되어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일연은 지눌의 수선사와 달리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결사불교를 전개하였고, 간화선이나 조동종의 불서를 편찬하고 간행하는 등 고려 전통의 선종과 새로운 불교 동향을 포용하였다. 특히 일연은 원 간섭기의 시대상황 하에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불교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편찬하여 고려 불교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기록하였다.
고려후기 선종계는 앞서 살펴본 13세기 《선문염송집》등 선적을 통한 선종 이해 경향과는 달리 이 시기 불교는 선사상, 특히 그 방법론으로 간화선이 주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몽산덕이(蒙山德異)-고봉원묘(高峯原妙)-중봉명본(中峰明本)의 법맥과 이들이 편찬하고 간행한 선적이 수용되어 활용되었는데, 몽산덕이의 《몽산법어》, 고봉원묘의 《선요》등과 같은 간화선 관련 전적이 수용되고 간행되었다. 또한 선종의 규범서인 《칙수백장청규》와 입문자를 위한 《치문경훈》의 수용도 확인된다. 특히 몽산과의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몽산덕이가 편찬하거나 간행을 주관한 《육조단경》, 《불조삼경》 등이 수입되어 간행되었다. 이상과 같이 고려 선종은 《몽산법어》나 《선요》 등을 통해 간화선 수행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4세기 고려 후기 선종을 대표하는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등이 대혜종고(大慧宗杲)가 제시한 간화선을 계승하였으며 《몽산법어》나 《선요》의 화두 수행론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선종 사상은 고려시대 교선교섭사상의 전통 위에 전개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고 보우는 1326년(충숙왕 13)에 화엄선에 합격하고 경전을 두루 연구하였는데, 특히 선 수행과 함께 화엄사상에도 관심을 두었다. 태고는 1346년(충목왕 2)에 연도(燕都)에 들어가 대관사(大觀寺)에 머물렀고 반야경을 강설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축원수성(竺源水盛)을 찾았으나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과 교류한 뒤 호주 하무산의 천호암으로 가서 석옥청공(石屋淸珙)과 교류하였다. 1348년(충목왕 4년)에 귀국한 태고는 중흥사 등에 주석하였고,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에 태고를 왕사로 책봉하고 광명사에 원융부를 두어 불교계를 통할하게 하였다. 이후 홍건적의 침입으로 양산사(봉암사), 가지사 등에 주석하였지만 신돈의 대두와 함께 속리사에 유폐되었지만, 1372년(공민왕 20)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태고는 회암사에 출가하였고, 입원구법 이후 가지산문이나 희양산문 계통의 사원에 주석하였다. 가지산문의 사상경향은 선종 중심으로 교종 내의 여러 사상 즉, 화엄은 물론이거니와 유식사상까지를 융섭하려는 성격을 지녔다. 또한 희양산문의 사상경향은 유학사상까지 광범하게 유념하려는 면을 보여준다. 이런 면은 태고의 사상이 매우 다양하면서 폭넓은 융섭사상으로 성립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원증국사탑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교선교섭사상은 교종과 선종에서 모두 확인되는데, 선종은 선수행과 함께 화엄사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태고는 19세에 만법귀일의 화두를 삼구하였고, 26세에는 화엄선에 합격하고 경전을 두루 연구하였다. 즉, 태고는 선수행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교학, 특히 화엄사상에 관심을 두었다. 19세 때에는 ‘만법귀일’이라는 화두를 작성하였다. 이는 바로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위의 태고의 16구의 게송은 간결하지만 태고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부처나 조사는 물론 산하의 무수한 차별상까지도 삼켜버리거나 튼튼한 관문을 쳐부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태고는 화엄이나 유식 등 교학은 물론 선종까지를 부정하려는 뜻에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였다. 무자화두를 통해 태고는 교선의 모든 관문을 쳐부수지만, 종국적으로 청풍이 태고암에 불어오는 것을 설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든 지혜가 사라져버린 부동지(不動地)의 설정이 태고의 사상을 전개시키는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고요하여도 천 가지로 나타나고, 움직여도 한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없음이 없다하는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서리 내린 후에 국화가 더 무성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태고는 무자화두로 교선의 모두를 부정하는 속에 그것을 같이 보면서 오히려 수많은 차별상을 설정하고, 다시 이를 융섭하려는 사상경향을 표방하였다. 이상과 같이 태고의 사상은 강한 교선융섭적 성격을 지녔다. 태고는 선종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면서 화엄이나 유식의 교종사상을 융섭하고자 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에 활동한 나옹혜근은 경상도 상주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 선사에게 출가하였고, 이곳에서 백련사(白蓮社) 계통의 염불정토신앙을 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344년(충혜왕 5)에 회암사에서 주석하던 중 1348년 연도의 법원사에 나아가 지공의 문하에서 2년간 머물면서 수도하였다. 지공은 1326년(충숙왕 13)에 고려에 온 일이 있었는데, 그는 인도 불교사상의 정수를 가진 인물로 간화선 전통의 고려 불교계에 무심선(無心禪) 사상을 이식시켰다. 그는 선정의 핵심을 무행에 두었기 때문에, 태어나거나 죽는 것이 없으며 가거나 오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1350년(충정왕 2)에 나옹은 강절 지방을 순례하고 평산처림을 친견하고 인가를 받았다. 조흠으로부터 처림에게로 전해지는 양기파 사상은 천지만물이 나의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여,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주장하고 아울러 유불동원설(儒彿同源說)을 내세웠다. 1357년(공민왕 6년)에 지공을 하직하고 귀국길에 올랐으며, 1360년에 강원도의 오대산에 거주하면서 문수의 교화를 중시하기도 하였다. 1371년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로 책봉하였고, 송광사에 거주케 하였다. 그는 지공이 기별한 양주 회암사를 새로 확장하여 1376년(우왕 2년)에는 낙성법회를 베풀고 문수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는 지공이나 처림을 계승하였고, 그들의 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편, 국내의 화엄도량과 자주 연결되면서 굴산문의 전통으로 이어진 송광사에 주석하였음은 주목된다. 그 외에 그의 출가나 사상의 형성에 천태종과의 관련도 추정되는데, 공부십절을 공민왕에게 전한 신조는 천태종 소속이고, 그가 출가한 상주의 요연선사는 천태종 계통의 인물로 추정된다.
나옹의 사상경향은 고려 선종 이외 화엄사상, 문수신앙, 천태종의 전통 위에 인도의 지공, 원 임제종의 불교계와 교류하며 선종 사상을 전개한 점에서 특징적이다. 기타 태고는 물론 나옹의 문도들이 가졌던 유불동원 사상 경향은 현정론을 거쳐 《삼가귀감(三家龜鑑)》에 이르면서 완숙한 논리로 정립되었다. 이에 대한 유불교섭사상 경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향후 태고를 비롯한 인물들의 선종 사상경향에 대해서는 고려 선종의 사상 및 실천의 전통 위에 원 임제종 불교계와 교류하며 새로운 선종 사상을 전개한 점을 상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려의 교선 교섭사상이나 유불교섭사상 등 고려 선종과 원 불교계와 공통점이나 차이점 등을 밝힐 과제가 남아 있다.
한편, 고려승의 입원 활동과 관련하여 선종사원의 건축에 대해 살펴보면, 문헌을 통해 파악되는 12세기 전반의 정국안화사나 13세기 전반의 수선사와 대안사의 가람 구성에서는 송대 선종사원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상태에서 자체적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이후 13세기 말부터 고려 선승들이 중국에 가는 것이 재개되었고, 원나라에서 10년을 체류하며 활동한 나옹은 귀국 후 회암사를 중창하면서 선종사원의 가람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나옹 중창 당시 가람의 모습을 기록한 이색의 《수조기》와 유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나옹이 중창한 회암사는 중국에서 송대에 정립되어 발전해 간 선종사원의 가람제도가 고려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처음이자 마지막 선종사원이었다. 이것이 불교 교류의 관점에서 고려시대 회암사가 갖는 역사적 의의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천태종의 동향과 사상
고려 천태종은 무신집권기에는 백련결사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고, 고려후기에 접어들면서 13-14세기 초에는 개경의 묘련사와 국청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충렬왕은 개경에 묘련사를 창건하여 법화경을 염송하고 천태소를 읽으면서 그 도를 탐구하고자 창건하였다. 또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로 하는 한편 원 황제를 위한 축수도량으로 운영하였다. 충렬왕은 묘련사를 창건하고 백련사계 경의나 정오 등을 묘련사 주지로 임명하여 불교계를 재편하였다. 백련사 및 묘련사와 관련된 무외국통 정오는 법화예참의를 신찬하였고, 천태사교의 와 과주묘법연화경의 간행에 관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산긍의 ‘묘법연화경삼매참법’, 묘혜의 ‘법화삼매참조선강의’ 등이 주목된다.
《묘법연화경삼매참법》은 지자의 〈법화삼매참의〉의 내용을 요약하고 본문을 전개하였다. 이상의 삼매참의는 모두 천태지자의 법화삼매참의에 기초한 것으로 고려 전후기를 통하여 공통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묘법연화경삼매참법》은 불법과 법화경의 유통을 국왕과 군신에게 부촉하면서, 불교계의 적극적인 현실대응을 반영한 것이다.
-국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