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태고세미나 한중국제학술대회】원이 고려불교 높게 평가한 이유는 유가종 계율과 실천
14세기 고려후기의 불교사상과 한·중 불교문화교류①
Ⅰ. 서언
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 특히 고려후기의 불교사상과 문화에 있어 14세기는 선종(禪宗)의 시대로 보고 간화선(看話禪)을 중심으로 한 선사상의 유행, 메뉴얼로 제시된 선적(禪籍)의 유행, 인가 중심의 구법(求法) 등으로 확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선행연구는 고려불교의 다양성이나 고유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부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본고에서는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14세기 고려후기의 고려와 중국의 교류에 대해 상호교류라는 관점에서 고려불교의 사상과 문화교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고려불교에 대해 중국불교의 수용과 전개라는 관점이 중심이 되었지만, 본고에서는 한·중 혹은 중·한 불교의 상호교류라는 관점에서 고려불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는 13~14세기 원의 질서 아래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원나라의 새로운 문화, 사상을 맞게 되었다. 이 시기 사상적으로는 유학(儒學)의 성리학(性理學) 이외 불교사상과 문화 역시 인적, 물적 등 다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한 고려후기 불교사상과 문화교류에 대해서는 다수의 선행연구가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는 대부분 자료 소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고, 고려후기 한·중 혹은 중·한의 종합적인 관점에서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들 연구는 원나라의 문화․사상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전제로 함에 따라 고려불교의 전통과 고유성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특히 상호교류적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본고에서 다룰 내용은 13-14세기 고려후기 불교계 동향과 사상, 한·중 불교 인적 교류, 한·중 불교 문화 교류로 구분하여 검토한다. 이 시기 불교사상은 주로 원으로부터 수용한 선종을 중심으로 언급되었지만, 유가종, 화엄종, 천태종의 고려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전개되는 모습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14세기 불교계의 인적 교류와 문화 교류를 고려와 원, 원과 고려의 양 방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를 통하여 14세기 고려를 비롯한 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의 불교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고려후기 불교계 동향과 사상
1. 유가종의 동향과 사상
유가종은 현종대 국왕의 지원을 받아 종세가 진작되었고, 문종대 혜덕왕사 소현은 당의 법상종 인물인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원효(元曉)와 태현(太賢)을 비롯한 해동(海東) 6조를 설정하여 자종의 전통을 수립하면서 종세를 진작하였다. 유가종은 무신집권기 일대 침체되었지만 고려후기 충렬왕과 충숙왕대 홍진국사 혜영과 자정 미수가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원에 초청되어 연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국일대사(國一大師) 해원(海圓)이 주목된다.
유가종의 혜영(惠永, 1228~1294)은 1290년(충렬왕 16)에 국가의 명으로 사경승(寫經僧) 100명을 인솔하여 원도에 이르러 원 세조에게 금자(金字) 법화경을 헌상하였고, 경수사(慶壽寺)에 머물면서 인왕경을 강경하는 이외 1291년에는 대장경을 금자로 서사하여 조성하는 불사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1292년에는 국존으로 책봉되었고 오교도승통에 제수되어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그는 유가종사로 인왕경을 강경하는 이외 입적 직전에 화엄경 ‘십지품’을 거양하였고, 법화경 이외 대장경을 필사하여 조성하는 사업을 주관하였다. 이로 미루어 그는 유가종의 교전 이외에도 제종의 교전에 박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백의예참해(白衣禮懴解)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보타낙가산에 머무는 성백의관세음보살에 대한 귀명례문과 독송·주송·송주·10악업을 하나씩 참회하여 왕생할 것을 발원하는 참회문인 본문과 이를 간단히 술해한 것이다. 이는 유가종의 관음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는 남백월사(南白月寺)로 출가하였는데,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미륵존과 무량수불로 현신성도(現身成道)한 설화가 전하는 관음, 미륵, 미타 3존 신앙의 전통 사찰이었다. 14세기 화엄종 체원(體元)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와 함께 당시 관음신앙의 확산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후기 유가종의 한·중 교류나 교섭, 그리고 신앙이나 사상 경향은 위의 혜영에 이어 법주사 자정 미수(慈淨 彌授, 1240~1327)의 다음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미수는 충렬왕대 혜영과 함께 존숭되었는데 특히 그는 유가교관에 뛰어났다. 충렬왕이 원도에 체류시 요청한 대반야경의 〈난신해품〉과 《심지관경》의 소기를 찬술하였다.
고려전기 의천(義天)의 《교장총록(敎藏總錄)》에는 《대반야경과》, 《본생심지관경》의 장소로는 사안(士安)의 ‘소팔권’과 운보(雲普)의 ‘과삼권대과일권’이 확인될 뿐이다. 그는 법주사에 주석시 왕명에 따라 경논의 장소 92권을 편찬하였고, 1318년(충숙왕 5)에는 왕명으로 민천사의 강원에서 유가유식종 삼가의 장소를 강설하였다. 또한 그는 자비도량참법을 주해한 〈자비도량참법술해〉가 확인된다. 그의 유가교학은 고려 유가종의 교학적 전통에 기초한 유가교관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수를 이어 원도에서 활동한 자은종의 인물로는 해원을 들 수 있다. 그의 원 불교계와 교류 및 영향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해원은 1305년(원 성종 9) 안서왕의 초빙으로 입원(入元)한 이래 1340년(원 순종 6) 입적시까지 원나라 도성의 남쪽 숭은복원사에 주석하였다. 해원은 계행이 뛰어나 원 세조의 손자인 안서왕의 초청으로 그가 통할한 감숙 등 당올 지역에 주석하였다. 이 지역은 목축 지역으로 고기가 주식이었고, 해원은 계율을 지켜 훈초와 고기를 먹지 않아 안서왕이 크게 존숭하였다고 한다. 해원이 안서왕의 통할지에 가게 된 것은 티베트 지역과도 관련이 있고 유가불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1307년 안서왕이 황제위 쟁탈에서 피살된 뒤 원도로 돌아갔고, 인종(1311~1319)이 황위에 오른 뒤 창건한 숭은복원사의 제1대사가 되어 29년을 주석하였다. 그의 본사 주석은 충선왕의 원도에서의 정치적 활동, 천태 및 유가종 승의 재원 활동과 함께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가교사라 칭해졌고 유가보살계에 기반한 높은 계행으로 존숭되었다.
이상의 13~14세기 고려후기 유가종의 교학과 실천을 정리하면 혜영, 미수, 해원의 교학은 유가교전을 중심으로 삼장에 해박하였고, 혜영은 백의예참을 주해하여 〈백의예참해〉를 저술하고, 법화경 , 인왕경 , 화엄경을 강경하였고, 사경 대장경의 조성 사업을 주관하는 등 경론에 뛰어나 해동 법상 8조의 적사라 칭송되기도 하였다. 혜영은 관음신앙 이외 미타와 미륵을 신앙하는 3존 신앙이 주목된다. 미수는 《대반야경》, 《심지관경》, 《자비도량참법집해》등 92권의 장소를 찬술한 유가교학의 대종장으로 미륵신앙이 확인된다. 해원은 유가보살계에 기반한 뛰어난 계행을 지니고 오랜 기간 경전의 강경을 행한 유가교사였지만 저술이나 교학은 분명치 않다. 이상의 유가종 3사는 모두 계율의 엄격한 지계와 참회에 기반한 신앙과 실천을 전개한 점은 공통적이다. 이러한 유가종의 계율과 실천은 원나라에서 고려 불교를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고려 불교계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참법서의 간행과 유통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고려의 유가종은 14세기에 자은종과 자은교관을 표방하며 종세를 진작하였지만 여말선초에는 침체되었다.
2. 화엄종의 동향과 사상
13세기 화엄종은 의천계가 태백산을 중심으로 지방 활동을 전개하였고, 화엄장소를 강론하고 보현행을 닦는 화엄결사가 성행하였고, 13세기 중엽 재조대장경의 조성과 함께 고려 전통의 화엄교학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화엄장소의 간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4세기 고려후기 화엄종은 화엄교학과 관련된 경전이나 장소 등 불서 간행과 유통은 잘 찾아지지 않고, 불교의례나 관음신앙을 중시하는 경향이 대두했다. 14세기 해인사에서 활동한 체원을 통해 신앙이나 사상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체원은 1328년(충숙왕 16)에 《백화도량발원문약해》를 찬술하였는데, 본서는 의상이 락산 관음을 친견하고 지었다는 〈백화도량발원문〉에 대한 해설을 모은 집해서로 화엄경의 관음상주 신앙과 법화경의 현실 구제 신앙을 융합한 것이었다. 체원은 1331년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와 〈화엄경관음지식품〉을 편찬하였다. 양서는 구도와 중생의 고난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공덕과 귀의를 강조하고 있다. 체원이 본서를 찬술한 것은 독실한 관음신자인 가형 인원의 요구에 대응한 것이지만, 40권 화엄경에 대해 징관(澄觀)의 장소 및 과문을 활용하여 주해할 정도로 화엄교학에 해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 본서의 교감에는 의천의 적사 무애지국사 계응이 주석하고 그의 문도들이 활동한 각화사의 주지 성지(性之)가 담당하였는데 그 역시 이를 교감할 정도로 화엄교학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후기 화엄종은 관음신앙 유행 이외 이를 집해하고 교감할 수 있는 화엄장소가 갖추어져 있었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화엄교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해인사 체원의 가형인 인원의 소속 종파는 미상이지만 그는 관음을 독신하였는데, 1331년 12월에는 제불 보살을 예념하는 《삼십팔분공덕소경》을 간행하였다. 이 경전에 체원은 동원자로 제기(題記)를 썼다. 본서는 영관(靈官) 및 여러 고류(苦類)를 위해 대신하여 불·보살을 예념하는 공덕과 영험을 통해 정토에서 견불하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화엄종 해인사 체원이나 인원은 화엄교학을 중심으로 관음이나 제불보살의 염불 공덕과 영험 신앙을 갖춘 것으로 이해된다. 14세기 전반기 화엄종은 고려전기 화엄교학의 전통 위에 공덕과 영험 신앙을 결합하며 전개되었다. 다만 체원이나 인원이 편찬하고 간행한 위의 불서는 원 황실에 대한 축수(祝壽)를 표방하지 않았고, 《공덕소경》에서 ‘수군복국 성도중생(壽君福國 成道濟生)’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별행소는 40권 화엄경 가운데 관음법문을 통해 관음신앙의 교학적 내용을 정리하고 영험을 통한 실천신앙을 강조하였다. 약해(略解)는 의상을 통해 실천신앙의 예를 구한 것이었고, 〈지식품〉은 지송용으로 실천신앙과 관련이 있다. 《공덕소경》은 위경으로 영험과 공덕을 강조하였는데 기층사회의 독자적인 형태의 전통적 민간신앙을 화엄종의 염불신앙에 수용 또는 결합을 의도한 측면이 있다. 이렇듯 고려후기 화엄종은 전통 화엄교학을 기반으로 영험과 공덕신앙을 갖추며 현실에 대처하였다.
-국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