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락의 목탁소리】 ‘중도’와 ‘중용’
두어 주 전 강원도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개최된 한 불교 문학단체의 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중도사상과 문학’이라는 큰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 분야 전문가들의 발표는 알차고 유익했다.
‘중도’라는 개념은 불교에서 인도 승려 용수(龍樹)가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논의가 복잡해지고 여기는 그런 자리가 아니므로 범박하게 정리해서 양극단(兩邊)은 피하고 중간의 입장이라는 정도라고 해두자. 논자에 따라 중도를 3법인과 4성제 8정도 12연기를 관통하는 부처의 근본 가르침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사회정치적 실천을 담지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는 사성제의 3전 12행이 중도라고 주장하면서 치우침이 없는 올바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한국에서는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이 ‘변혁적 중도주의’(2008)라는 개념을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변혁은 혁명도 아니고 개혁도 아닌 남북 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태도로 중도에 대한 열린 태도를 지향하는 게 중도주의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동양에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중용, 불교의 중도(中道)를 비롯해 다양한 정신적 실천적 영역이 존재해 왔다. 중도란 한마디로 말해 양극단을 피하고 균형과 절제, 낡은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난 새롭고 창의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편에 쉽게 귀속되지 못하는 그 엉거주춤한 태도 때문에 경우에 따라 무관심이나 기회주의적 태도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양극단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는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보면 중도나 중용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이념은 시대나 상황, 혹은 장소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중도, 중용의 척도를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중도의 범주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의제를 두고 강경파 속에서의 중도의 위치와 온건파 속에서의 중도의 위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사를 보면 해방공간에서 중도통합론, 남북합작론 같은 정치적 중도, 중용을 지향했던 여운형 김구 김규식 안재홍 같은 중도파들은 좌⸳우 양극단세력에 의해 테러로 제거됐다. 그 결과 남쪽에는 이승만 정부, 북쪽에는 김일성 정부가 수립됐고 남북은 분단됐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당시 중도파들이 정적에 의해 암살로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됐을까?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 온전한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했을까? 새삼 궁금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E.H. 카)라고 하고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를 성찰하고 배워서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세계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다 됐다. 훼손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어려운 경제를 회복시켜 민생을 안정시켜야 할 때이다. 그런데 이런 국민의 기대와 달리 연일 나라가 시끄럽다. 국민은 우려의 눈길로 주시하고 있다. 정치세력이 너무 양극단으로 나간 것이다. 과유불급이 도처에 눈에 띈다. 소위 ‘태극기’와 ‘개딸’의 준동이 심각하다. 거기다가 극우 극좌성향의 유튜브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그 배후에는 돈이 있다. 구독자와 조횟수, 댓글에 따라 돈벌이가 증감된다. 현대인이 숭배하는 돈과 기계문명 때문에 발생한 총체적 난국이다.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칼 폴라니)이다. 모든 것을 삼켜 갈아버린다는 표현처럼 윤리도 이성도 생명도 공동체의 희망도 모조리 삼켜버리는 야만의 시대를 연출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 유학에서 말하는 ‘중용’의 정신이 요구된다. 이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아스팔트처럼 굳어버린 기성의 낡은 이념적 편견을 부수고 창의적인 열린 사유로 우리사회의 새로운 공공선을 창조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시인ㆍ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