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락의 목탁소리】이 가을에 생각나는 보살(菩薩)의 말씀

2025-09-15     김용락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릴케 ‘가을날’ 구기성 번역)

 

가을이면 누구나가 한 번쯤 되새기는 시다. 가을의 무르익은 풍요와 그 감미로움 속에서도 집을 갖지 못하고 홀로 이 지상에 머물면서 독서를 하고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쓰고 굴러다니는 나뭇잎처럼 가로수 길을 헤매고 방황하는 인간 본연의 고독을 노래하는, 그 고독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예술을 실현하고 인격의 완성을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라는 구절은 노년으로 달려가고 있는 내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이 가을을 맞이하면서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나는 마치 글 채귀(債鬼)와 같이 마감을 넘긴 청탁원고 독촉의 중압감을 애써 눈감으며 오랜 인연이 있는 한 지인의 집 구하기 행보에 운전보조자로 따라나섰다. 그분은 80대 중반의 노인이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산 지가 30년이 넘었다. 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그는 고독하고 외로운 극빈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1급 기초 수급자이다. 심한 정신적 질병도 갖고 있다. 지팡이를 사용하지만 보행이 매우 불편하다. 추레한 의복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노숙자 대하듯 피한다. 그는 LH(주택공사)에서 제공하는 무보증금 임대주택 입주대상자이다.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계급여와 주거급여 동시 수급자라야 한다. 그는 무보증금 임대주택을 얻기 위해 도시 변두리에 산재한 주택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 그 가운데 조건이 맞는 한 곳을 선택해 지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면 기관에서는 지원자의 나이, 기초수급등급, 질병유무, 동거인 수, 그 지역에 얼마나 오래 거주했는지 등 몇 가지 요인을 검토한 후 주택을 배정한다. 주택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작은 룸(방)인데 경쟁자가 많으면 가장 적합한 조건의 한 사람만 선정되고 나머지는 떨어진다. 그러면 다음 기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론 다음이라고 반드시 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지금 집 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주소를 들고 이 골목 저 골목 찾아다니면서 이른 오후까지 몇 채의 집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여러 명 만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남녀 중년들, 젊은 여성들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빈곤이 부끄러운지 애써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기도 하고 어떤 방문객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서로 누가 어떤 집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당국에서 입주희망자를 한곳에 모아서 공개적으로 조정한다면 심사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없고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입주자들의 신원이나 정보가 노출돼 범죄에 악용될 수도 있다고 한다.
누구나 알듯이 인간에게 주거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공간이 그 환경에서 사는 주체의 세계관이나 가치를 결정적으로 형성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밀실의 사고(思考)와 광장의 사고’도 같은 맥락의 경구라 할 수 있다. 이 지상에 와서 평생 방 한 칸 없이 살다가 죽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수백, 수천 채의 집을 가지고 살다가 죽는 부자도 있다.

부처님께서 일찌기 탐⸳진⸳치(貪瞋癡 탐욕, 분노, 어리석음) 삼독(三毒)이 중생을 고통에 빠트리고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된다고 했다. 불교 최초의 경전 ‘숫타니파타’에는 “뱀의 머리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처럼, 모든 욕망을 피하는 사람은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고 이 세상의 집착을 넘어서게 된다(법정 번역)”고 갈파했다. 필요 이상 더 가지는 게 탐욕이다. ‘몽실언니’ 작가 권정생 선생은 “고루고루 잘 살려면 많이 벌어서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적게 갖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라고 말했다. 보살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