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스님의 동화로 읽는 화엄경 이야기】기다림과 자비로 미래 세계 희망의 씨앗 품다
51. 미륵보살과 선재 동자
선재 동자는 보리를 데리고 남쪽 해안국 대장엄 동산 가운데 비로자나 장엄장 누각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미륵 보살님을 친견하였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흐느끼며 미륵 보살의 주변을 한없이 돌았다. 보리도 뭔지 모를 벅찬 감동에 같이 합장하며 울었다.
미륵보살이 선재 동자의 이마를 만지면서 수기를 내려 주었다.
“착하고 착한 선재야. 몸과 마음을 다스려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였으니 머지않은 날에 모든 공덕과 보살도를 갖추어 나나 문수 보살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도량에 모인 모든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 어지신 이들이여, 이 장자의 아들이 나에게 보살의 행과 자비 공덕을 묻는 것을 보았는가? 그간 50여 선지식을 만나 보살행으로 중생을 구호하고, 보리심을 내어 쉬지 않고 보살도를 닦기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선지식을 섬기기에 고달픈 줄도 모르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여 행하되 잠깐도 어기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동생 보리도 잘 데리고 수행하며 가르친 것을 높이 칭찬하노라.”
미륵 보살의 말에 선재는 잠깐 동안 마음을 정리하여 지나온 날을 돌아보았다. 지혜로운 스님들과 스승들, 자비로운 보살님들 심지어 환희와 장엄으로 가득한 천신들의 세계까지 몸소 체험하며 보살행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엔 의문이 남았다. 선재 동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가르침과 배움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진정한 보살행의 근원은 어디까지일까? 답은 나와 있어 다 알 것 같은 데 도무지 손에 딱 잡히지 않네….”
그때 미륵 보살이 선재 동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선재 동자야, 그대의 정진수행은 참으로 장하도다. 그러나 아직도 그대는 형상에 머물러 있구나.”
마륵 보살이 손을 들어 하늘에다 그림을 그리듯 지금까지 선재 동자가 만났던 50 여명의 선지식인 들을 하나, 둘 나타내 보여주었다. 선재 동자는 그들이 가르쳐 주었던 모든 말씀이 허공중에 웅장하게 떠오르며 그의 마음을 감싸 안았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올 지경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답답했다. 그는 다시 중얼 거렸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본받을 점이 많았던 선지식들의 가르침이 다 옳은데 왜 나는 자꾸 욕심이 생기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가….”
미륵 보살은 그런 선재 동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키자 놀랍게도 그 모든 모습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지혜의 선지식인도, 자비의 보살들도, 화려한 천신의 장엄도 차례차례 빛을 잃고,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텅 빈 공간만 남았다.
선재 동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뻗어 보았으나 모든 것은 흔적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선재 동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토록 마음에 새기고 소중히 붙잡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미륵 보살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재야. 그대가 여태 배웠던 것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형상에 머무른다면 헛된 집착이 될 뿐이지. 지혜도 자비도 장엄도 본래는 무(無)요, 공(空) 이다. 하지만 네가 가르침을 좇아 보살행을 구하고, 보살도를 닦으려 했던 서원과 행동은 허망하지 않다. 그것이 불망염지요, 세세생생을 장엄히 채우는 참된 보배이니라.”
선재 동자는 허공 속에 남은 고요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배움은 형상을 빌려왔으나 참된 길은 무(無) 속에 남아 있었네요. 저는 앞으로 모든 형상은 놓고, 다만 보살행의 원만한 도를 따르고 길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미륵 보살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허공의 흩어진 자취 속에서 홀연히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 선재 동자와 보리의 길을 비추어 주었다.
그동안 미륵 보살의 위엄에 입도 못 떼던 보리가 선재 동자의 팔을 붙잡고 구석으로 가며 물었다.
“오빠, 저 미륵 보살님은 뭐 하는 분이야?”
선재 동자는 보리의 엉뚱한 질문에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띵해져 왔다. 그는 잠깐 보리를 혼자 둔 것이 미안해 보리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저분은 미래의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으신 분으로, 앞으로 오십육억 칠 천만년 뒤에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큰 원을 세우신 분이란다. 그래서 지금은 보살님으로 계시지.”
그 말에 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뭐어? 오십육억 칠 천만년?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죽고 죽고, 또 죽고, 또 죽어도 칠 천만년 되지 않는데 오십육 어억? 아이고 머리야! 그 세월을 어떻게 기다려? 그리고 마정수기는 또 뭐야?”
보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더니 절레절레 도리질을 친다.
선재 동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마정수기는 부처님이 수행자들에게 이마를 어루만지며 성불하기를 인정하는 의식이야. 다 같이 부처님이 되라고. 미륵보살님은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내세에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 부처님 열반 후에 그러니까 대원을 세우신 거야, 우리에게는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신 거지….”
“뭐어? 희망의 씨앗?”
선재 동자가 보리의 눈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기다림의 씨앗’이라는 이야기인데, 옛날 어떤 마을에 부처님이 사라지셨데. 동네 사람들이 이제 누가 우리를 구제해 주겠는가? 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미륵 보살님이 짠, 하고 나타나 사람들에게 작은 씨앗을 나눠주었대. 근데 씨앗을 심고 봄이 지나,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어도 꽃과 열매가 맺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미륵보살을 찾아가 물었대. 그러자 미륵 보살이 말했대.
그 씨앗은 천년이 가도 싹을 틔우기 힘들겠지만, 너희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좋은 인연을 맺으며 변치 않는다면 그때부터 마음속에는 씨앗들이 자비와 희망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나무를 심게 될 거라고….”
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엥? 옛날이야기라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듣기는 쉬우나, 다 듣고 보니 어렵네. 그러니까 오빠 말을 잘 정리해 보면, 미륵 보살님은 우리에게 세상은 단지 먼 훗날이 아니고 기다림과 자비로 너희들 마음속에 희망의 씨앗을 싹 틔우라는 거지?”
선재 동자는 보리가 딱 부러지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음속으로 ‘아니, 이 아이가 선지식님들을 따라다니더니 몰라보게 많이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슴이 뭉클해지며 이제 보리하고도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였다.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