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락의 목탁소리】관부연락선과 일본 장생탄광
1972년에 발간된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이나 식민지 시절인 1938년에 나온 시인 임화의 《현해탄》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소설 《관부연락선》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잡지에 연재된 후 책으로 발간됐는데 연재 당시부터 시중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 동경유학생 유태림의 일제 말기와 해방 공간 사이에 걸친 복잡다단한 인생사가 소설의 중심축인데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금기였던 지리산 빨치산이라든가 사회주의 사상, 좌우익 투쟁의 편린들이 소설에 그려져 있다. 이데올로기적 금제라는 밀폐된 사상의 어항 속에 살던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이 작품을 1970년대 유신말기에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확 뜨이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시인 임화는 식민지시대 카프 사회주의 저항문학의 맹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공간에서 월북해 김일성에 의해 미제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비운의 시인인데 그는 시와 소설, 영화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친 걸출한 예술가였다. 그의 시 〈현해탄(玄海灘)〉의 한 구절인 “첫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둘째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하나도 우리 청년 아니었다.//청년은 늘/희망을 안고 건너가,/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구절은 식민지 시절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새 문명을 익히고 귀국해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청년들의 결의가 빛나는 명구절로 회자되었다.
관부연락선은 일본어 지명 시모노세키의 한자 표기인 하관(下關)과 우리나라 지명 부산(釜山)에서 각각 글자를 딴 조어인데 당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왕래한 배를 지칭하는 말이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에 일본에서 처음 출항했다. 올해로 120년이 되는 셈인데 일제의 조선과 중국, 만주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다. 이 관부연락선은 해방이 되면서 없어졌고 1965년 한일협정 이후에는 ‘부관페리호’라는 명칭으로 다시 운항하게 된다. 관부연락선이 지나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바다가 바로 현해탄인 것이다.
나는 며칠 전(6.18.) ‘무박 3일’ 배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을 다녀왔다. ‘장생탄광(長生炭鑛) 5차 방문단’이란 모임의 일원 72명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이 모임은 대구지역을 중심의 ‘장생탄광 희생자 귀향추진단’으로 지난 1942년 2월 3일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의 해저탄광이 붕괴돼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 136명과 일본인 노동자 47명이 수몰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유해를 발굴해 조선인들을 고향으로 모시고 오는 것이 목표이다. 일본 정부는 그간 이 사건을 은폐해왔고 근래 들어 일본 시민단체와 일부 한국인의 노력으로 점차 그 진상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비행기와 배를 타고 일본을 몇 차례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 배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오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배의 이등칸에서만 두 밤을 자는 고달픈 여행이었는데도 기꺼이 동참했다. 내가 탄 배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가고 오면서 현해탄을 왕복할 때는 감회가 남달랐다. 우리 집안을 보면 운 좋게 삼촌은 유학 간다고 이 배를 탔고, 오촌 아재는 징용 끌려가면서 이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유학에서 돌아온 삼촌은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일찍 병사했고 징용에서 불구자가 되어 돌아온 오촌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오래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 두 집안 어른의 삶을 보면서 인생의 희로애락과 인간 운명의 단면이 주는 문학적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나는 선창에서 현해탄의 깜깜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우선 내 집안의 내력을 생각했고, 다음으로는 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과 상처를 생각하면서 그들의 고혼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많은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시민들의 힘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시인ㆍ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