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유철의 문학산책, 그리고 사회 엿보기】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사랑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 발전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꿨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식사는 앱으로 주문하며, 회의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온라인 공간에서 진행한다. 유행은 불과 몇 주 만에 바뀌고, 직업의 개념과 형태도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이러한 변화는 물질적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간관계, 감정의 표현 방식까지 재편하여 삶의 패턴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중에서 뚜렷한 변화는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빠름과 효율에 익숙해진 사회는 감정조차 즉각적인 반응과 소비를 요구한다. 사랑은 깊이보다 속도로 평가되고, 진심보다는 표현의 기술이 중요해졌다. 만남은 몇 줄의 메시지로 시작되고, 이별은 몇 번의 터치로 끝난다. 오랜 시간과 정성이 쌓여야 가능했던 정서적 유대마저 이제는 속도와 편의라는 이름 아래 가벼워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사랑을 전한 옛시조 한 편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온다.
묏버들 갈ᄒᆡ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ᄃᆡ
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쇼서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서.
조선 선조 때, 함경도 기생 홍랑이 지은 「묏버들가」는 그녀가 흠모한 문인 고죽 최경창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한 줌의 버들가지에 담아 조용히 전한다.
1573년 가을, 붕당 정치의 희생양으로 북평사에 임명되어 함경도로 향하던 고죽은 부임 축하연에서 홍랑과 인연을 맺는다. 평소 고죽의 시를 즐겨 읊으며 마음으로 그를 흠모하던 그녀는 ‘방직기(房直妓)’에 자원해 경성의 군막까지 그를 따랐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이듬해 봄, 조정의 부름으로 고죽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은 첫 이별을 맞는다. 홍랑은 경성에서 1,300리 떨어진 쌍성까지 고죽을 배웅했고, 나라에서 정한 양계(兩界)의 금령으로 고갯마루에서 작별을 고했다. 그때, 그녀가 산버들을 꺾어 시조 한 수를 보태 고죽에게 전한 작품이 「묏버들가」이다. 홍랑은 고죽에게 사랑의 징표인 묏버들을 건네며, “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시길 애원했다. 이는 고죽의 정실을 배려하면서도 그의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담긴 고백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거리와 신분의 장벽,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랑이 오롯이 녹아 있다. 그것이 이 시조를 단순한 연정가가 아닌 시대적 현실을 넘어선 사랑의 상징으로 남게 했다.
2년 후, 고죽이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도계를 넘어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향했고, 그의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 그의 건강은 곧 회복됐지만, 국상 기간 중 함경도 관기를 첩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두 사람은 다시 이별을 맞았다.
이후, 고죽은 복직되어 한직을 전전하다 1582년 종성부사로 부임하여 홍랑과 재회했고, 그녀는 고죽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봄, 고죽이 성균관 직강으로 발령되어 상경하던 길에 객관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홍랑은 고죽의 시신을 수습해 해주 최씨 문중에 인계하고, 그의 무덤 곁에서 9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녀는 외부의 접근을 막고자 남장 차림을 하고 얼굴에 자상을 냈으며, 숯으로 목구멍을 막아 벙어리가 되면서까지 고죽을 품었다. 심지어 홍랑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죽의 유작을 지키기 위해 피난길에 올랐다.
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홍랑은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 유작 200여 편을 전달한 후 고죽의 묘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고죽과 “함께 묻히고 싶다”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1969년 해주 최씨 집안에서는 문중 회의를 거쳐 그녀의 무덤을 고죽 부부 합장묘 아래 마련하고, ‘시인홍랑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이제는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린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 홍랑이 묏버들에 담아 보낸 그 한 줌의 마음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조용히 일러준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