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두 팔 들어 하늘 나는 시늉하며 말 울음까지
소설 태고 20.-동안거 해제 때 법거량을 나누다
언젠가부터 보허 스님은 ‘관시하인(觀是何人) 심시하물(心是何物)’을 자신만의 화두로 삼게 되었다. 자나 깨나 이 화두를 간절하게 참구하다 보니 부처님과 역대 조사스님들이 제시한 길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고,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방장스님은 보허 스님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줬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은 먼 곳에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깨달음은 네가 있는 곳에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가난한 사람이 친구의 집을 찾았다가 만취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 친구는 볼일이 있어 외출해야 했다. 친구는 떠나기 전에 친구의 옷 주머니에 보석을 넣어주었다. 술이 취해 있던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오랜 세월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그런데 보석을 받은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말했다. 오래 전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값비싼 보석을 네 옷 주머니에 넣어줬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고생하며 살고 있구나. 내가 준 보석으로 네가 필요한 것을 모두 살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보석이 무엇인고?”
말끝에 방장스님은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허 스님은 방장스님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보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보석은 우리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보석이 무엇인고?”
“그 보석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입니다.”
“옳거니.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보석인 마음을 찾는 게 바로 수행이니라. 《화엄경》에는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 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이라는 구절이 있느니라.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경전을 읽어도 스스로 체득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체득해 실천하는 게 바로 남의 보배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길이니라.”
방장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보허 스님은 남자신의 마음에 숨겨진 불성(佛性)이라는 보물을 찾은 것 같았다.
며칠 뒤 동안거 해제였다. 아침 공양 뒤 대중들이 법당에 몰려들었고 방장스님이 법석에 올랐다. 대중스님들이 법을 청하는 뜻으로 삼배를 올리자 방장스님이 주장자를 허공에 들어보였다.
방장스님은 몇몇 스님의 법명을 부르고 안부를 물었다. 방장스님이 호명한 스님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묵언 수행을 하거나 생식을 하거나 오후불식을 하는 괴승들이었다. 방장스님은 선원에 방부를 들인 스님들의 면면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방장스님은 바닥에 주장자를 탁, 소리가 나게 내리친 뒤 입을 뗐다.
“여러분들은 안거기간 동안 왜 밤낮없이 화두를 들었습니까?”
묵언수행을 해왔던 스님이 벌떡 일어서 합장 반배한 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두 눈을 감고 있는 수좌스님을 내려다보다가 방장스님이 말을 이었다.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라고 했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방장스님의 질문에 대중 중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보허 스님은 법문하시는 방장스님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방장스님의 뒤로 일출의 햇빛 같은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방장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달마 대사의 스승인 반야다라는 한 가지 예언을 내렸습니다. 그 예언인즉슨,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간 뒤 머지않아서 천하를 짓밟아버릴 말 한 마리가 태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겁니다. 천하를 짓밟아버릴 말 한 마리가 다름 아닌 마조도일 선사입니다. 마조도일 선사는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습니다. 마조 선사는 당시 유행하던 좌선(坐禪)을 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조 스님의 수행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조 선사 앞에 나타난 게 남악회양 선사입니다. 남악회양 선사가 숫돌에다 기왓장을 갈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마조 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기왓장을 숫돌에 가십니까? 남악회양 선사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거울을 만들려고 하지. 마조 선사가 피식, 비웃은 뒤 다시 물었습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하여 기왓장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낯빛이 바뀐 남악회양 선사가 일갈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하고 있는 것은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를 흉내 내는 것이냐? 만약 좌선하는 것이라면 선은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그 자세에 장애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좌불을 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어떠한 형상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위의 법에서는 취함도, 버림도 없다. 지금 네가 하는 것이 좌불이라면 외려 부처를 죽이는 것이요, 좌선이라면 깊은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방장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보허 스님은 갈증 난 상황에서 맑은 냉수를 마신 듯 가슴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고 넘치는 기쁨을 숨길 수 없어서 보허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팔을 들어서 하늘을 나는 시늉을 했다. 보허 스님의 입에서는 말이 우는 소리가 났다. 이 모습을 보고서 방장스님이 환하게 웃었다.
“옳거니. 남악회양 선사의 말을 듣고서 마조 선사는 개오(開悟)하여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마조 선사는 강서(江西)로 가서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조 선사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에도 대중 중 그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반면 보허 스님은 망아지가 날뛰듯 두 발을 굴렀다. 이 모습을 보고서 입승스님이 보허 스님을 죽비로 내려치려고 했으나, 방장스님이 “그냥 두라”고 소리쳤다. 방장스님은 보허 스님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말없이 보허 스님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보허 스님이 법당을 빠져나가자 방장스님은 주장자를 바닥에 내려친 뒤 법문을 이어나갔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마조 선사는 도는 닦을 것이 없다. 다만 물들지 말라. 나고 죽는 마음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황벽 선사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너희 마음이 부처이다. 부처는 곧 마음이다. 마음과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다. 대중 여러분은 이 말씀을 헤아리되 이치로 헤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새봄이 되면 꽃이 피고 늦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듯이, 새봄이 되면 제비가 울고 늦가을이 되면 기러기가 울듯이 자연스럽게 그 이치를 몸에 익히십시오. 황벽 선사가《전심법요(傳心法要)》를 통해서 이르시길,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은 한 마음일 뿐, 거기에 어떤 법도 개입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마음은 생성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본래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다. 생멸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중 여러분,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얻고, 담석증을 앓는 소가 우황을 남깁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법문을 마친 뒤 방장스님은 마당을 서성거리는 보허 스님을 주장자로 가리키면서 혼잣말했다. 혼잣말이라고는 하나 대중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였다.
“이번 동안거를 통해서 울음을 그친 어린애는 보허 수좌밖에 없는 모양이군.”
이 말을 듣고서 입승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구참 수좌들의 낯빛이 붉어졌다. 울음을 그친 어린아이 이야기 역시 마조 선사의 선문답 중 하나였다. 한 제자가 “스승께서는 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마조 선사는“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울음을 그치고 나면 부처인 마음이 실제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을 알게 되고,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나면 깨달음을 실천하는 일만 남게 된다는 게 마조 선사의 가르침이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