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락의 목탁소리】열암곡에서 봄비를 맞으며

2025-03-24     김용락

 

며칠 전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재미있는 법회가 열린다고 해서 구경삼아 현장에 참석했다. 이 법회는 지난 2007년 5월 열암곡에서 발견된 앞으로 엎어져 있는 마애부처님을 바로 일으켜 세우는 입불 예식을 앞두고 서막 격으로 연 108배 기도법회였다. 마침 봄비가 내리고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서울에서부터 경향 각지에서 온 각 사찰 스님과 불자 등 4백여 대중이 모여 빗속에서 소리 내어 합창하듯이 예경문과 천수경 같은 불경을 외며 기도를 하는 모습과 마치 아카펠라와 같은 불자들의 독경 음성이 남산 자락 봄의 산협에 울려 퍼지며 메아리치는 것을 들으면서 참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행사 슬로건인 ‘천년을 세우다’는 아마 열암곡 마애부처님이 쓰러진 지 천년이 되었다는 의미일 테고, 중의적으로 해석해본다면 1천 년 전 이 땅에서 융성했던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염원도 있는 것 같았다. 열암곡 마애부처로 알려진 이 부처님은 무게가 80톤 정도이고 높이가 5.6m로 경주 남산에서는 세 번째로 큰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 연대는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조선 명종 12년(1557년) 지진으로 앞으로 쓰러지면서도 부처님의 코가 지면에 5cm의 간격을 두고 부딪치지 않아서 얼굴을 다치지 않고 잘 보존돼 흔히 5cm의 기적으로 불리는 마애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경주 남산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산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노천박물관이라 불리며 불국토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곳곳에 수많은 불상과 탑과 같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수백 개가 넘는 무너진 탑, 불상, 폐사지 등은 신라시대 불교의 융성과 당시 민중들의 불교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것뿐 아니다. 한국인의 정신적 원류이며 보석과 같은 영혼의 정수(精髓)인 신라의 향가문학도 바로 이 남산과 불교와는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에서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이라고 한다. 굳이 문학상 수상에 국적이나 남녀를 가려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만 저널리즘의 특성상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서 그렇게 쓰기도 하는가 보다. 그런데 아시아인 가운데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기탄잘리》(1912)라는 시집으로 노벨문학상(1913)을 받았다. 세계적인 명사가 된 타고르는 일본에 몇 차례 방문했다.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은 타고르에게 조선을 방문해 식민지 민중들에게 용기를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타고르가 동아일보 동경지국장에게 준 짧은 시 같은 메모가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아시아의 황금기에/그 등불지기 중 하나였던 코리아/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네./동방의 밝은 빛을 위해” (주요한 번역)

나는 이 시를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자마자 국어 수업에서 처음 들었는데, 그때 이 시구(詩句) 중에서 ‘아시아의 황금기에/그 등불지기 중 하나였던 코리아’에서 ‘코리아’는 우리 역사 가운데 어느 때를 의미할까? 를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아마 ‘신라’일 것이라고 스스로 답했던 적이 있다. 신라는 세계사에서 흔히 이상국가의 염원이라 불리는 ‘천년왕국’의 나라였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왕조가 1천 년(정확하게 992년) 지속됐다. 세계사 유례없는 일이었다. 국토는 작았지만 신비로웠고 백성들은 불심(佛心)으로 가득한 황금의 나라였으며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나라였다.

나는 이날 열암곡 마애부처님의 ‘천년을 세우다’ 법회에 쇠퇴하는 한국불교가 불같이 증흥하고, K콘텐츠와 같은 민족의 정신문화가 바로 서고, 분단된 국가와 민족이 내부적으로도 통합하고 통일되는 염원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내 작은 마음을 보태고 봄비를 맞으며 열암곡 산골짜기를 천천히 내려왔다.

-시인ㆍ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