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울력 마치고 늦은 밤에도 화두 풀고자 수행정진
소설태고 15-선수행과 울력에 대해 배우다
보허 스님은 회암사의 나날이 낯설지 않았다. 회암사에는 10여 명의 대중스님이 광지 스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해 갔다. 산사의 일상은 크게 수행과 울력으로 나눠졌으나, 선사들에게는 수행이 곧 울력이었고, 울력이 곧 수행이기도 했다.
사하촌 마을에서 수탉이 홰치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대중스님들은 깨어나서 도량석을 돌았다. 이어서 마당을 쓸고 도량을 정비했다. 가을에는 낙엽을 쓸어야 했고 겨울에는 눈을 치워야 했다. 아침을 지어 먹고 사시예불을 드리고 난 뒤에는 밭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야 했다. 울력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됐다. 저녁공양을 든 뒤에는 대중스님들이 한 데 모여 정진하였다. 일도 수행도 함께 해야 하는 대중 생활이었다.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늦가을이 되면 대중스님들이 마당에 모여서 된장과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겨울에는 지게를 짊어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녀야 했다.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일찌감치 아버지를 따라서 밭일을 해야 했던 보허 스님으로서는 울력이 어렵지 않았다. 간절하게 출가를 원했던 터라 보허 스님은 삭발한 뒤부터 굴레에서 벗어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보허 스님이 가마솥에 밥을 짓는 모습을 보고서 광지 스님이 말했다.
“보허야. 행(行), 주(住), 좌(坐), 와(臥). 걸을 때도 머무를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마음속에서는 무(無)자를 떠올려야 하느니라. 납자들에게는 수행이 곧 일이고, 일이 곧 수행이니라. 대중스님들이 깨어나자마자 마당을 청소하는 것은 마음 속 번뇌를 함께 쓸어버리기 위함이요. 대중스님들이 공양 뒤 설거지를 하는 것은 마음 속 번뇌를 함께 씻기 위함이니라. 중국의 백장 스님께서는 90세가 돼서도 다른 대중과 함께 울력을 했다. 하루는 제자들이 백장 스님의 건강을 걱정해 농기구를 감추자 백장 스님은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일일부작 일일불식’은 ‘하루 동안 일하지 않았다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말라’는 의미였다.
보허 스님은 은사인 광지 스님으로부터 선(禪) 수행과 울력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달마 대사에서 육조 혜능 선사로 이어지는 법맥으로 인해 중국에는 선 수행이 유행하게 되었다. 선 수행이 유행하면서부터 중국의 총림은 농경을 통해서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남방불교에서는 농사를 짓는 것도 계율에 어긋났다. 농사를 짓느라 농기구로 땅을 파헤칠 경우 미물(微物)을 살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재세 당시 승가 공동체는 탁발을 했다. 하지만 중국 사회에서는 어떠한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수행만 하는 것을 무위도식으로 여겼다. 게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정사(精舍)에서 수행을 했던 남방의 승가 공동체와 달리 사계(四季)의 절기가 있는 중국의 승가 공동체는 비바람을 피할 벽과 난방시설을 갖춘 요사(寮舍)가 필요했다. 궁리 끝에 중국의 승가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개차법(開遮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지범개차(持犯開遮)는 ‘작은 계를 범함으로써 큰 계를 지키는 법’이었다. 중국의 총림은 논밭을 경작하다 보니 청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백장청규였다. 중국의 총림 대중은 낮에는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좌선을 했다. 고려의 선종 사찰들도 중국 총림의 전통을 본보기로 삼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보허 스님은 은사 스님이 내려주신 무자 화두를 풀기 위해서 저녁 공양 뒤 대중과 함께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처소에 돌아와서도 밤늦도록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 했다. 하루는 처소에서 수행을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보니 광지 스님이었다. 광지 스님이 물었다.
“수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느냐?”
은사 스님의 물음에 보허 스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간혹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가 있습니다.”
머리가 아픈 이유를 알고 있는지 광지 스님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기병(上氣病)이다. 육조 혜능 선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기만 하는 것을 좌착(坐着)이라고 경계했느니라. 수행하다가 머리가 아프거든 앉아 있지 말고 마당에 나가서 걷거나 다른 일을 해라. 선대의 조사님들은 묵조선의 병폐를 잘 알고 있었다. 묵조선은 묵묵히 앉아서 본래 청정한 자성(自性)을 관하는 수행이다. 그러다 보니 화두를 놓지 않고 수행하는 간화선과 달리 수마(睡魔)에 시달리거나 상기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좌선(坐禪)과 동선(動禪)의 균형을 맞추면 절로 상기병은 사라지게 돼 있다.”
하루는 보허 스님이 사시염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광지 스님이 불러 세웠다. 보허 스님이 두 손 모아 합장을 하자 광지 스님이 목련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열반에 이르는 길이 바로 계(戒), 정(定), 혜(慧) 3학이다. 계는 바른 도덕이고, 정은 바른 수행이고, 혜는 바른 지혜이다. 계와 정을 닦을 때만이 혜가 생기느니라. 염불도 수행의 일환임을 잊지 말거라.”
보허 스님은 은사스님으로부터 선 수행에도 다섯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도선(外道禪)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려고 닦는 수행이고, 범부선(凡夫禪)은 인과(因果)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시비의 분별을 지닌 채 닦는 수행이고, 소승선(小乘禪)은 자신은 공하지만 법은 실재한다는 생각에 닦는 수행이고, 대승선(大乘禪)은 자신과 법이 모두 공하다는 생각에 닦는 수행이고,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므로 애초 번뇌가 없다는 생각에 닦는 수행이다. 광지 스님은 “최상승선을 수행할 때만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선 수행을 하면서 보허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 난관이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첫 번째 난관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눈을 뜬 채로 화두를 들어야 했다. 두 번째 난관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화두에 집중해야 했다. 세 번째 난관은 의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은사 스님은 “의심과 의심하는 자신이 하나가 되는 순간 불현듯 화두가 풀리게 된다.”고 역설했지만, 초보 단계인 보허 스님으로서는 그 가르침이 머리로만 이해될 뿐이었다.
천보산 회암사로 출가한 뒤 1년이 지났을 무렵 보허 스님은 은사 스님을 찾아갔다. 광지 스님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보허 스님은 은사 스님께 삼배를 올린 뒤 입을 뗐다.
“혜가 스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하자 달마대사는 ‘불편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혜가 스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편안하다는 생각도, 불편하다는 생각도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심(無心)할 때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허 스님의 말에 광지 스님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네 말이 맞다. 마음속에 망상이 없는 게 무심이고, 선 수행은 망상을 없애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내가 네게 한 가지 묻겠다. 한 수좌가 마조 스님에게 찾아가 법을 물었다. 그러자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마당에 원을 하나 그렸다. 원 안으로 들어가도 때리고 안 들어가도 때린다. 일러봐라.”
보허 스님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보허 스님에게 광지 스님이 말했다.
“마조 스님의 가르침은 출구와 입구를 동시에 막아버리는 것이자 출구와 입구를 동시에 열어버린 것이다. 분별심(分別心)이나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서는 공안을 타파(打破)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달마 대사의 《혈맥론(血脈論)》에는 ‘불급심사(不急尋師) 공과일생(空過一生)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 만중희유(萬中希有)’이라는 구절이 있느니라.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게 된다.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중 한 사람도 없다’는 의미이니라. 삿된 스승에게서 배우면 아무리 잠을 안자고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도 삿된 소견에 떨어질 수밖에는 없다. 1년 동안 내게서는 배울 만큼 배웠으니 너는 활구(活句)를 얻기 위해서 더 멀리 나아가도록 해라. 내가 추천서를 써줄 테니 가지산의 총림에 가서 방장을 뵙고 달마 대사가 서역에서 가져온 한 물건이 무엇인지 묻도록 해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