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사바 이야기】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2024-12-27 손택수
황지우(1952~ )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해가 수평선 쪽으로 낮아지면서 바다가 더 빛난다는 것은 관찰과 통찰이 동시에 이루어진 드문 예에 속한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란 다가오는 소멸의 순간들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우리 삶이 더 반짝일 수 있다는 장엄한 역설을 보여준다. 눈을 반쯤은 감고 있는 반가사유상식의 저 졸린 '옆눈'은 다가오는 정면과 스러지는 후면을 끌어안은 채 빛과 어둠이, 말과 침묵이, 소멸과 생성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또한 보여준다. 왼갖 사유를 여의고 ‘맹하게’ 서 있는 물새의 저 무념무상이야말로 우리를 위로하는 자연설법이 아닐 것인가. "해 지는 풍경처럼 아름다운 음악도 없다"고 한 작곡가 드뷔시의 말처럼 저무는 해의 연주를 향해 골똘해지면서 새해를 품는다.
-시인ㆍ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