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ㆍ채소ㆍ초충도와 함께 하는 주경야독 캘리그라피
올여름은 날씨가 여느 해 보다 더 무더웠다. 열대야가 30일이나 지속됐다. 에어컨을 돌리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점점 더 진행되는 지구 온난화라고 하니 내년에는 “작년 여름이 더 시원했다”라고 말할 것만 같다. 모두들 예언자가 된 것처럼 그런 말들을 한다. 그런데 기후 환경 위기를 극복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여름이 지금처럼 무덥지 않았던 시절에 친자연적으로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더웠던 계절이 지나고 이제 다시 입추와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성큼 지나갔다. 각종 매체에서는 가을이 더 늦게 올 것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도록 더운(?) 날씨가 연일 계속됐다. 그래도 가을이 왔다. 늦어도 꼭 오는 가을이었다. 마음으로부터 가을맞이 준비를 슬슬 시작하기 시작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추석을 준비하는 마음에 풍요로운 한가위를 꿈꾸었기 때문에 나온 말인 듯하다. 한해 농사를 짓고 풍년을 이루면 한여름 더위 속에서 열심히 흘린 자신의 땀만 생각하지 않고, 선조들은 조상들의 음덕 때문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하나 더 준비했다. 이렇게 겨레의 명절인 한가위가 지나면 긴 겨울 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 준비를 시작했다. 배추, 무, 양파, 파, 마늘, 생강에 젓갈까지. 풍부한 재료들이 한데 버무려져 우리의 대표 반찬인 ‘김치’로 탄생한다. 그런데, K-food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 김치에 들어간 이런 채소들은 단순한 식물이나 음식 재료가 아니라 우리 민속의 상징체계가 들어간 우리의 한국 문화가 집합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싶다.
우리 민화에는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인 〈초충도〉라는 그림이 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초충도〉는 단순히 풀과 벌레를 그린 것이 아니다. 가지와 오이가 나오고, 배추와 참외 그리고 맨드라미 꽃도 나온다. 제비꽃도 나오고 곡식인 조도 등장한다. 그리고 여치와 무당벌레도 나오고 개구리도 나오며 쥐 등의 동물과 곤충도 등장한다. 이 모든 것에는 우리 선조들의 정성과 기대 그리고 희망 등의 마음이 스며들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지, 오이, 수박 그림: 씨앗이 아주 많은 채소. 자손의 번성을 비는 마음
•가지는 한자로 가자(茄子)라고 쓰는데,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가자(加子)와 음이 같음
•여치나 방아깨비 같은 벌레도 알을 많이 낳음, 자손의 번성을 비는 마음
•무당벌레 같은 껍질이 단단한 갑충 그림: 과거에 장원급제하라는 의미
•맨드라미: 닭 볏처럼 생김-높은 벼슬에 오르라는 의미
•꿀벌과 개미: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의미
•제비꽃(여의초): 모든 일이 뜻대로 되라고 의미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해 겸손하라는 의미
•조(곡식) 이삭: 익어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겸손을 대신 표현
•배추: 부귀 또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통치자는 항상 백성의 얼굴이 배고픔으로 하얗게 변하고, 추위로 파란 안색이 나타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무-홍복(큰 복)의 상징
•쥐-부지런히 일해서 부자가 되라는 의미
농사에 피해를 주는 쥐조차도 그림 속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여 준 선조들의 마음이 넉넉하기만 하다. 한여름 밤의 개구리도 여치도 모두 그림으로 들어와 더위를 식혀주며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들로 바뀐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대표 소장품 ‘하피첩’의 주인공 다산 정약용도 귀양처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많은 글을 썼다. 다산에 대한 소개를 찾아보면 ‘다산은 텃밭을 중요하게 여겨, 옮겨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텃밭을 만들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다산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실천자였던 것 같다. 심지어 서울에서 벼슬을 살 때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도 채소를 가꾸고 꽃을 가꾼 다산이었다.
마당을 절반 떼어 배추를 심었는데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이 숭숭 났네
어찌하면 훈련대 앞 가꾸는 법 배워다가
파초 같은 배추잎을 볼 수가 있을까
이런 시에 화답하듯, 정조대왕은 왕들도 농사에 애써왔음을 강조했다.
비둘기 새끼 날개 퍼덕이며
어미 따라 운다.
논에 물이 가득하니
비로소 논갈이가 시작하누나
역대 제왕들은
농사의 부지런함에 힘써왔으며
보기당에서 가을 풍년을 알렸네.
장애인을 비롯한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의 문화동행교육은 여느 박물관보다도 많은 17개의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동네 문화센터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과목들 대신 국립민속박물관에서만 가능한 시그니처 수업을 개발하고 시범 운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예가이면서 도시농업(텃밭) 전문가인 양정 선생을 강사로 모시고 진행하는 <김장 채소 초충도와 함께 하는 주경야독 캘리그라피>이다.
수업은 장애인 학생들에게 김장에 들어가는 채소를 소개하고 그 채소들이 들어간 초충도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우리 박물관의 초충도를 비롯한 훌륭한 작품들을 보여주며 붓을 들고 배추와 가지를 수묵화로 그려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도 써보고 정다산의 시도 써본다. 잠시간의 휴식이 끝나면 전통문화 배움터 앞 텃밭으로 이동하여 옛 초충도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모양의 품종으로 짐작되는 토종 오이 씨앗 또는 배추 씨앗 등을 직접 심어본다. 그리고 땅을 다독이며 금방 씨앗을 넣은 곳에 물을 뿌리면서 채소가 잘 자라기를 기원한다.
출근하는 길 쑥쑥 자라나는 토종 호박과 오이 줄기들을 보며 가을이 다가오면 기대에 찬 얼굴로 우리 관을 찾을 장애인 학생들이 반갑게 그려진다.
-나마스떼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