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사바 이야기】기러기
2024-09-30 손택수
이기원(1937~1989)
오늘은 하루
하늘이
너무
높다
목수의
먹줄
겨누운
집터
금자 밑에
고웁게
떠
부연이
자문다
(《겨울 철쭉》, 도서출판 글밭, 1990)
작고하신 아동문학가 손춘익 선생의 아드님이 찾아왔다. 선친이 소장한 증정본 책들을 함부로 폐기하기가 꺼려져서 포항에서 문학관이 있는 동탄까지 책 박스를 들고 온 것이다. 몇 년째 품고 있던 책들을 이사 준비를 하면서 내어놓아야 할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서명본을 모으는 수집가에게 일부는 보내고, 일부는 주변에 나눠주고, 그래도 처치 곤란인 헌책들 사이에서 낯선 시인의 유고시집을 발견했다. 1960년대 활동을 시작해서 30년 가까운 투병생활 끝에 남긴 유일한 시집이다. 손과 발을 쓸 수 없는 희귀병을 앓던 시인은 시상이 떠오를 때면 가족들에게 대필을 시켰다. ‘자문다’는 아마도 ‘저문다’의 오기이지 않을까 싶다. 병고를 짊어졌으나 먹줄을 긋듯 ‘고웁게’ 떠 저무는 기러기의 가을이다.
-시인ㆍ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