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미】고구지(高句池)에서

2024-08-26     신승철

 

내가 태어난 곳은 남한 최북단에 있는 섬, 교동도. 여기서 난 초등학교 1년까지 지냈다. 생애 초기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각별한 인상으로 남아있고 그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헌데 내 유년엔 남달리 유별나거나 ‘충격적인‘ 그런 기억은 없지 싶다. 교동의 드넓은 벌판이 풍요처럼 펼쳐져 있는 평범한 모습. 대략 가난한 삶들이었지만 가난을 모르던 그런 유년의 기억이다. 그러나 도시로 이사를 가 십년쯤 지나보니 고향은 남다르게 느껴왔다. 남루한 초가집에 허술한 흙 담벼락, 느릿느릿 흘러가던 구름 같은 시간 속에서 보내던 고향에서의 삶이 정겨운 꿈처럼 사뭇 그리워졌다. 젊은 날 고향이란 영원한 삶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거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가 겹쳐있는 곳이란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리고 이즈음의 나이에도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난 방랑처럼 혼자 불쑥 고향을 찾아 가곤 한다.

옛적 호기심 어린 그 눈빛으로 오늘 난 천천히 고향 풍광을 음미하며 걷고 있다. 대룡리 고구지라 불리는 꽤나 큰 저수지 근처다. 유년기 이곳은 내게 막연하나마 무한의 희망을 품게 한 곳. 이 맑고 푸른 고적함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인심도 따듯했다. 이 호수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화개산이 어머니 품안처럼 둘러서있다. 저 건너 철조망 너머로는 누런 바닷물이 사시사철 조용히 찰싹거리고 있다. 그 소리는 이따금 내 사소한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주던, 하염없는 바다의 지루한 노래였다.

단조로운 시골 풍경에 피로를 느꼈던가. 걸음을 멈추고 소나무 그늘 아래 앉는다. 어린 날 저녁 무렵 난 혼자 논둑길 걷다 너무도 조용한 풍경과 마주치고는 문득 의아하지만 좀 신비롭기도 한 외로움에 휩싸였다, 언젠가는 멀리 혼자 떠나야만 한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법하다. 한 여름 밤. 별들이 무성하게 피어 빛나는 하늘꽃밭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저 광대함속에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우주는 왜, 어떻게 하여 있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궁금증은 곧 금빛 풀벌레 울음소리에 묻혀, ‘그 아이’는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어느 세월인가. 70년 전의 그 아이, 잠깐 사이에 그 아이는 어디로 떠났나. 아파도 아픔을 잘 모르던 그 아이, 두려움과 호기심속에, 사랑도, 미래도 알지 못하던 그 아이였다. 멀리 생각해 보니, 그 아이는 당시의 ‘그 모든 아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같은 아이’이기도 했다.

허나 70년이 지난 지금 ‘이 아이’는 다시 어떤 물건인가. 모습이 ‘그 아이’와 완연히 다르나 이름이 같으니 다르지 않기도 한 물건. 살피건대 옛 기억 속의 그 아이는 이미 죽은 것이고, 이 아이는 지금 여기 살아있음이니. 이 아이는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의 짐만을 지고 있을 뿐이다. 맞다. 기억이란 물질이자, 역사이고, 환幻이며, 내가 지어낸 희비극의 대본에 불과한 것임이.

보인다. 호수에 얼비친 이 아이의 모습이. 무엇이 ‘널’ 보고 있나. 주(主)가 객(客)을 보고 있나, 옛 사람이 말했다. “물위로 산이 지나간다.”고. 산하대지도, 애증도 이렇게 흔적 없이 지나감이다. 일체는 자성이 없으니 자신 앞에서 보면 모두 물속으로, 바람 속으로 스쳐지나감이다. 그리고 보는 마음의 바탕인 ‘이것’만은 일찍이 그 무엇에도 움직인 바 없고 드러난 바도 없을 터니,

-시인ㆍ블레스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