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안장-큰스님께 길을 묻는다】“마음 찾는 건 세상 이치 제대로 배우고 익히는 것”
한국불교태고종 승정 설운 대종사〈상〉
구불구불, 검푸른 빛의 감악산(紺岳山) 한 자락을 밀고 올라가자 정갈한 절 한 채가 나타났다. 기원정사(祇園精舍였다. 정확한 주소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휴암로421번길 121.
‘작은 일’이 급해서 해우소를 먼저 찾았다. 수세식 해우소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선암사 뒷간처럼 완전한 재래식이었다. 그러나 냄새 한 방울 나지 않고, 일 보는 곳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야말로 정갈함이 묻어나는 뒷간이었다.
집도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해우소의 정갈함은 설운 스님의 정갈함을 닮았다. 스님의 정갈한 모습이 해우소도 정갈하게 만들고 법당 앞뜰 잔디밭도 정갈하게 만들고 법당 안도 정갈하게 꾸며놓았다. “재래식 해우소인데도 왜 이렇게 냄새 하나 안 나고 깨끗하냐”고 여쭸더니 설운 스님은 “실제로 선암사를 떠올리며 그렇게 큰 절을 짓고 싶어서 선암사 뒷간처럼 다섯 칸짜리 재래식 화장실로 만들었다”며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환풍 장치를 잘해 놓아서 해우소 안에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스님과 마주 앉은 필자의 마음도 자연히 정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웅전에 올라가 삼배를 하고 내려온 필자와 스님과의 대화는 그렇게 정갈하게 시작되었다.
스님의 행자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스님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 벽송면 송현리.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다 5살 되던 해 6.25 전쟁을 맞았다. “그때 피난을 가기 위해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돛단배를 탄 뒤 대형 군함으로 옮겨 타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놓치는 바람에 바다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놈은 살아 있다’며 바다에서 건져 군함에 실어 올려주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요.”(그때 바닷물을 하도 많이 마시고 귓구멍으로 물이 많이 들어가 지금도 가끔씩 귀에서 물이 나오는 ‘물귀’가 되었다.) 그렇게 피난살이는 시작되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스님은 어머니와 함께 선암사 근처 마을까지 내려와 살게 되었다.
설운 스님을 절로 이끈 분은 선암사 뒤편 일출암이라는 곳에서 주석하던 은강 스님이라는 비구니 스님이었다. 은강 스님은 토굴을 짓기 위해 탁발을 계속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설운 스님의 어머니 집에 들러 몇 밤씩 묵으면서 탁발한 것을 모아두었다가 다시 탁발을 나가시곤 했다. 그러면서 은강 스님은 설운 스님의 어머니를 ‘꼬시기’ 시작했다. 공부도 못 가르칠 바에야 절에라도 보내서 공부하게 하라고. 그 인연으로 스님은 10살 때 선암사에 행자로 들어갔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행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13살이 넘을 때까지는 행자들에게 사미계를 주지 않았다. 4년 동안 새벽에 눈 뜨면 하루 종일 앉아보지도 못하고 일만 해야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스님은 말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어요. 그런데 사미계를 받고 스님이 되고 나니 온 세상이 내 것 같았지요. ‘행자야, 행자야’ 하고 부르던 보살들이 내가 승복을 입고 나자 모두들 와서 ‘스님, 스님’ 하며 큰절을 올리잖아요. 부처님 법이 그래요. 부모도 자식이 스님이 되면 와서 큰절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러나 그 환희심도 잠시 잠깐이었을 뿐. 이승만이 일곱 차례나 유시를 내려 전국의 모든 절이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되었다. 선암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암사를 수호하려는 측과 빼앗으려는 측 간에 치열한 분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행자 생활을 할 때 보다 더 힘든 상황이 계속됐다.
“재판 비용 대느라 먹을 식량까지 다 떨어져 소나무껍질을 말려 빻아 가루로 만들어서 죽을 쒀 먹을 정도였지요. 그때만 해도 어린 나이여서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독 안에 든 쥐처럼 어른 스님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열불이 나서 잠도 못 자요. 알다시피 그때는 조계종 태고종 없이 그냥 선교양종만 있었는데, 이승만의 유시 때문에 한국불교가 두 쪽으로 쪼개지게 된 것이에요.”
그 와중에 설운 스님은 회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를 한 것이다. 은사인 회암 스님은 독신으로 대쪽 같은 성격에다 3대 원칙을 강조했다.
“3대 원칙은 ‘첫째,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공부하라(독서)는 것이고, 둘째로 부지런해야 밥 먹고 산다며 자립자조(작업)를 강조하시고, 셋째로는 때아닌 때에 밥 먹지 말고 그날 밥 먹을 수 있는 일을 했는지-밥값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밥을 먹으라(식사 잘해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10살 때 선암사로 출가
4년 동안 고된 행자살이
6.25전쟁 때 바다 빠졌다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나
은사 스님, 독서·작업·식사
3대 원칙 엄격히 가르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다른 대중 스님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은사 스님에게 들켜 그 바둑판으로 ‘머리통’을 얻어맞아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중이 잠시라도 여유를 갖고 살면 온갖 잡념이 생겨 ‘헛지랄’만 하고 산다며, 항상 화두를 들고 살라는 은사 스님의 경책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뒤로 설운 스님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 선암사도 지킬 겸 해서 선암사 달마전선원(현재 칠전선원)에 들어가 2만기를 꽉 채웠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와 공부를 먼저 하고 싶었지만,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로 강원이 휴강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든 화두가 ’심오(心悟)‘였다. 마음의 실체를 찾는 것, 이것이 무엇인고 하며 내 마음을 찾는 것이었다.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배우고 익혀 생활법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저는 그것을 마음에 익히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어떻든 이 몸을 보내야 하는데 마음은 어디로 갈지 항상 걱정입니다. 그래서 항상 근심을 풀어 해탈하고 번뇌 망상심을 저 멀리 배설함으로써 막힘없이 유쾌하게 살고자 하는 것을 화두로 삼아 참구하고 있습니다. ”
당시 선암사 강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도반이 박세민 스님과 동국대 이성윤 교수였다. 그러나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로 강원이 휴강을 하게 되자 그분들은 다 해인사 강원으로 떠나갔지만, 설운 스님은 선암사를 지키기 위해 선암사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박세민 스님과 이성윤 교수가 해인사 강원으로 오라고 계속 연락이 왔다. 설운 스님은 걸망 하나만 매고 길을 떠났다. 선암사에서 해인사까지 가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차비가 없어서 탁발해 모은 돈으로 버스를 타고 가고, 돈이 떨어지면 또 탁발을 해서 모은 돈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꼬박 한 달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선암사 중이라고 해인사 강원에서 설운 스님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선암사를 두고 조계종과 태고종이 극심한 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개월 뒤에 받아준다고 해서 해인사 원당암에서 해원 스님을 모시고 한 철났지만, 3개월 뒤에도 입방 허락이 안 났다. 죽고 싶을 만큼 서러웠다.
눈물을 머금고 설운 스님은 다시 선암사로 되돌아왔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나이 든 형들은 책 들고 다 공부하는데 자신만 나이가 어리다고 공부를 시켜주지 않자 밤마다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 전에 “나 공부 좀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었다. 그 기도 덕분이었을까. 설운 스님은 선암사 강원에서 다시 사집과와 사교과와 대교과까지 공부했다. 대원불교대학도 졸업했다. 그 덕에 고려대 경영대학원도 졸업했다. 공부에 대한 갈증도 풀고 싶었지만, 이젠 사찰에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일화 하나. 설운 스님은 염불과 범음범패의 대가다. 그런데 그전에는 염불을 하도 못 해 다른 절집에 가서 ‘부전 살이’도 못했다. 염불을 못 한다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공부하러 간 곳이 옥천범음대였다. ‘목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지만, 설운 스님의 공부에 대한 목마름은 끝이 없었다. 녹음기를 들고 버스를 3~4번씩 갈아타고 다니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에 이젠 염불과 범음범패의 대가가 되었다. 그 반증으로 설운 스님은 1983년 5월 17일 서울 동대문운동장 특설무대에서 3만여 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불교전통예술영산재 국운융창 대법회’라는 주제로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범패시연회를 가졌다. 또 선암사 주지로 있던 중 순천시장으로부터 순천시 홍보대사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때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마다 선암사 정문에서 영산재 시연을 6개월 동안 봉행했다. 그 일로 설운 스님은 순천시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양주=주간 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