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사바 이야기】움

2024-07-08     손택수

채길우(1982~ )

개수대 수챗구멍에
무심코 흘린 콩 한쪽
며칠 지나
거름망을 비우려 들여다보니
음식 찌꺼기들과 함께
눅눅한 어둠 속에 머물다가
거기서 그만 아무런
낌새도 소리도 없이
신생아의 발 같은 조그마한
싹을 틔우고 말았다.

좀처럼 말이 없고
친구가 없어 매일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그 작은 여학생은
어느 날 방과 후
혼자 남은 화장실 변기 칸에서
조산아를 낳았다.
아기는 아직 첫울음을 떼지 않는데
발바닥이 펼친 떡잎만큼 아담해
세상의 어떠한 그물에도
걸릴 것 같지 않았다.

-시집 《측광》, 창비, 2023

 

관념 너머에 신생이 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관념을 여의니 음식 찌꺼기가 신생의 싹이 된다.‘신생아의 발 같은 싹’을 누가 찌꺼기의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생명은 오물 투성이인 개수대 수챗구멍도 거룩한 인큐베이터로 바꾼다. 개수대가 화장실 변기 칸으로 옮겨온 다음 연에선 사회적 선입견이나 엄격한 도덕률이 자연스럽게 이완되면서 어떠한 편견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떡잎만큼 아담한 발바닥’에 대한 찬미가 이어진다. 산과학자 미셀 오당에 따르면 예수님 탄생의 마굿간은 가장 비참한 출생의 배경을 사랑의 원체험 공간으로 바꾼 성스러운 상징공간이다. 개수대와 화장실을 성화하는 힘. 시 가운데 분련을 하는 거울이 있다. 여백의 텅빈 거울이다. 관념을 허무는 거울을 닦아보자. 실체의 관점에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시인ㆍ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