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미】산과 나
주중엔 이따금 북한산 쪽으로 산책을 나가곤 한다, 사는 곳이 북한산 산자락이라 집에서 왕복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 가벼운 등산인 셈이다. 주로 족두리봉 한참 아래쪽을 길게 돌아오는 코스를 애용한다. 그런지 6, 7년 되지 싶다, 혼자서 이 길을 다닌 것이.
주중에 산길은 한산하다. 자주 다녀 몸에 탄성이 생긴 듯 힘든 줄 잘 모른다. 이젠 여럿이 함께 등산가는 것에 별 흥취가 없는 편이다. 오랜만에 여럿이 함께 산행을 하고 내려와선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허나 어느 새 이렇게 혼자 다님에 적응이 되니 이 편이 훨씬 홀가분하고 편하다는 생각이다.
산은 바라만 봐도 평안과 안도를 느끼게 해준다. 산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차별을 하지 않는다, 이 산엔 셀 수도 없는 사람이 다녀갔지만 늘 비어있고 열려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난 외려 더 설레는 기분으로 산을 향해 몸을 옮긴다. 사계절 산의 변화로, 그 무상이 활기를 더해주는 것이다.
산길에 나설 때마다 매번 〈혼자일 뿐임〉을 즐기고 있음을 안다. 내딛는 발걸음을 자주 의식하며 걷곤 한다, 앞뒤로 움직이는 몸, 구부렸다 펴는 허리 동작이며, 발이 땅에 닿을 때 느껴지는 확고한 발바닥의 느낌이며, 내쉬는 숨소리 등 이따금 몸 전체를 의식하기까지 하면서 걷곤 한다.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은 뒤로 밀어내면서 걷는 분위기. 생각을 억지로 외면이라도 하는가 싶다. 작금의 이야기나 사건들을 내 모르는 곳에 버린다는 잠재의식의 발동이다. 마음은 진지하게 몸의 동작을 관찰하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보통 20여분 정도이지 싶다. -이것은 어느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었나. 어느 때 산길을 가던 중, 문득 당장에 가장 중요한 일은 〈가고 있는 이 행동〉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하고 고유하면서도 가장 진실한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후 그런 습관이 몸에 익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걷는 동안이면, 〈누가 걷는지〉 곧잘 잊곤 한다.
오늘도 산길을 오르다 전경이 훤히 펼쳐진 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이 전경을 이 눈이 보고 있는 것인가. 뇌가 보고 있는 것인가. 감각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이 너머의 마음이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전경 역시 내 기억이 토해낸 산물에 불과한 것인가. 무뚝뚝하게 서있는 저 회색빛 아파트 건물들, 복잡하게 얽혀있는 여러 갈래의 길, 멀리 아스라이 펼쳐진 크고 작은 산들, 드넓은 하늘엔 생각도 모르는 구름이 떠가다 멈춰있다. 일체는 적막 속에 잠든 모습이다. 새소리나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 몸은 그만 맹목의 이 풍경 속에 몰락해버리거나 실종될 위험마저 있었던 것이리라.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고마운 바람에 감복을 받은 몸. 불현듯 허공 향해 한없이 흩어져가고 있다는 상쾌함 느꼈다. 아마 커다란 자유가 이미 당도해 있음을 직감도 해서였을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순간의 현전으로, 이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날 일도 없어진 상태. 답했다. 이 고요 속에서. 목전에 펼쳐진 이 모든 게 바로 나이며, 내 것이 아닌가라고,
-시인ㆍ블레스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