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스님의 동화로 읽는 화엄경 이야기】“나는 싫증이나 염증 내지 않아 무염족왕이라 불려”

⑲ 싫증과 염증이 없는 무염족왕

2024-05-13     민재 스님

 

보안 장자와 분타리카가 숨을 헐떡이며 집에 도착하니 분타리카 엄마가 눈으로 아이를 찾고 있는 듯하였다.
“엄마! 여기, 약. 약. 보안 장자님이 주셨어.”
보안 장자가 약을 잘 받아 먹고 있는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선재와 함께 분타리카 집을 나왔다.
“자, 이제 선재 동자는 남쪽의 다라당성에 무염족왕이 있으니 그에게 보살도를 물어보아라. 내가 알지 못하는 중생들의 번뇌를 소멸하는 법이나, 중생들의 모든 생사에 있어 무서움과 두려움을 없애는 지혜 광명을 얻어서 어떻게 하면 평등하고 고요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
선재는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두 손을 합장하며 인사를 올렸다. 지금까지 만난 선지식들은 나와 보리를 거두어주고, 또 우리를 지켜주며, 무상보리심을 깨달아 위없는 부처님 법안에 머물게 해주시 것을 알게 되었다.
보리와 손을 잡고 밝고 깨끗한 곳에 당을 세운다는 뜻의 다라당 성의 무염족왕을 찾았다. 왕은 십만 대군의 군졸들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금강좌1)에 앉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나랏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무섭고 처참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온몸에 포승줄2)을 감고 무염족왕 앞에 끌려온 사람들은,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무염족왕과 군졸들은 그들이 지은 죗값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키우던 개를 때려죽인 자는 똑같이 때려죽이고, 높은 산에 올라가 아이를 밀은 자는 산으로 데려가 밀어 죽였다. 또한 손과 발을 끊기도 하고 귀와 코를 베기도 하고 담뱃불로 아이들의 손을 지진 자들은 타는 불장작으로 몸을 지지며,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고 굶겨 죽인 자들은, 백일 동안 나무에 묶어 햇빛이 쨍쟁한 날에 물을 한 모금씩만 먹이고 백일이 지나서야 굶겨 죽였다. 이런 끔찍한 고통이 한량 없다 보니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을 지르고 통곡하는 소리가 마치 중합지옥3)같았다.
“오빠! 무서워, 무염족왕은 미쳤나 봐. 너무해, 선지식이 저래도 되는 거야?”
보리가 눈을 가리고 무서워하며 울었다. 선재 동자도 이 처참한 광경에 기가 막혔다.
“나는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보살행을 구하고 보살도를 닦는데, 이 왕은 선한 법은 하나도 없이 큰 죄업만을 짓고 있다. 중생을 핍박하여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미래에 받을 악도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떻게 이런 데서 법을 구하고 대비심을 내어 중생을 구호할 수 있겠는가?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다.”
선재 동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갑자기 하늘에서 어떤 천신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마땅히 보안 장자가 가르친 말을 생각하여라.”
선재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하였다.
“저는 항상 생각하고 있으며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천신이 말했다.
“착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선지식의 말을 잊지 말아라. 선지식은 그대를 인도하여 험난하지 않고 편안한 곳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온갖 지혜 방편을 일러주어 중생들을 수호하며 해탈하게 하는 지혜로 만인들을 조복4)하게 만들 것이다."
선재는 이 말을 듣고 무염족왕의 처소에 나아가 그의 발에 예배드리고 말하였다.
“거룩하신 선지식이시여, 저는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지 알지 못합니다. 무염족왕께서는 잘 가르쳐 주신다 하니 말씀해 주십시오.”
무염족왕은 하던 일을 멈추더니, 선재와 보리의 손을 잡고 궁중으로 들어갔다. 보리는 왕이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손을 잡힌 채 끌려가다시피 궁으로 갔다.
무염족왕이 말했다.
“나는 집착함이 없고, 싫증이나 염증을 내지 않아 무염족왕이라 한다. 많은 일들을 심판하고 있지. 그대는 잠시 이 궁을 둘러 보아라.”
선재가 찬찬히 둘러보니 그 궁전은 아주 넓고 모두 아름다운 보석으로 둘러싸여 영롱한 빛을 내어 눈이 부셨으며 수많은 시녀들이 단정하고 예쁘게 치장하고 시중을 들고 있었다.

삽화=서연진 화백

 

왕이 선재에게 말했다.
“선남자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만약 참으로 악한 죄를 짓고 있다면 이런 보석궁전과 많은 권속5)들과 부귀와 자재함을 누리겠는가? 나는 보살의 여환해탈6)을 얻었다. 아주 못되고 나쁜 죄를 많이 지은 내 궁에 있는 중생들은 아무리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아 아무 소용이 없었고 이러한 방편으로는 그들의 나쁜 업을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악인으로 변신해 온갖 죄악을 지어 갖가지 고통을 받는 장면들을 보여준 것이다. 중생들이 보고 무서워 두려워하며 싫어하고 겁을 내어, 나쁜 업을 끊고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게 하려는 것이다.”
“잘 달래고 타이르면 되지 않을까요?”
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재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염족왕이 말했다.
“아무리 타일러도 저 죄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뉘우칠 줄 몰라. 지은 죄들이 누룽지처럼 눌어 붙어서 죄를 낱낱이 떼어 내기도 힘들지. 그래서 저지른 죗값보다 많이 불려서 열 배로 돌려주는 거야.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동안 처절하게 느껴 보면서 자기들이 지은 죄를 뼛속 깊이 반성하고 참회함으로 죄를 소멸시켜주는 것이다. 사실, 나는 누구도 해친 적이 없다. 내가 차라리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을지언정, 한 순간이라도 모기 한 마리, 개미 한 마리일지라도 괴롭게 하려는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사람을 해치겠는가! 예를 들면 승열 바라문과 같이 죽음으로써 해탈을 하는 거지. 결국 사람들 중심에 서서 사람답게 살고 복을 주려고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의 밭에 있다고 하는 거지.”
그때 보리가 눈을 반짝 뜨며 말했다.
“그럼, 보안 장자님네 분타리카 아버지는 술이 깨서 도망갔다고 했는데, 여기로 잡아 오셨나요?”
“으응, 누구? 분타리카?”
“네, 분타리카 엄마를 기절시켰잖아요.”
“왜? 어떻게?”
“아이 참! 술을 먹고 성질난다고, 머리를 빡! ”
보리가 그 장면을 직접 본 듯이 권투경기를 하듯 주먹을 내질렀다.
선재는 그 모습을 보자, 민망하기도 하고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픽 나왔다.
무염족왕이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생각났다. 그 버릇없는 딸하고 잡혀 온 놈.”
“맞아요. 분타리카 언니도 나빴어요, 식탁 의자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엄마를 보고도 도망간 의리 없는 그 언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벌을 받고 있는지 찾아가 보아라.”
선재 동자와 보리는 갑자기 존경심이 들어 공손하게 절을 하고 그 앞을 나왔다. 그러나 보리는 형벌을 받는 죄인들 보기가 끔찍해서 고개를 돌렸지만, 선재는 저것 또한 업장을 소멸시키는 방편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들에게 불쌍한 마음이 들면서 빨리 참회하기를 기도하였다.
여기저기서 ‘살려줘!’ ‘이러려면 차라리 날 죽여라, 이놈들아!’ ‘에고 에고, 잘못했습니다. 이제 그만 좀 때리세요.’라는 울부짖음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분타리카! 분타리카! 나 좀 살려줘... 분타리카! 내가 술을 먹어서 그랬지, 엄마를 죽이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야, 분타리카! 제발 날 살려줘.”
선재가 부리나케 보리의 손을 잡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흉악하게 생긴 군졸 둘이서 밧줄에 사람을 매달고 나무 방망이로 때리고 있었는데, 마치 탁구공처럼 이쪽으로 오면 오른쪽에 있는 군졸이 때려서 왼쪽으로 보내고, 그럼 또 왼쪽에서 나무 방망이로 닥치는 대로 때려서 오른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분타리카 아빠였다. 머리에 맞으면 머리에서 피가 나고 다리에 맞으면 살갗이 벗겨지고 찢어졌으나 군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때렸다. 보리가 선재 팔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오빠, 너무 불쌍하다. 죄는 밉지만, 너무 가혹하네, 가서 말려 봐!”
선재가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안돼! 분타리카 아빠는 평생 지은 죄를 누룽지 벗기듯 다 벗겨내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해, 저 군졸들은 죗값이 끝나면 멈출꺼야. 나는 저 사람이 꼭 참회하고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
보리가 말했다.
“좋은 곳, 어디! 집?”
“글쎄, 정말 반성하면 용서를 빌러 집으로 찾아가겠지.”
“그럼 좋겠다. 근데 분타리카 언니는 어딨지?”
그때 입에 재갈이 물려 말도 못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몸을 밧줄에 묶인 채, 땅바닥을 박박 기어 가고 있는 분타리카 언니를 발견했다. 얼굴이 닮아서 알겠으나 행색은 너무 초라하였다. 옷은 다 찢어지고 머리는 산발하였으며, 맨발에 무릎은 깨져서 시뻘겋게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선재가 그녀를 쳐다 보면서 말했다.
“엄마와 동생에게 얼마나 독한 말로 퍼부었는 지, 입에 재갈이 물려 있네. 쟤는 이제야 가정의 소중함을, 엄마가 얼마나 귀하고 고마우신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동생도, 가족 모두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지 깨닫게 되면 울면서 돌아가겠지...”
그 소리에 보리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맞아, 나도 엄마! 그리고 내 동생, 유리!”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동화부문 입상자

【각주】
1) 부처님이 도를 닦았을 때 앉은 자리, 즉 제일 좋은 자리.
2) 죄인을 잡아 묶는 끈.
3) 여러 가지 고통을 합쳐서 주는 지옥.
4) 엎드려 굴복시킴.
5) 한집에 같이 사는 식구.
6) 모든 것이 허깨비같이 덧없음을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