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스님의 동화로 읽는 화엄경 이야기】삶과 죽음은 하나인데 오래 살려고만 하는 욕심이란…

⑰ 두려움을 없애주는 법보계 장자

2024-04-16     민재 스님

 

선재와 보리가 사자궁에 다다르자 그들의 눈앞에는 여덟 개의 대문과 금빛으로 빛나는 십 층의 대 저택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아, 굉장하다. 오빠 담 좀 봐. 다 은이야. 그리고 저 뒤쪽 연못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네!”
보리가 사자궁을 둘러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선재 동자는 법보계 장자를 찾아 그의 곁을 수없이 돌며 합장한 후에 말하였다.
“거룩하신 이여, 저에게 보살행을 가르쳐 주옵소서. 제가 능히 깨닫고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데 모든 이에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착한 남자, 선재, 선재야. 내 집을 보라!”
법보계 장자는 선재의 손을 잡고 그의 집을 보여주었다. 선재가 일 층부터 십 층까지 둘러보는 동안, 보리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연못가로 쫓아갔다. 연못에는 황금 잉어와 비단잉어가 수십 마리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잉어들의 먹이를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으응…. 너는 누구냐? 못 보던 아이로구나.”
할아버지는 더운 날씨에도 털모자를 쓴 채 뒤돌아보며 말했다.
“네, 저는 오빠랑 왔어요. 화엄경 약찬게에 나오는 선지식님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머? 화엄경 약찬게?”
“네,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 비로자나전법신, 나무화장세계해…”
“아이고. 보기는 어려 보이는데 기특하구나.”
“770자를 다 외워?”
“그럼요, 삼 년 동안 노래한걸요.”
“쯧쯧…. 어린애가 고달픈 게 많았구나. 나도 고달픈 삶을 살다가 왔는데….”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보리의 눈을 들여다본다. 서로의 눈이 마주 치자 둘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는다. 왠지 정다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네 이름이 뭐냐?”
“저는 보리라고 해요. 할아버지는요.”
“나는 은규라고 해, 여기서는 마하무드라 은규라고 불러. 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산란한 마음이 진정된다나, 어쩐다나.”
“마하무드라! ᄏᄏᄏ…. 꼭 권투선수 이름 같네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여기 법보계 장자님께서 지어주셨어. 무치란행인가, 이치란행!1) 머 그런 거래.”
“아. 그런 깊은 뜻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근데 너는 왜 나보고 할아버지라고 하니?”
“그럼, 할아버지를 뭐라고 불러드려요? 마하무드라?”
“아니, 그냥 삼촌이라고 불러.”“에이! 삼촌은 좀….”
“흐흐흐, 너무 갔나. 오케이! 그럼 삼촌 할아버지.”
“네, 좋아요. 삼촌 할아버지.”
“근데 너, 오빠는 어디 있니?”
“아 참! 오빠.”
보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마침 선재 동자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뛰어온다.
그 모습을 은규가 흐뭇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가 보리 오빠구나.”
선재는 습관대로 두 손을 합장하고 큰절을 올렸다.
“네, 저는 선재라고 합니다.”
“나는 여기 사자성 1층에서 밥 먹고, 2층에서는 옷을 얻어 입고, 3층과 4층에서는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받아쓰고 있단다. 그래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연못에 황금 잉어와 비단잉어들을 돌봐주고 있지.”
“그럼 5층부터는 뭐해요?”
“내가 알기로 5층은 보살님들이 설법하고, 6층에서는 부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7층은 방편과 지혜로 바른 법을 듣고, 8층부터 10층까지는 부처님 법을 깨달아 다음 생에 성불할 보살들과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며 대원2)을 성취하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라 하더구나.”
보리가 마하무드라 은규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물어본다.
“거기, 10층은 올라가 보셨어요?”
“거기를 어떻게 올라가? 여러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던데, 나같이 못난 사람은 감히 올라갈 수 없는 곳이야.”
그 말은 들은 선재는 문득, 거기를 올라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6층부터는 모든 보살이 깊은 지혜를 이루어 반야 바라밀다를 통달한다고 하였는데 내가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 고개를 들다가 마하무드라 은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은규는 선재 동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보아하니 선지식들을 찾아 도를 이루려 하는 모양인데 아직은 젊으니까 열심히 노력해봐요. 여기 5층부터는 부처님 법 공부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으니 자주 듣다 보면 지혜 광명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근데, 삼촌 할아버지는 왜 안 들어요?”
보리가 자기 어깨도 쳐달라고 내밀며 물었다.
마하무드라 은규는 소리 없이 씩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삽화=서연진 화백

 

“저 잉어들이 들을까 봐 살살 말하는데 나는 이제 얼마 못 살아. 사는 게 죽는 거고 죽는 게 사는 거야.”
“엥!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는 게 죽는 거고, 죽는 게 사는 거라니요.”
“다 뜬구름이라는 거지.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즉, 산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났다가,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야.”
“누가 그래요?”
“나도 들은 이야긴데, 중국 당나라 시절 소동파가 지은 거라고도 하고, 나옹화상의 누이가 지었다고도 한대. 그게 어떻든 간에 살고 죽는 거는 하나라는 거지. 내가 칠십 년을 살고 보니 이제야 깨달은 게 있어요. 삶과 죽음은 서로 붙어있는 건데 우리는 그냥 오래 잘살고 싶어만 하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우리가 삼계화택에 살고 있다고 하시잖아.”
“삼계화택이요?”“응, 집에 불이 나서 활활 타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소꿉장난에 빠진 중생들이라는 거여! 나무아미타불.”
선재는 마치 법문을 듣고 있는 것 같아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내가 여기 한 십 년 오래 있다 보니 들은 소리가 많아서 드디어 설법하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그림자 친구처럼 늘 죽음을 아끼고 사랑하면 크게 욕심을 내거나 시비를 붙거나 화낼 일이 없다는 거지. 그래서 법보계 장자님께서 어리석고 산란한 마음을 잘 다스리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고 하셨어, 그게 무치란행이야. 어리석을 치, 산란한 란!”
그때 어디선가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
저 소리는 배에 힘이 들어가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소리다! 웃음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남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의 웃음소리는 목에서 나오는 거짓 웃음소리며, 웃고 있어도 슬픔이 묻어나는 웃음소리는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 그러나 호탕하고 밝으며 정말 좋아서 웃는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상쾌해지기도 한다. 선재는 우렁찬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제 저렇게 웃어보았는지 생각해본다.
“어이! 여기들 다 모여 있구먼, 무드라 은규 거사님도 계시고…. 쟤는 누구냐? 선재 동자님 동생이야?”
선재가 얼른 보리 등을 떠밀며 법보계 장자님께 삼배를 올리게 했다.
“다들 착하고 선하여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라 처음 봐도 잘 통하고 어울리는구나. 특히 마하무드라 은규 거사는 십 년 전 처음보다 얼굴이 아주 좋아졌네. 역시 사자궁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보살핌을 주고 보살행을 하는 곳이야. 십 년 전 배고프고 오갈 데 없는 은규 거사를 여기 있어도 좋다고 했더니 분명히 고맙다며 웃고 있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는 거야. 웃음소리도 안나...”
“정말 아주 고마우면 말이 나오지 않는 거요, 그땐 정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오는 느낌이었지. 내가 살아있어서 얻은 복락입니다. 어려웠을 때 살기 싫다고 죽었으면 이렇게 오랜 세월 행복할 수는 없었소.”
은규 거사가 몸을 일으켜 두 손을 합장하고 반배를 올린다.
법보계 장자님이 말했다.
“당시에 웃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소, 며칠 동안 굶어서 빼빼 마른 몸에서도 눈빛은 얼마나 맑고 총총하든지... 힘이 없어 소리를 못 내지만 이제 편안해질 수가 있다는 기쁜 마음에 웃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좋았소. 마치 부처님의 웃음처럼...”
선재 동자가 다시 무릎을 꿇고 법보계 장자님께 물었다.
“거룩하신이여,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청정하고 많은 대중들을 보살피고, 어떤 선근을 심어서 이토록 훌륭한 인과응보를 얻었나이까?”
“내가 생각해보니 옛날에 부처님께서 성안에 들어오실 때 내가 음악을 연주하고, 공양을 올렸으며, 부처님과 선지식들을 항상 뵙고 바른 법을 들었더니 빈궁과 횡액을 모두 여의고, 보살들의 한량없는 복덕과 보배의 해탈문을 얻었느니라. 하지만 나 역시도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분별없는 보현의 수행 그물 일으켜 분별없는 삼매의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평등하고 분별없는 공덕행에 대해서는 등뿌리국 보문성에 보안 장자가 있으니 그에게 보살행을 물어보아라.”
가만히 듣고 있던 보리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렇게 금빛 찬란하고 10층이나 되는 대 저택에 살면서 모자라는 게 있다니 말도 안돼.’
그때 마하무드라 은규가 ‘광명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틀라야 훔”
“아!... 마하무드라, 삼촌 할아버지!!!”

-2022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 입상

【각주】
1) 어리석고 산란한 마음을 없애주는 것.
2) 크고 광대한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