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경 칼럼> 엉성한 ‘코드’의 보복

2006-09-13     한국불교신문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물에 새기라고 했다. 그 말이 격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 또한 ‘눈에는 눈으로’를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대줘라’로 바꾸려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었다. 은(恩)이나 원(怨)이나 모두 마음 심(心)을 달고 있지만 그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게 보복(報復)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확실하게 드러난다. 갚을 보(報)는 수갑을 차고 꿇어앉은 사람의 등뒤에 손을 그려놓은 것으로서 ‘죄인의 죄상을 알리는 것’을 의미했었다. 거기서 ‘상세히 말하다’라는 의미가 생겨났고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므로 ‘갚다’라는 의미도 추가됐다. 그럴 경우 감정개입은 금물,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이어야 했으므로, ‘報’ 또한 보은(報恩)이나 보원(報怨)에서 보듯 중립적으로 쓰이게 됐다. 돌아올 복(復) 또한 발 풀무를 밟았다가 떼면 다시 공기가 채워지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돌아오다’ ‘돌려보내다’ ‘다시’ 등의 의미이므로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영어 ‘revenge’도 마찬가지다. ‘revenge’의 뿌리는 ‘다시’를 뜻하는 접미사 ‘re-’에 ‘오다’라는 의미의 ‘venire’가 붙은 라틴어 ‘revenire’, ‘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었다. 그런데도 보복이나 ‘revenge’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당한 대로 갚아준다”는 의미로 굳어져버린 것은 세상을 살다보면 은(恩)보다는 원(怨)이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데 이의를 달지 못한다. 유진룡 전 문광부 차관이 임명 6개월만에 경질되자 청와대 인사청탁 압력과 ‘바다이야기’ 문제를 폭로하여 보복했지만 그 보복 이상의 보복을 당하게 생겼다. 경품용 상품권 도입 과정에서 상품권 발행업체 안다미로 대표 김용환으로부터 로비를 받았다는 등의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범법자인양 ‘출국금지’를 당한 데 이어 강도 높은 검찰 조사를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에서는 “경품용 상품권 도입 때 주무국장이었던 데다가 로비의혹까지 불거져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밝히고 있지만 “통치권 차원의 인사 협조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경질 후 언론플레이로 물의를 야기함으로써 임기가 1년 반도 남지 않은 노 대통령의 권력누수 현상을 가속화시킨 데 대한 보복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정무직인 차관으로 승진시켜줄 때는 그에 걸맞게 정권에 협조하라는 것인데도 그런 의중을 거슬려가며 스스로의 힘으로 승진한 것처럼 소신이 어쩌고저쩌고 자신의 정당성만 주장한 유 전 차관의 고지식함을 감싸줘야 할지 세상물정 모른다고 눈을 흘겨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코드’는 맞았는데 주파수가 맞지 않았나? 최근 조영길 전 국방장관, 윤영관 전 외교부장관,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김희상 전 대통령 국방보좌관 등 현 정부에 몸담았다가 해임된 사람들이 앞장서서 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모양새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국정에 참여한 것이지 정권에 봉사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정권은 “참여정부 노선이 싫었으면 처음부터 임명을 거부했어야지 해임 당하고 나자 칼을 겨누는 건 옳지 않다”고 반박한다. 제3자가 보기에는 모두가 엉성한 ‘코드’ 인사 탓, 그 나물에 그 밥, 엉성한 ‘코드’를 통해 주고받는 은원(恩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천박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