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람나는 佛法 홍보

2006-11-30     한국불교신문
                         최영주     <불교레크리에이션지도자,  전 봉원사 인경회 어린이법회 지도교사> “수행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면서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불교는 어떤 것을 추구하는가. 10대 때 내가 느낀 불교는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 ‘불가사의한 영적인 힘’이 날 돕겠지”라는 식의 막연한 신비주의였다.  그리고 불교경전을 비롯해 다양한 철학서 읽기에 빠져있던 20대에 내가 생각한 불교는 종교와 철학, 문학을 아우르고 세상 모든 번뇌와 궁금증에 대한 답을 가진 일명 ‘지식in 종교’였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은 어떤가. 역시 불교는 철저한 자기 ‘수행’과 자비행을 실천하는 ‘무주상보시’가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 불교를 접한 나이는 5살 때였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까지 3대째 불자 집안 이었던 지라 나 또한 ‘불심의 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키울 수 있었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적마다 어머니는 서울 신촌에 있는 봉원사를 찾았다. 어머니는 봉원사를 찾을 때 마다 쌀 한 되와 과일 몇 개씩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한 손에는 부처님께 올릴 쌀과 과일이 들어 있는 보따리가 그리고 한 손은 어린 나의 고사리 손을 살포시 잡고 봉원사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 지금 우리 누구네 집에 가는데? 뭐 하러 짐 보따리는 무겁게 가지고 올라가?”  “응, 부처님한테 가는 거야. 우리 영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훌륭한 사람 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드리러 가는 거란다.”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당시의 초가을 날씨. 봉원사 부처님이 보내셨던 전령이었을까.  높디높은 파란 창공을 가로질러 가을과 여름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추잠자리가 유유히 한 모녀의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봉원사 대웅전으로 들어설 때까지 우리 곁을 맴돌았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준비한 쌀과 과일을 부처님 전에 올린 후 계속해서 절을 올렸다.  나도 엄마를 따라 몇 십번 절을 했다. 힘에 부쳤다. 대웅전에서 염불을 하던 스님이 무서웠을까? 아니면 신심(信心)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지만 괜스레 부처님께 염치없는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엄마. 나 힘들어. 좀 쉬었다하면 안 돼?” “쉿~~~. 그럼 저쪽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렴.” 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스님의 염불과 어머니의 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기도는 법당에 계신 부처님 얼굴로 노을빛이 환하게 비추고 난 뒤에야 끝났다. 그 땐 정말 몰랐다. 어머니의 기도를. 그리고 신심이 뭔지, 수행이 뭔지, 불교가 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과 부처님께 공양할 과일 보따리 대신 남편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봉원사를 찾는다.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은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다.  변한 것은 단지 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는 나의 모습과 좀 더 성숙된 인식의 눈이다.  봉원사 부처님은 여전히 옅은 미소로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불법(佛法)으로 내 마음 속 ‘중생심(衆生心)’을 놓으라고 그리고 번뇌를 끊고 깨닫겠다는 그 마음마저도 놓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때 어머니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일심(一心)으로 기도드렸을까. 오늘도 나는 어머니가 그랬듯이 봉원사 부처님께 헌향(獻香)하고 기도드린다. 부처님 전에 번뇌 하나 올려놓고 절을 올린다.  그리고 또 부처님 전에 소원 하나 올려놓고 절을 한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수없이 그리고 쉴 틈도 없이 계속해 본다. 108배, 1080배, 3000천배 등에 대한 집착 없이 내 몸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절을 올린다.  일심으로 절을 하다 보면 부처님 전에 올려놓던 나의 ‘번뇌’와 ‘소원’은 어느새 땀과 함께 법당 마루에 떨어져 증발해 버리고 만다.  아직도 마음공부와 수행의 깊이가 얕은 나는 감히 말해 본다.  “아하~~. 방편이었구나.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구나.”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내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회향하며 인연 있는 사람들과 정말 ‘사람냄새’ 나게 살아야하겠다”는 생각을 세상살이에 미혹됨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를 먹고서야 비로소 해 본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재주가 남달랐던 나는 현재 불교레크리에이션협회 교육연수국 팀장직을 맡으며 레크리에이션 전문지도자 강습과 교육 기획 업무를 보고 있다.  이 일을 업으로 택한 이유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나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전법을 펼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물론 교리와 수행을 통한 불법(佛法) 전파도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스포테인먼트(스포츠와 연예・오락을 아우른 통시적 문화)’를 중시하는 시대에서 불교레크리에이션의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환으로 1994년부터 2005년까지 봉원사 인경회 어린이 법회 지도교사와 요양원과 치매센터를 방문해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치매 치유 프로그램인 ‘연등 만들기’ 등 각종 불교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특히 ‘저 출산 고령화’가 사회・국가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 때 불교계가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어린이 법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고 노인복지 수준이 밑바닥인 현실까지 감안한다면 불교레크리에이션의 역할과 비중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재능과 능력은 너무 작다. 하지만 앞으로 젊은 불교레크리에이션 지도자를 많이 육성해 ‘여흥과 오락’을 통한 ‘신바람 불법’ 홍보에 앞장설 것이며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어린이 집을 세워 꿈나무 불자를 만드는 ‘인재불사’에도 매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