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道를 닦는 수행의 행복은 시간이 가고 환경이 바뀌어도 점점 더 만족한 불멸의 행복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님들은 수행승이라는 신분, 정해진 생활, 별도의 주거지가 있어 주목 받기도 하지만 세속에 나타나지 않고 도를 닦는 거사가 더 많을 것이다. 주변의 고요가 마음 고요에 도움을 주지만 주변의 산란한 현상에 약하여 무너지기 쉽고 세속의 산란한 현상에서 이를 제압하고 고요를 지속할 수 있으면 산속에서 도를 닦는 수행자를 능가한다.

여기 마음 속에 있는 요지부동(搖之不動)의 경계를 그대로 부른 야부스님의 노래가 있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못 밑바닥을 뚫어도 물은 상처가 없네.

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아무리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意)의 형상으로 비춰도 자성(自性)의 고요에는 그림자일 뿐이고 그 형상이 어떤 장애를 일으킨다 해도 추호도 흔들림이 없으며 화두 일념에 철저함이 몽매간(夢寐間)에도 일여하여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말에 산중(山中) 공부 10년이 세속에서의 정진 공부 3년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세속에서 정진할 줄만 알면 날마다 장사하여 돈을 벌어도 공부가 그 안에 있고 직장에서 직장일하는 가운데도 고요한 마음수행이 들어있다. 어쩌면 수행공부하기 좋은 곳이 오히려 세속일 수 있다.

어느 스님은 산중 공부에 진전이 없자 10년을 묵언하고 10년간 도심에서 땅콩을 팔며 수행 정진한 결과 크게 득력했다. 땅콩을 사러온 이에게 값을 받고 땅콩을 건네주는 순간 순간에 스스로 화두 참구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손수레를 끌 때도, 사람들이 오가는 그 시간에도 도시생활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화두일념했다 한다. 이것이 참 수행인의 정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행복이 지속되는 것은 풀잎의 이슬 같아 시간이 바뀌고 환경이 변하면 사라지고 만다. 일체중생이 제각기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불성에서 업이라는 한 조각구름에 가려 불성이라는 고향에 돌아기지 못하고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인(人), 천(天)이라는 6도(六道)의 틀에서 윤회하는 것이다. 불성(佛性)이 나의 고향인 줄 알아 부처를 이루면 다시는 6도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두고 어디를 갈 것인가.

방 거사는 딸과 함께 대바구니를 짜고, 아들은 괭이로 산전(山田)을 일구면서, 방 거사 부인은 채전을 가꾸며 이렇게 참구하였기에 모두 오도(悟道) 했던 것이다. 세상살이에는 어려움이 많고 큰 포부를 가질수록 괴로움도 크다. 도를 닦으려고 마음먹어도 수행을 지속하기 힘들고 그 수행의 결과를 획득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세상을 살면서 가족과 뜻을 같이 하여 노력하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며, 가족과 함께 수행하여 성취하는 것은 더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이 도를 닦을 줄 안다 해도 가족이 도반(道伴)이 되어 함께 견성(見性)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복이란 온 가족이 뜻이 합하여 이루었을 결과이다. 온 가족이 도를 닦는 수행의 행복은 시간이 가고 환경이 바뀌어도 점점 더 만족한 불멸의 행복이다.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존(世尊)이 미이도솔(未離兜率)에 기강왕궁(己降王宮)하고 미출모태(未出母胎) 도인기필(度人己畢)하였다(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미 가비라의 왕궁에 태어났으며 아직 마야부인의 배에서 태어나기 전에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여 마쳤느니라).

큰 절에 가면 팔상전(八相殿)이라는 법당이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우리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열반하여 가실 때까지를 여덟 가지의 요긴한 장면으로 나누어 탱화로 표현한 법당이다. 팔상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이다.

부처님께서 도솔천에 계시다가 사바세계 중생을 구제하러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오셔서 가비라 왕궁의 마야부인의 몸을 빌어 4월 8일 비니원 동산에서 탄생하셨다. 소년 시절에는 4개의 성문에 나가 중생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을 보시고 태자 자리와 부인과 아들을 두고 몰래 성문을 넘어 출가하여 6년을 도 닦는 동안 수많은 장애를 항복받고 12월 8일 오도(悟道)하여 부처를 이루셨다.
이후 녹야원에서 일체 중생이 생로병사를 해탈하여 부처를 이루는 진리를 완벽하게 가르친 49년 만에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셨다.

그러나 부처님은 <금강경> 가르침대로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즉 간 곳도 없고 온 곳도 없고 또한 머문 데도 없으니 도솔천에서 온 것도 아니며 비니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또한 쌍림에서 열반하지도 않은 것이다.

중생들이 모두 본래 부처인 줄 모르고 업장에 가려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으니 이를 해탈하여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자 어쩔 수 없이 여덟 가지 형상을 보여 중생을 깨우치게 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8상성도(八相成道)라 하고 부처님이 너도 나와 같이 생로병사를 잘 관찰하고 발심하여 도를 닦는 동안 수많은 수행 저해 요소를 조복 받아 한 소식을 깨쳐서 견성성불을 하게 된 뒤 중생을 제도하게 되고 열반에 든다.

8상의 상(相)은 형상이니 보여준다는 뜻이다. 중생이 없으면 보여줄 필요가 없고 관객이 없다면 연극을 할 일이 없다. 부처님은 상주일체불타야중(常住一切佛陀耶衆), 즉 시간과 공간 없이 항상 모든 부처님이 계신다 하지 않는가. 중생 쪽에서는 8상이 있지만 부처 쪽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이 대 우주에 항상 계시니 도솔천 가비라 마야부인의 몸이 따로 없으며 한 중생도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큰 의심이 나야 한다. 의심이 나면 수행인이고 의심이 나지 않으면 6도를 윤회할 중생이다. 그러려니 생각하거나 이해만 하고 말거나, 지식으로만 알면 도를 구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도는 명사가 아니라 구하는 노력이 덧대어져야 진정한 도이다.

부처님은 태어나시기 전에 중생 모두를 제도하셨다는데 나는 왜 아직까지 중생으로 남아있는가? 부처님 말씀이 거짓인가 내가 거짓인가? 거짓인 줄 아는 자는 거짓이 아니다. 부처님도 나도 거짓이 아닌 그 곳에서 깊은 의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無)자나 시심마(是甚麼),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만이 화두(話頭)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화엄경> ‘이세간품’의 1700 화두 중 하나로서, 한 화두를 깨치면 1700 화두를 모두 타파하게 된다. 화두는 고칙(古則) 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즉 말로써 말하기 이전의 모든 언어의 근본이자 중심이 되는 언어 표현의 전체이다.

고칙(古則)은 옛 법칙이란 자(字)의 해석으로 제불조사(諸佛祖師)로부터 정해진 원칙 또는 기준을 말하고 공안(公案)은 관청의 안건과 같이 수행자가 제불조사의 경지를 시험하는 필수의 문제이다. 열심히 공부한 관리를 올바르게 뽑기 위해 여러 관문의 시험 문제를 내는 것과 같다. 실력이 출중한 사람은 어떤 문제도 막힘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화두를 완벽히 깨쳤다면 1700 공안의 통과가 거침없다. 1700 공안을 다 통과할 필요는 없다. 소를 아는 사람은 담 밖에 보이는 소 뿔 만으로도 소인 줄 알아보듯 하나의 화두에 전력을 다하면 그 깨달음을 스스로 점검하거나 선지식의 권유로 다른 화두를 들어볼 수 있다.

선지식은 도(道)를 깨치고 다른 수행자를 깨치게 하는 고승(高僧)이다. 도를 깨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이 세상 가장 고귀한 분이 선지식이다. 이름 난 분이라 하여 선지식인 것이 아니요, 은둔해 있다고 해서 선지식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자기 공부에 전력을 다한 후 안목이 열리면 시절인연이 올 수 있다. 스승과 제자는 대개 문답(問答)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것은 시절인연이다. 꽃이 피니 봄이 온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마음을 보이니 가섭존자가 미소 지어 부처님의 마음등불을 전해 받은 이치이다. 이를 사법(嗣法)이라 하며 법을 전해준 분을 법사(法師)라 하고 전해 받은 분을 제자(弟子)라 한다. 또는 이를 건당(建幢)이라 하고 법맥(法脈)을 이었다 하여 새로 당호(幢號)를 받아 지니며 이 이름이 스님들의 대표적인 이름이 된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