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시고 장례절차를 물어온 아난다에게 일반 신도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너희들은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고 수행하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그 장례절차까지도 수행을 위해서는 신도들에게 맡겨야 할 정도로 수행자는 정진이 본분사라는 것이다. 심지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위해 접어야 할 정도로 수행이 본분사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스님들을 간혹 ‘성직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말보다는 ‘수행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깨달음과 수행은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큰스님 말씀처럼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처럼 쉽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행이 곧 나일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평생을 수행 속에 있어도 한소식을 못하고 생을 달리 하는 이들도 있고, 평생을 이 선방 저 선방 기웃거리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

깨달음이 쉽다고 해도, 또는 어렵다고 해도 수행 없이는 결코 이룰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의 지도자들에 비해서 불교 수행자들에 대한 잣대는 엄격하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일체를 놓는 것에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속적인 탐욕에 물들어 있거나 쾌락을 탐하고 내 것을 만들어간다면 수행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를 비판하셨다. 먹고살기 위해 수행자인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도 인도로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마다 수행자인척 하고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수행자의 복색을 하고 마치 참선하는 것처럼 앉아있는 그들은 순례객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즉시 털고 일어난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순례객들의 자그마한 보시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보시를 강요하거나 손을 벌리고 구걸하고 심지어 중요한 예배처를 점령하고 있는 모습도 보게 되는데 불쾌감마저 준다.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혹시 부처님께서 비판하셨던 사명외도의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절을 일으키고 신도를 맞이하는 것이 수행이나 전법을 위한 것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자신의 삭발한 머리를 만져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수행과는 관계없이 독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추앙받는 우리 불교의 현실에서 태고종으로 출가하고 수행해 나가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다보니 불교학을 공부하기보다는 범음 범패를 먼저 공부하고 음양오행을 배우게 된다. 속된 말로 재받이나 인생상담 등이 먼저이고 신도를 교화하고 수행정진 하는 일은 뒷전인 경우도 많다. 그러니 출가수행의 근본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총림 선암사에서 중앙승가강원 총동문회 주관으로 ‘선(禪) 지도자 양성교육’이 열려 50명의 중진스님들이 동참했다. 참선의 대가 지허스님으로부터 선 강의를 듣고 가부좌를 틀고 참선실수를 하는 등 스님들은 출가 때의 초심을 돌이키며 진지하게 임했다고 한다. 대부분이 종단의 중진이고 각자 주지 소임을 맡고 있기에 바쁜 사정들이 있을 텐데도 만사를 제쳐놓고 짧은 기간이나마 총림에 모여 선 공부를 한 열정과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총동문회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에 공부한 내용을 상좌스님이나 신도들에게도 가르치고 같이 수행하는 수행가풍이 진작되는 작은 단초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우리 종단은 개별사암 중심일 수밖에 없지만 종단이나 단체 차원에서 이렇게 출가 본분으로 돌아갈 기회를 앞으로도 자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종단의 위상 정립과 발전도 마음을 닦는 수행에 근간을 두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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