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三學)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와 밀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강조되어온 불교수행의 핵심 키워드

삼학경(三學經)

[원문]

(八三二) 如是我聞 :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 “有三學. 何等為三? 謂增上戒學․增上意學․增上慧學. 何等為增上戒學? 若比丘住於戒波羅提木叉, 具足威儀行處, 見微細罪則生怖畏, 受持學戒, 是名增上戒學. 何等為增上意學? 若比丘離諸惡不善法, 有覺有觀, 離生喜樂, 初禪具足住, 乃至第四禪具足住, 是名增上意學. 何等為增上慧學? 若比丘此苦聖諦如實知, 此苦集聖諦․此苦滅聖諦․此苦滅道跡聖諦如實知, 是名增上慧學.”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三學餘經, 如前念處說.
如禪, 如是無量․無色. 如四聖諦, 如是四念處․四正斷․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四道․四法句․止觀修習, 亦如是說.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배움[三學]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이른바 보다 높은 계율을 배움[增上戒學], 보다 높은 선정을 배움[增上定學],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增上慧學]이니라.
보다 높은 계율을 배움이란 무엇인가? 만일 비구가 계목(戒目)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머물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바른 행동의 활동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학습계목을 받아 지닌다. 이것을 보다 높은 계율을 배움이라고 하느니라.
보다 높은 선정을 배움이란 무엇인가? 만일 비구가 모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고, 추론[覺]과 성찰[觀]은 있지만, 일어남을 떠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고 … (내지) … 제 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을 보다 높은 선정을 배움이라고 하느니라.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이란 무엇인가? 만일 비구가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라고 사실 그대로 안다. 이것을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삼학경>의 나머지 부분은 앞에서 염처(念處)에 대해 설명한 것과 같다. 선정을 설하신 소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량(無量)․무색(無色)이다. 사성제(四聖諦)와 같이 사념처(四念處), 사정단(四正斷),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분(七覺分), 팔성도(八聖道), 사도(四道), 사법구(四法句), 지관수습(止觀修習)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설하셨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30권 제832경 <삼학경(三學經)>(T2, p.213c)이다. 이 경에 대응하는 니까야는 AN3:88 Sikkha-sutta(AN. Ⅰ. 235)이다. <식카-숫따(Sikkha-sutta, 學經)>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3집 제9장 <사문품(沙門品)>에 수록되어 있다.

이 경은 불교의 수행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계(戒)․정(定)․혜(慧) 삼학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 경은 붓다께서 사왓티(Sāvatthī)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여러 비구들에게 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경에 대응하는 <식카-숫따>에서는 설법 장소와 설법 대상자가 생략되어 있다. 이 경의 가르침은 출가 사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 혹은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삼학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와 밀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강조되어온 불교수행의 핵심 키워드이다.

이 경에서 가장 중요한 경문인 한역의 “何等為三? 謂增上戒學․增上意學․增上慧學.”을 ≪한글대장경≫에서는 “어떤 것이 그 세 가지인가? 왕성한 계율 공부[增上戒學]․왕성한 마음 공부[增上意學]․왕성한 지혜 공부[增上慧學]를 말한다.”고 번역했다. 위 한문 문장에 해당하는 빨리어 원문은 “katmā tisso? adhisīlasikkhā, adhicittasikkhā, adhipaññāsikkhā.”이다.

이 부분을 대림스님은 “무엇이 셋인가? 높은 계를 공부지음, 높은 마음을 공부지음, 높은 통찰지를 공부지음이다.”[대림스님 옮김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6), p.545]라고 번역했고, 전재성 박사는 “세 가지란 무엇인가?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이다.”[전재성 역주 ≪앙굿따라니까야≫ 제3권(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275]라고 번역했다.

한역에서는 빨리어 ‘아디실라식카(adhisīlasikkhā)’를 ‘증상계학(增上戒學)’이라고 번역했고, ‘아디찟따식카(adhicittasikkhā)’를 ‘증상의학(增上意學)’이라고 번역했으며, ‘아디빤냐식카(adhipaññāsikkhā)’를 ‘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 번역했다. 빨리어 ‘아디(adhi)’는 ‘위에, 더 높은’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증상(增上)’이라고 번역했다.

첫째, ‘실라식카(sīlasikkhā)’는 ‘계를 배운다’ 혹은 ‘계를 공부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글자 그대로 ‘계학(戒學)’이라고 번역했다.
둘째, ‘찟따식카(cittasikkhā)’는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심학(心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아디(adhi)’와 ‘찟따(citta)’의 합성어인 ‘아디찟따(adhicitta)’는 ‘증상심(增上心)’ 혹은 ‘선정(禪定)’으로 번역된다. 증상심이란 ‘보다 차원 높은 선정 상태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증상심(增上心)’은 ‘증상만(增上慢)’과 혼동하기 쉽다. 증상만(增上慢)은 아직 증과(證果)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미 이르렀다고 오인(誤認)하여 자만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전자의 증상심은 보다 차원 높은 선정 상태의 마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후자의 증상만은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는 자만심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아디찟따(adhicitta)’를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고 번역하면, ‘증상만을 배움’이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할까봐 염려하여 중국의 역경가는 이 단어를 ‘증상의학(增上意學)’으로 번역한 것 같다. 만약 ‘아디찟따(adhicitta)’를 ‘보다 차원 높은 선정 상태의 마음’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살려 ‘증상정학(增上定學)’이라고 번역했다면, 계․정․혜 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붓다의 본래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빤냐식카(paññāsikkhā)’는 ‘지혜를 배운다’ 혹은 ‘지혜를 공부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글자 그대로 혜학(慧學)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을 대림 스님은 ‘높은 통찰지를 공부지음’이라고 번역했다. 그냥 ‘지혜를 배움’ 혹은 ‘지혜를 공부함’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공부지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필자는 이 경문을 “세 가지란 무엇인가? 이른바 보다 높은 계율을 배움[增上戒學], 보다 높은 선정을 배움[增上定學],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增上慧學]이다.”라고 옮겼다. 한역의 ‘증상의학(增上意學)’을 ‘증상정학(增上定學)’으로 바꾸어 번역했다. 그래야 계․정․혜 삼학을 강조한 붓다의 본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첫째, ‘계율을 배움’ 혹은 ‘계율을 공부함’이란 무엇인가? 한역에서는 “계목(戒目)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머물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바른 행동의 활동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학습 계목을 받아 지닌다.”고 했다. 이에 해당하는 니까야에서는 “계를 잘 지키고, 빠띠목카(pātimokkha, 戒目)를 수호하고 단속하면서 머문다.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학습계목을 받아 지닌다.”[AN. Ⅲ. 113, “sīlavā hoti, pātimokhasaṃvarasaṃvuto viharati. ācāragocarasampanno, anumattesu vajjesu bhayadassāvī, samādāya sikkhati sikkhāpadesu.”]고 했다. 이것은 계를 잘 지키고, 바라제목차에 어긋나지 않게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사소한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배워야 할 계목들을 받아 지닌다는 뜻이다.

둘째, ‘선정을 배움’ 혹은 ‘선정을 공부함’이란 무엇인가? 한역에서는 “모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고, 추론[覺]과 성찰[觀]은 있지만, 일어남을 떠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고 …(내지)…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고 했다. 이에 해당하는 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不善法]에서 떠난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가 있고, 멀리 여읨에서 생겼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 2선을 … 제 3선을 …제 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AN. Ⅰ. 235, “bhikkhu vivicc’eva kāmehi … pe … catuṭṭhaj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고 했다. 한역 <삼학경>과 니까야의 <식카-숫따>에서 모두 초선(初禪, paṭhamajjhāna)만 언급하고, 이선(二禪, dutiyajjhāna), 삼선(三禪, tatiyajjhāna), 사선(四禪, catutthajjhāna)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다른 경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⑴ 초선은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불건전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첫 정려[황홀경]에 이른다. 이것은 해탈을 낳는 것이며, 추론(尋, vitakka)․성찰(伺, vicāra)․기쁨(喜, pīti)․행복(樂, sukha)을 얻는다. 추론과 성찰을 한역에서는 각(覺)과 관(觀)으로 번역했다. 각(覺, vitakka)은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 작용이고, 관(觀, vicāra)은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 작용이다. 추론과 성찰을 심사(尋伺)로 번역하기도 한다. 심(尋)은 ‘일으킨 생각’이라는 뜻이고, 사(伺)는 ‘지속적인 고찰’이라는 뜻이다.

⑵ 제2선은 추론과 성찰을 제거하여 두 번째 정려를 얻는다. 그것은 안으로 고요하다. 마음이 통일된다. 추론과 성찰 없이 집중이 생겨나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여기서는 추론과 성찰[尋伺], 즉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⑶ 제3선은 기쁨에도 초연하고, 평정에 머무르고, 깨어있고 알아차리면서, 몸소 행복함을 누린다. 니까야에서 제3선은 다섯 가지 요소, 즉 평정(upekkha)․깨어있음(sati)․알아차림(sampajañña)․행복(sukha)․일경성(一境性, ekaggat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⑷ 제4선은 행복과 괴로움을 여의고, 기쁨과 슬픔은 이미 사라진다. 이것은 행복하지도 괴롭지도 않으며, 평정과 깨어있음의 순수를 의미한다. 제4선은 세 가지 요소, 즉 평정(upekkha)․깨어있음(sati)․심일경성(cittekaggatā)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윳따 니까야≫에서 “초선에서는 언어가 소멸하고, 제2선에서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하고, 제3선에서는 기쁨[희열]이 소멸하고, 제4선에서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SN. Ⅳ. 220]고 했다.

셋째, ‘지혜를 배움’ 혹은 ‘지혜를 공부함’이란 무엇인가? 한역과 니까야 모두 “비구가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라고 사실 그대로 안다.”고 했다. 즉 사성제의 원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 곧 지혜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혜는 지계와 선정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지혜는 지식과 체험을 통해 얻게 된다. 체험보다 훌륭한 공부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체험이 곧 진리는 아니다. 체험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많은 오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ñāṇādassana)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계 정 혜 삼학을 통해 현법열반(現法涅槃, diṭṭhadhamma)을 증득하는데 있다.

                                     마 성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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