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범천의 수레이고 법의 수레이며, 번뇌와의 싸움에서 위없는 승리”

바라문경(婆羅門經)

[원문]

(七六九)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尊者阿難晨朝著衣持鉢, 入舍衛城乞食.
時, 有生聞婆羅門乘白馬車, 眾多年少翼從, 白馬․白車․白控․白鞭, 頭著白帽․白傘蓋, 手執白拂, 著白衣服․白瓔珞, 白香塗身, 翼從皆白, 出舍衛城, 欲至林中教授讀誦, 眾人見之咸言: “善乘! 善乘! 謂婆羅門乘.”
時,尊者阿難見婆羅門眷屬․眾具一切皆白, 見已, 入城乞食. 還精舍, 舉衣鉢, 洗足已, 往詣佛所, 稽首禮足, 退坐一面, 白佛言: “世尊! 今日晨朝著衣持鉢, 入舍衛城乞食, 見生聞婆羅門乘白馬車, 眷屬․眾具一切皆白, 眾人唱言: ‘善乘! 善乘! 謂婆羅門乘.’ 云何? 世尊! 於正法․律, 為是世人乘? 為是婆羅門乘?”
佛告阿難: “是世人乘, 非我法․律婆羅門乘也. 阿難! 我正法․律乘․天乘․婆羅門乘․大乘, 能調伏煩惱軍者, 諦聽, 善思, 當為汝說. 阿難! 何等為正法․律乘․天乘․婆羅門乘․大乘, 能調伏煩惱軍者? 謂八正道―正見乃至正定. 阿難! 是名正法․律乘․天乘․梵乘․大乘, 能調伏煩惱軍者.”
爾時, 世尊即說偈言:
信戒為法軛, 慚愧為長縻,
正念善護持, 以為善御者,
捨三昧為轅, 智慧精進輪,
無著忍辱鎧, 安隱如法行,
直進不退還, 永之無憂處,
智士乘戰車, 摧伏無智怨.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아난 존자는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으로 들어가 걸식하려고 하였다.

그때 흰 마차를 탄 생문(生聞) 바라문이 있었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좌우에서 그를 따랐다. 그는 늘 흰 말, 흰 수레, 흰 고삐, 흰 채찍을 사용하였고, 머리에는 흰 모자를 쓰고 흰 일산을 썼으며, 손에는 흰 총채를 잡고 흰 옷을 입고 흰 영락(瓔珞)을 걸쳤으며, 흰 향(香)을 몸에 바르는 등 모두 흰 빛깔을 선호하였다.

가르침을 듣고 읽고 외우기 위해 사위성을 나와 숲 속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말하기를 "훌륭한 수레구나, 훌륭한 수레구나! 범천의 수레[婆羅門乘]라고 할 만 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때 아난 존자는 바라문의 권속들과 모든 차림이 온통 흰 빛깔인 것을 보고는, 성에 들어가 걸식하고 정사로 돌아와  가사와 발우를 두고 발을 씻은 뒤에,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오늘 이른 새벽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러 사위성으로 들어가다가 생문 바라문이 흰 마차를 탔는데, 그 권속들과 모든 차림들이 온통 흰 빛깔이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훌륭한 수레구나, 훌륭한 수레구나! 범천의 수레라고 할 만 하구나!’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존이시여, 바른 법(法)과 율(律)에서는 그런 것을 세속 사람의 수레라고 합니까, 아니면 범천의 수레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속 사람의 수레요, 나의 법과 율이나 범천의 수레는 아니다. 아난아, 나의 바른 법과 율의 수레는 하늘의 수레, 범천의 수레, 큰 수레[大乘]로서 번뇌의 군사를 능히 항복 받는 것이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마땅히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아난아, 어떤 것을 나의 바른 법과 율의 수레, 하늘의 수레, 범천의 수레, 큰 수레로서 번뇌의 군사를 능히 항복 받는다고 하는가? 그것은 이른바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니, 즉 바른 견해와 … (내지) … 바른 선정을 말한다. 아난아, 이것을 ‘바른 법과 율의 수레, 하늘의 수레, 범천의 수레, 큰 수레로서 번뇌의 군사를 능히 항복 받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믿음과 계율로 법의 굴레를 삼고
부끄러워함[慚愧]으로 긴 고삐를 삼아
바른 생각으로 잘 지켜 가지면
그를 일러 훌륭한 마부[御者]라고 하느니라.

평정과 삼매로 멍에를 삼고
지혜와 정진으로 바퀴를 삼으며
집착 없음과 참음으로 갑옷을 삼으면
안온하고 법답게 행할 수 있다.

바로 곧게 나아가 물러나지 않고
근심 없는 곳으로 아주 가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싸움의 수레 탔더라도
지혜 없는 원수를 무찔러 항복받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28권 제769경 <바라문경(婆羅門經)>(T2, pp.200c-201a)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45:4 Brāhmaṇa-sutta(SN. Ⅴ, pp.4-6)이다.

한역의 ‘바라문승(婆羅門乘)’은 ‘범승(梵乘)’으로 모두 바꾸어야 한다. 빨리어 ‘brahmayāna’는 ‘범천의 수레[梵乘]’로 번역해야 옳다. 빨리어 ‘brahmā’는 범(梵) 혹은 범천(梵天)으로 번역되고, brāhmaṇa는 바라문(婆羅門) 혹은 바라문종족(婆羅門種族)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brahmayāna’는 ‘바라문의 수레’가 아니라 ‘범천의 수레’인 것이다. 범천의 수레란 최상의 수레(seṭṭhayāna)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경에 나오는 ‘생문(生聞)’ 바라문은 ‘자눗소니(Jāṇussoṇī)’ 바라문을 말한다. 자눗소니 바라문은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의 궁중제관(purohita)으로서 매우 부유한 바라문이었다. 그는 꼬살라의 수도 사왓티에 살면서 제따와나(Jetavana)에 계신 붓다를 자주 찾아뵙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바라문이면서 붓다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당시 꼬살라의 잇차낭갈라(Icchānaṅgala)에는 부유한 바라문들이 살고 있었다. 이른바 짱끼(Caṅkī), 따룩카(Tārukkha), 뽁카라사띠(Pokkharasāti), 또데이야(Todeyya) 등은 당시 이름난 부유한 바라문들이었다.(Sn. p.115)

그 중에서도 특히 자눗소니 바라문은 최상의 마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마차는 흰 암말에 휜 멍에를 얹었으며, 흰 고삐, 휜 막대, 흰 일산으로 장식되었고, 그는 흰 터번, 흰 옷, 흰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흰 부채로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 전체가 온통 흰색으로 장식된 그의 마차를 보고 사람들은 ‘범천의 수레(梵乘, brahmayāna)’와 같다고 감탄했던 것이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 “세존이시여, 바른 법(法)과 율(律)에서는 그런 것을 세속 사람의 수레라고 합니까, 아니면 범천의 수레라고 합니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붓다는 “자눗소니 바라문이 온통 흰색으로 장식한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수레를 타고 다닐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타는 수레[世人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수레를 보고 ‘훌륭한 수레구나, 훌륭한 수레구나, 범천의 수레라고 할 만하구나!’라고 외쳐도 그것은 ‘범천의 수레’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붓다는 자신이 말한 “바른 법과 율의 수레[正法律乘]는 하늘의 수레[天乘], 범천의 수레[梵乘], 큰 수레[大乘]로서 번뇌의 군사를 항복 받는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 경의 핵심이다.

니까야에서는 “이와 같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을 두고 범천의 수레라고도 하고, 법의 수레라고도 하며,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無上戰勝]라고도 한다.”(SN. Ⅴ, p.5)고 했다. 이것은 팔정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범천의 수레이고, 법의 수레(dhammayāna)이며,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전쟁이란 번뇌와의 싸움을 의미한다.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닦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팔정도를 닦고 익히면 탐욕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고, 성냄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며,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눗소니 바라문이 타고 다니는 훌륭한 수레, 즉 온통 흰색으로 장식한 마차를 최상의 마차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에 불과할 뿐 진정한 ‘진리의 수레’는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법과 율에서 본 탈 것, 즉 수레나 마차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를 의미한다. 따라서 팔정도야말로 법의 수레[法乘]이며, 법의 수레바퀴[法輪]인 것이다.

한역에서는 팔정도의 항목과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생략했다. 그러나 니까야에 의하면, 붓다는 “아난다여, 올바른 견해(正見)를 닦고 익히면 탐욕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고, 성냄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고,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된다. 올바른 사유(正思惟)를 … 올바른 언어(正語)를 … 올바른 행위(正業)를 … 올바른 생활(正命)을 … 올바른 정진(正精進)을 … 올바른 통찰(正念)을 … 올바른 선정(正定)을 닦고 익히면 탐욕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고, 성냄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고,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을 두고 범천의 수레라고 하고, 법의 수레라고 하며,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無上戰勝]라고 한다.”(SN. Ⅴ, pp.5-6)고 말했다.

≪상윳따 니까야≫(SN45:8)의 <위방가숫따(Vibhaṅga-sutta, 分析經)>에서는 팔정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즉 ⑴올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正見)란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지혜를 뜻한다.

⑵올바른 사유(sammā-saṅkappa, 正思惟)란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치지 않음에 대한 사유를 뜻한다.

⑶올바른 언어(sammāvācā, 正語)란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이다.

⑷올바른 행위(sammā-kammanta, 正業)란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⑸올바른 생활(sammā-ājīva, 正命)이란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⑹올바른 정진(sammā-vāyāma, 正精進)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는 불선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은 제거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법(善法)들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선법들은 사라지지 않게 애쓰는 것이다.

⑺올바른 통찰(sammā-sati, 正念)이란 분명한 알아차림을 말한다. 이를테면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물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물고,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것을 올바른 통찰이라고 한다.

⑻올바른 선정(sammā-samādhi, 正定)이란 초선(初禪), 제이선(第二禪), 제삼선(第三禪), 제사선(第四禪)에 머무는 것이다.(SN. Ⅴ, pp.8-10)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계는 크게 정통파인 바라문과 신흥 사상가 그룹인 사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행했던 바라문의 삶을 따르지 않고 오직 제사를 집전하는 직업적인 사제(司祭)로 타락해 있었다. 반면 사문들은 베다(Veda)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시기에 출가하여 유행생활을 하면서 진리를 추구했던 수행자였다.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모두 포기하고 집을 떠나 유행자 혹은 편력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많은 재산과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훌륭한 저택에서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으며, 준마가 이끄는 수레와 많은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바라문들의 타락한 생활상에 대해 붓다는 크게 비판했다.(Sn. pp.50-55)

그런데 오늘날 수행자인 사문들이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처럼 제사를 지내고 받은 재물로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붓다시대의 타락한 바라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일생동안 화려한 마차나 수레를 타지 않고 맨발로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교화했던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분명히 통탄할 것이다.

                          마 성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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