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등불을 켜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불성을 깨우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연등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불성을 발현하고 부처님 되기를 서원합니다

▲ 법진스님(태안 보타락가사 회주)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시고 삼계의 대 도사이며 사생[胎卵濕化]의 자부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과 똑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의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사바세계에 오신 성스러운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법계는 어떠한 전지전능한 신의 독선적 점유물이나 주종(主從)간의 관계인줄 알고 있던 중생들에게 ‘준동함영(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두 평등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신 성스러운 날, 우리는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팔상성도를 통해 위대한 부처님의 생애를 다시 음미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에 계시면서 많은 하늘나라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에 계시면서 사바세계 중생을 제도해야겠다는 자비하신 마음으로 사천왕에게 탄생하실 곳을 물색하게 하였는데 중인도 가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왕비가 청정하여 모든 백성이 어진 어버이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 곳이 마땅하다고 사뢰었습니다.
중인도 가비라국은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탁월한 정치로 태평성세를 이어오고 있었지요. 그러나 오직 정반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것이 궁중과 백성들의 큰 근심거리였어요.

어느 날 마야왕비가 살포시 잠이 들었는데 크고 흰 코끼리가 도솔천으로부터 달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대지가 진동하며 잡귀와 악마는 무서워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에는 대 광명이 비추어 다섯 가지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하고 향기가 온 우주에 가득한 태몽을 꾸었습니다. 이것이 마야부인께서 장차 부처님이 되시는 싯다르타 태자를 잉태하신 태몽입니다.

두번째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입니다. 만삭으로 곧 아기를 낳을 마야부인께서는 당시 풍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운 룸비니동산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고운 꽃들을 보시다가 산기를 느껴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시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치셨습니다. 부처님의 이 탄생게에는 불교의 핵심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유아독존(唯我獨尊)’에서 ‘아(我)’는 부처님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모든 존재로 곧 중생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존귀성을 선언한 위대한 말씀입니다. 즉 각자 하나하나가 우주의 고귀한 부처님으로서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탄생은 가비라국의 영광뿐 아니라 온 우주의 영광이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각 감옥소에서는 극악무도한 죄수들만 빼고는 모두 석방했으며 사형수에게도 참형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하시는 그 순간부터 모든 중생들에게 은혜의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정반왕은 점성가인 아시타 선인을 불러서 싯다르타 태자의 관상을 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선인은 관상을 보다말고 엉엉 울었습니다. 깜짝 놀란 정반왕이 그 이유를 묻자, 선인은 어린 아기 태자에게 오체투지를 하고난 후 말하기를 “32상(32가지 잘 생긴 것)과 80종호(80가지 특징)를 갖추신 태자께서는 세계를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시지 않으면 출가하여 도를 닦아 법계중생을 제도하실 선각자가 되실 것이 분명한데 나는 나이가 많아서 그 세월을 보지 못할 것이기에 너무 슬퍼서 운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입니다. 정반왕과 문무 대신들은 기쁨 중에도 항상 수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예언가 선인의 말처럼 싯다르타가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삼계 대도사, 부처님이 될 것이 걱정이 되었지요. 궁중에서는 없는 것 없이 치장하고 아름다운 무희들에게 춤과 노래를 밤낮으로 하게 하여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할 마음을 내지 않고 궁중생활에 애착을 갖게 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성장하면서 남다르게 자비심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시종들과 우연히 동문을 지나다 허리가 굽고 꾀죄죄한 노인을, 남문에서는 병들어 신음하는 병자를, 서쪽 문에서는 죽어서 송장을 실어 나르는 상여를 보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태자는 ‘왜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생겨 마음이 너무나 답답하고 슬펐습니다.
그런 다음 북문을 나갔다가 사문을 보았는데, 그 수행자는 모든 고뇌와 생사를 초탈하는 수행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번뇌를 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굴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번뇌에 속박되지만 수행을 하여 거꾸로 번뇌를 속박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입니다. “인간의 세상은 괴롭고 허무하구나. 내가 부처가 되어 저 고통 받는 중생을 다 제도하여 해탈을 얻게 하리라.” 태자는 차익이라는 마부를 길잡이로 하여 성을 넘어 출가를 합니다. 그때 태자는 아름다운 야수다라 공주와 결혼을 해 라훌라라는 아들까지 두었습니다.

다섯째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입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해박한 진리를 회통(會通)하고자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태양이 작열하고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고통을 이기며 수행하는 바라문의 수행과정을 답습도 하면서 고행을 했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고행이 참 진리를 터득하게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 설산(히말라야)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6년을 하루같이 수행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중생들을 위하여 무변법계에 가득한 복과 지혜를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는 고통이 없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과 똑같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들어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요히 삼매에 들어 중생들의 근기를 사량(思量)하고 계셨습니다.

▲ 4월 30일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서 열린 전통문화마당에서 한 어린이가 관불의식을 하고 있다. 관불의식은 부처님 탄생을 찬탄하는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번뇌와 탐욕을 씻어내는 것을 상징한다.
그때에 마왕 파순이 부처님께 와서 간청하여 말하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것을 권했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전도(傳道)되면 모든 중생은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니 악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마왕이 중생을 지배하면서 괴롭힐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성불을 하셨으니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머물지 마시고 천상에 오르시어 천상사람을 위하여 설법을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파순이여! 잘 들어라. 나는 이제 사바세계 모든 중생을 위하여 위없는 감로(甘露)법을 설하리라. 마치 큰 거울이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이 비추듯이 평등하게 모든 고통에서 해탈하여 영원불멸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파순은 큰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의 대 광명의 법이 있는 한 마왕은 발붙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파순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아버지의 근심을 알고 말하였습니다. “걱정마세요. 우리 세 자매가 힘을 합쳐서 태자를 유혹하여 마음을 혼돈시키겠습니다.”
요염하고 교태로운 아름다움이 모든 천녀들 가운데 으뜸인 세 딸은 싯다르타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마왕 파순은 아홉 가지 이변(異變)을 일으켜 성도(成道)를 방해하려 했으나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곱 번째는 녹원전법상(鹿苑傳法相)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6년이라는 긴 세월에 수많은 고통과 난관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이루어 우주의 제일가는 성인 붓다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 최초로 이 법을 설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예전에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갔습니다. 다섯 비구는 그때까지도 자신을 학대하는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멀리서 오는 부처님을 힐끗 보고는 아는 척도 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모두 이상한 힘에 끌려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예배를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첫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

“수행자들아!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길이 있느니라. 그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 길이다. 수행자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바로 중도를 깨달았으며, 중도에 의하여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을 버리고 평화로움 해탈의 기쁨을 얻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중도와 사성제, 팔정도 등을 설하여 연기의 이치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이라 합니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다섯 수행자 가운데 교진여가 맨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곧 나머지 수행자 모두 그 가르침을 이해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 부처님께서는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제자로 삼았고, 이들에게 전도를 떠나기를 권유하셨지요.

여덟째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칠불통계게를 제자들에게 부촉하셨으니 ‘제행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자정기의(自淨其意)가 시제불교(是諸佛敎)니라 -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짓은 하지 말라. 청정한 마음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어리석은 미혹을 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극락과 열반은 저승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자연의 원리와 인생의 근본인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45년 동안 가르침을 펴시고 사라쌍수 아래서 조용히 법신으로 나투셨습니다.

80세 되던 해 부처님은 아난존자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내게 비밀은 없으며 육신은 이제 가죽 끈에 매여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낡은 수레와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의심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 번이나 물으신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처님 오심을 봉축하며 절마다, 거리마다 연등을 켜고 등불을 밝힙니다. 연등은 부처의 씨앗인 불성을 상징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등불을 켜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불성을 깨우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연등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불성을 발현하고 부처님 되기를 서원합니다. 그러므로 연등을 켜면서 우리는 스스로가 부처라는 것을 깊이 새기고 과연 불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여법하게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겠지요. 불자로서 여법하게 그리고 투철하게 살지 못했다고 느끼면 참회하고 부처님의 진실한 제자로서 거듭나도록 자신을 추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우리도 올곧게 걸어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스스로 성불의 주인공이 되도록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는 어리석은 중생이 아닌, 이 우주의 중심이며 주인이고, 이미 우리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불기 2561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모든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바르게 실천하며, 또 널리 전하겠다는 서원을 새롭게 세우면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된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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