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은 음식, 교만, 갈애, 음욕으로 생긴 것이기에 음식을 의지해 음식을 끊어야 하고,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어야 하며, 갈애를 의지해 갈애를 끊어야 하고, 음욕은 행하지 않으면 끊어진다”

 비구니경(比丘尼經)

[원문]

(五六四)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尊者阿難, 亦在彼住. 時, 有異比丘尼於尊者阿難所, 起染著心, 遣使白尊者阿難: “我身遇病苦, 唯願尊者哀愍見看.” 尊者阿難晨朝著衣持鉢, 往彼比丘尼所. 彼比丘尼, 遙見尊者阿難來, 露身體臥床上. 尊者阿難, 遙見彼比丘尼身, 即自攝歛諸根, 迴身背住. 彼比丘尼, 見尊者阿難攝歛諸根, 迴身背住, 即自慚愧, 起著衣服, 敷坐具, 出迎尊者阿難, 請令就座, 稽首禮足, 退住一面. 時, 尊者阿難為說法言: “姊妹! 如此身者, 穢食長養․憍慢長養․愛所長養․婬欲長養. 姊妹! 依穢食者, 當斷穢食, 依於慢者, 當斷憍慢, 依於愛者, 當斷愛欲. 姊妹! 云何名依於穢食, 當斷穢食? 謂聖弟子, 於食計數思惟而食, 無著樂想․無憍慢想․無摩拭想․無莊嚴想, 為持身故․為養活故․治飢渴病故․攝受梵行故, 宿諸受令滅, 新諸受不生, 崇習長養, 若力․若樂․若觸, 當如是住. 譬如商客以酥油膏, 以膏其車, 無染著想․無憍慢想․無摩拭想․無莊嚴想,為運載故, 如病瘡者, 塗以酥油, 無著樂想․無憍慢想․無摩拭想․無莊嚴想, 為瘡愈故. 如是, 聖弟子, 計數而食, 無染著想․無憍慢想․無摩拭想․無莊嚴想, 為養活故․治飢渴故․攝受梵行故, 宿諸受離, 新諸受不起, 若力․若樂․若無罪觸安隱住. 姊妹! 是名依食斷食. 依慢斷慢者. 云何依慢斷慢? 謂弟子聞, 某尊者․某尊者弟子盡諸有漏, 無漏心解脫․慧解脫, 現法自知作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聞已, 作是念: ‘彼聖弟子盡諸有漏, 乃至自知不受後有. 我今何故不盡諸有漏, 何故不自知不受後有.’ 當於爾時則能斷諸有漏, 乃至自知不受後有. 姊妹! 是名依慢斷慢. 姊妹! 云何依愛斷愛? 謂聖弟子聞, 某尊者․某尊者弟子盡諸有漏, 乃至自知不受後有. 我等何不盡諸[有]有漏, 乃至自知不受後有. 彼於爾時能斷諸有漏, 乃至自知不受後有. 姊妹! 是名依愛斷愛. 姊妹! 無所行者, 斷截婬欲․和合橋梁.” 尊者阿難說是法時, 彼比丘尼遠塵離垢, 得法眼淨, 彼比丘尼見法․得法․覺法․入法, 度狐疑, 不由於他, 於正法․律, 心得無畏. 禮尊者阿難足, 白尊者阿難: “我今發露悔過: 愚癡不善, 脫作如是不流類事; 今於尊者阿難所, 自見過․自知過, 發露懺悔, 哀愍故!” 尊者阿難, 語比丘尼: “汝今真實自見罪․自知罪, 愚癡不善, 汝自知作不類之罪, 汝今自知․自見而悔過, 於未來世得具足戒. 我今受汝悔過, 哀愍故, 令汝善法增長, 終不退滅. 所以者何? 若有自見罪․自知罪, 能悔過者, 於未來世, 得具足戒, 善法增長, 終不退滅.” 尊者阿難為彼比丘尼, 種種說法, 示․教․照․喜已, 從座起去.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존자 아난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어떤 비구니가 존자 아난의 처소에서 염착심(念著心)을 일으켜 사람을 보내 존자 아난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하였다.
"제가 몸에 병이 들어 앓고 있습니다. 존자께서 가엾게 여기시어 살펴봐 주십시오."

존자 아난은 이른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를 가지고 그 비구니의 처소로 갔다. 그 비구니는 멀리서 존자 아난이 오는 것을 보고 벌거벗은 채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존자 아난은 멀리서 그 비구니의 몸을 보고 곧 모든 감각기관[根]을 단속하고 몸을 돌려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비구니는 존자 아난이 모든 감각기관을 단속하고 몸을 돌려 등진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러워[慚愧], 일어나 옷을 입고 자리를 펴고, 존자 아난을 나가 맞아들여 앉기를 청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서 있었다.

그때 존자 아난이 그를 위해 설법하였다.
“누이여, 이 몸은 더러운 음식으로 자라났고, 교만으로 자라났으며, 갈애로 자라났고, 음욕으로 자라난 것이오. 누이여, 더러운 음식을 의지해 더러운 음식을 끊어야 하고,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어야 하며, 갈애를 의지해 갈애와 음욕을 끊어야 하오.(이 부분은 ‘갈애를 의지해 갈애를 끊어야 하고, 음욕은 행하지 않음으로 끊어야 하오’로 고쳐야 할 것이다.)

누이여,  ‘더러운 음식을 의지해 더러운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성스러운 제자는 음식에 대해 분수를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먹되, 좋아하여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요, 살아가기 위해서요, 굶주리고 목마른 병을 고치기 위해서요, 범행(梵行)을 거두어 닦기 위해서이니, 과거의 모든 감정을 없애고 모든 새 감정을 생기지 않게 해, 숭상하고 익혀 증대시켜 나가야 합니다.

혹은 노력하거나, 안락하거나, 접촉하거나 하는 데 있어서도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는 것이오. 비유하면 마치 상인이 소유(酥油: 타락 기름)를 그 수레에 칠할 때,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싣고 운반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소.

또 마치 옴병[瘡病]을 앓는 사람이 소유를 바를 때, 집착하여 좋아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갈고 닦아내겠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옴병을 고치기 위해서인 것과 같소.

이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는 분수를 헤아려 먹되,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살아가기 위해서요, 굶주리고 목마름을 고치기 위해서요, 범행을 거두어 닦기 위해서이니, 과거의 모든 감정을 떠나고 모든 새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해 혹은 노력하거나, 안락하거나, 죄 없이 접촉함에 있어서도 안온하게 머물러야 하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음식을 의지해 음식을 끊는다.’는 것이오.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다.’고 했는데 어떤 것을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성스러운 제자는 아무 존자와 아무 존자 제자는 모든 번뇌[有漏]가 다하여, 번뇌 없이 심해탈(心解脫), 혜해탈(慧解脫)하고, 현세에서 스스로 자신이 증득한 줄을 알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는 말을 들으면, ‘저 성스러운 제자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 어째서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게 되오. 그러면 그는 그때 곧 모든 번뇌를 끊고 …(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다.’는 것이오.

누이여, ‘갈애를 의지해 갈애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성스러운 제자는 ‘아무 존자와 아무 존자 제자는 모든 번뇌를 다하여 …(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들은 어째서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했는가? …(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는데, 그는 그때 모든 번뇌를 끊고 …(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갈애를 의지해 갈애를 끊는다.’는 것이오. 누이여, 행하는 바가 없으면 음욕과 화합하는 다리[橋樑]도 끊어지는 것이오.”

존자 아난이 이렇게 설법하자, 그 비구니는 티끌과 때를 멀리 여의고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그 비구니는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으며, 의심을 벗어나, 남을 의지하지 않고도 바른 법과 율에서 마음에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존자 아난의 발에 예배하고 존자 아난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합니다. 어리석고 착하지 못해 어쩌다 이와 같은 씻지 못할 종류의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존자 아난이 계신 곳에서, 스스로 잘못을 보고 스스로 잘못을 알아 고백하고 참회하오니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존자 아난이 비구니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진실로 스스로 죄를 보고 스스로 죄를 알았구려. 어리석고 착하지 못해 짝할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그대는 스스로 알았고, 그대는 이제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서 잘못을 뉘우쳤으니, 미래 세상에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것이오. 나는 이제 가엾게 여겨 그대의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그대로 하여금 착한 법이 더욱 자라나 끝내 물러나거나 멸하지 않게 하겠소. 왜냐하면 만일 스스로 죄를 보고 스스로 죄를 알아 능히 잘못을 참회하는 사람은 미래 세상에서 구족계를 얻고, 착한 법이 더욱 자라나 끝내 물러나거나 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존자 아난은 이렇게 그 비구니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21권 제564경 <비구니경(比丘尼經)>(T2, p.148a-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AN4:159 Bhikkhunī-sutta(AN. Ⅱ. 144-146)이다.
이 경은 아난다(Ānanda, 阿難) 존자가 어떤 비구니에게 설한 것이다. 아난다 존자를 연모하던 어떤 비구니가 중병을 핑계로 다른 사람을 시켜 아난다 존자께 문병을 요청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니의 처소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비구니는 알몸을 드러낸 채 침상에 누워있었다. 아난다 존자는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꾸민 것임을 알고 그녀를 위해 이 경을 설하게 되었다.

아난다 존자는 그 비구니에게 “이 몸은 음식(飮食, āhāra), 교만(憍慢, māna), 갈애(渴愛, taṇhā), 음욕(婬欲, methuna)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의지해 음식을 끊어야 하고,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어야 하며, 갈애를 의지해 갈애를 끊어야 하고, 음욕은 행하지 않으면 끊어진다.”고 설했다. 이것이 이 경의 핵심이다.

음식에 의지해 음식을 끊어야 한다는 것은 음식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음식은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장식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이 몸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며, 상해를 방지하고 청정범행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는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은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건강하고 비난받지 않고 평온하게 머물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현재 상좌부불교의 공양게(供養偈)로 암송되고 있다.

교만이나 갈애를 의지해 교만이나 갈애를 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도 분발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기 위해 정진하게 된다. 이것이 교만이나 갈애를 의지해 교만이나 갈애를 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음욕은 행하지 않으면 끊어진다. 한역에서는 “행하는 바가 없으면 음욕과 화합하는 다리[橋梁]도 끊어진다(無所行者, 斷截婬欲․和合橋梁).”고 했다.

니까야에서는 “이 몸은 음욕에 의해 생겨난다. 음욕[성교]을 세존께서는 ‘다리[橋]의 파괴’라고 말씀하셨다(methunasambhūto ayaṃ bhagini kāyo methuno ca setughāto vutto Bhagavatā ti).”고 했다. 경에서 성교를 ‘다리[橋]의 파괴(setughāta)’로 표현했다. 왜냐하면 성교는 빠라지까(pārājika, 波羅夷), 즉 단두죄(斷頭罪)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난다 존자의 가르침을 듣고, 그 비구니는 진심으로 참회했다. 아난다 존자는 그 비구니의 참회를 받아들이고 격려한 뒤 자리를 떠났다.

                              마 성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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