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육(三淨肉)’은 임시 방편법 … 근본 취지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가르침”

현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육식을 금하거나 절제를 한다. 그 이유는 동물이라도 인간과 똑같이 그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특히 반려동물 애호가들 중에는 그동안 육식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례가 더러 있다.

가정에서 반려동물로 기르던 개조차 보신용으로 식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인간의 잔인성에 고개를 흔들며 고기를 끊게 됐다고 한다.

어떤 신실한 재가불자 중에는 애완용으로 기르던 개가 죽자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천도재를 올려달라는 신도들이 종종 있다.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발원해 달라면서 극진히 기도를 한다. 그럴 때면 소승은 평소와 같이 재가불자에게, 천도재를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몸과 정신이 깨끗해야 하므로 최소한 육식을 하지 말고 채식을 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살생한 고기를 먹음으로써 몸에 탁한 기운이, 자신은 물론 영가에게도 그 파장이 전달되어 기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승이 오랫동안 채식을 하면서 체험한 자신만의 영감이라고나 할까.

인간은 언제부터 채식을 했을까? 아니 언제부터 육식을 했을까?
그 연대는 사실상 불분명하다. 초기 그리스와 히브리 신화를 보면 원래 사람들은 과일만 먹었고, 고대 이집트 성직자들도 모두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역사적으로는 플라톤, 디오게네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부처님, 예수, 공자, 간디, 뉴턴, 슈바이처, 톨스토이 등 위대한 종교인들이나 철학자들도 대부분 채식주의자들이라고 하니 채식이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수행에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육류는 언제부터 섭취했을까? 인류학자들이 고인류의 화석분석을 통해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300만 년 전부터 육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고, 약 1만 년 전부터 가축을 사육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가축을 사육했다는 것은 유목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시기부터라 할 수 있다. 소는 주로 논밭의 경작용으로 사용했을 것이고, 말은 운송수단으로, 그외 양, 닭, 오리 등의 가축은 식용(食用)으로 하기 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소고기 먹는 것을 금기시했다고 한다. 특히 고려후기에는‘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여 소의 도축을 금했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고려는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살생을 금한 이유도 있겠지만 주된 원인은, 소는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동물로서 물자운반의 운송수단으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 한 마리가 20여명의 노동력을 감당한다고 하니 당시의 농민입장에서는 사람다음으로 애지중지 여겼을 것임은 자명하다.

율곡 이이는, 소는 살아서는 인간을 위하여 한평생 뼈 빠지게 일을 하고 죽어서도 고기를 내어주는 것을 보고,“이런 소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평생 동안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율곡의 제사상에는 지금도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데 율곡이 그만큼 동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인도의 힌두교 계율에도 ‘산 것을 죽이지 않고는 고기를 얻을 수 없다. 중생을 해치는 자는 결코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육식을 금하라’고 되어 있다. 회교 경전인 코란에서도‘죽은 동물의 피와 살을 먹지 말라.’고 되어 있다. 도교에서도 ‘입맛을 탐하여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석가모니 부처님 역시, 살아 있는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아힘사(Ahimsa)’, 즉 불살생(不殺生)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살아있는 중생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육식은 단지 후천적으로 생긴 습관에 불과하다. 우리는 육식을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내가 열반한 후 무량백세가 지나도 출가한 비구가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계율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음식에 대한 탐심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출가자가 아니다. 겉은 출가자의 모습이지만 사견으로 충만해 있어‘여래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했다’고 말할 것이다.”

또 가섭이 “무슨 이유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까?”라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육식하는 사람들은 그들 내면에 있는 위대한 자비심의 종자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육식하는 생명들은 서로 죽이고 서로 잡아먹는다… 이 생에서는 내가 너를 먹고, 다음 생에는 네가 나를 먹고 항상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고 하셨다.

대승경전인 <범망경>, <능엄경>, <능가경> 등에서도 살생과 육식은 돌이킬 수 없는 악업을 낳아 윤회를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된다고 설하고 있으며, <입능가경>에서는 “육식은 자비종자를 끊는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생사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비심(慈悲心)이 선행돼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삼정육(三淨肉)’이라 하여 3가지 깨끗한 고기는 먹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3가지 고기란 ① 나를 위해 죽이는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고기[不見] ② 나를 위하여 죽인 것이란 말을 듣지 않은 고기[不聞] ③ 나를 위하여 죽인 것이라는 의심이 되지 않는 고기[不疑] 를 말한다. 즉 ‘자신을 위하여 살생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승의 견해로는 남이 차려준 식탁에 놓여진 고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된다. 불견(不見), 불문(不聞), 불의(不疑)의 3가지 중 어느 하나도‘나를 위하여’의심이 가지 않는 그러한 ‘깨끗한’ 고기란 진실로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당시, 세속의 고기 먹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제자들을 위하여 첫째는 삼정육이라는 말로 마음을 달랜 것이고, 둘째는 삼정육의 그러한 깨끗한 고기가 없다는 사실을 경책으로 꾸짖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만 병든 수행자가 필요에 의해 꼭 고기를 약으로 써야 하는 경우에는 예외이나 그 경우에도 병든 수행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소승의 의견이다.

사실 식탁위에 고기가 놓여있다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 고기가 스스로의 입맛과 건강을 위해 준비된 음식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고기가 자신을 위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살생이 아니고 달리 무엇을 살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삼정육(三淨肉)’을 말씀하신 근본취지는 결국 고기를 먹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한편의 마음으로는 문을 열고, 다른 한 편의 마음으로는 문을 닫는 것과 같이 방편으로 설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일부 스님들이 삼정육에 대해서, 나를 위하여 잡은 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남이 잡은 고기는 먹어도 좋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삼정육을 거론하는 기세당당한 스님들이 고기 집에만 가면 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구석진 자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아닐까 한다.

또 어떤 스님은 소승에게 너무 채식만을 고집하지 말고, 대중이 원한다면 함께 육식을 하는 것도 분별심과 차별심에서 벗어나는 대승의 올바른 수행이라고 일갈한다. 그 바람에 소승이 공양을 할 때면 옆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가끔 왕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불교는 물론 힌두교, 기독교 등 대부분의 종교가 ‘살생을 하지 말라’를 계율로 정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하여 달리 거론하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생명은 하찮은 미물까지도 모두 소중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승은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살생을 하였다면 그것은 직접 살생이요, 죽은 고기를 먹었다면 그것은 간접 살생이 된다.’고. 이 개념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위 삼정육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두 ‘나를 위한 고기’이기 때문에 ‘깨끗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오랫동안 길들여진 입맛과 건강에만 좋다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육식하는 식습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살생을 하는 것이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업장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진정으로 수행하는 구도자라면 선방이나 토굴에서 번뇌 망념을 여의겠다고 몇 년씩 가부좌를 틀기 이전에 ‘혀끝의 미각부터 먼저 제도하는 것’이 차별심과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야말로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인데 이것 하나도 제도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가.

탐진치로 얼룩진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있음이 못내 아쉽다. 이러한 어리석은 중생들은 마치‘지옥행 비행기를 타고서 불국토에 가고자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우주만물이 한 치의 거짓 없이 준 대로 받는다는 불변의 원칙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창민스님 (부산 천불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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