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땅에 오신 날을 또한번 맞는다.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연등축제는 성황리에 회향됐다. 종단과 사찰, 불자들은 부처님 오심을 찬탄하는 다양한 봉축행사를 봉행하고 있다.

진리의 체험자로서, 완성자로서의 부처님은 본디 오시거나 가시거나 머무르거나 하는 동작이 있을 수 없다. 어디에서나 늘 모든 존재와 함께하는 자비스러운 지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생의 정서로는 “우리 가까이에 오신다”는 표현이 더 다가온다. 그래서 부처님의 열 가지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인 ‘여래(如來)’를 좋아하는 것일 게다.

부처님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위대한 선언을 하셨다고 알려져 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 제일 높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온누리 뭇 삶들이 괴롭게 살아가니 편안하게 해주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는 말이다. 불교의 근본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한다.

여타의 종교와 사상에서는 어쩐지 사람 자신을 조금 낮게 평가하는 데 비해 석가모니 부처님만 그렇지 않았다는 특별함이 있다.

우리 불자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불교신행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다. 실제를 말하자면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불교 경전에서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테라와다불교의 경전인 빠알리어 니까야의 <마하빠다나숫따>와 <앗차리야 아부따 담마숫따> 등에 의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하고 선구적이다. 마지막으로 태어났기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비바시불 등 과거칠불 모두가 그리 외쳤다고 한다. 과거 6불이 그러했기에 7불인 석가모니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탄생게와 테라와다불교에서 알고 있는 탄생게의 내용이 달라서 혼선을 주고 있다. 그 혼선은 경전의 편집자가 준 것이 아니라 경전을 이해하는 이들이 가진 것이다.

경전에서 설한 내용을 가지고 나중에 대승계열의 아쉬바고사(마명보살)이 지었다는 <불소행찬(붓다차리타)> 등의 부처님 전기기록이 발전하면서 앞의 ‘뛰어나고 훌륭하고 선구적’이라는 말은 ‘하늘 위 하늘 아래 제일’이라는 말로 꾸며졌다. 마지막으로 태어났기에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따라서 한다면 다른 뭇 삶들도 괴로움이 시작되지 않는 길을 보게 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편안하게’ 하고 ‘제도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며 가까운 존재인 가정과 이웃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더 멀리에 있는 사회구성원과 나라의 국민, 더 나아가 지구촌 가족과 동식물에게까지 깨달음의 빛과 그 원천인 자비(사랑)를 나눠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이 오신’ 뜻이다. 지혜와 자비의 등불을 켜는 이유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가정이요, 이웃이지만 교단적으로 말하면 사찰이요, 교구요, 종단이다.

봉축행사는 해마다 다채롭고 장엄물도 화려해지고 세계인이 찾는 행사로서 동참인원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화려함과 관행적으로 참여하는 연례행사로서 만족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가르침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서원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듬어 안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지향한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진정 선양할 수 있는 법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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