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현 (중앙포교원장 • 김해 해경사 주지)

▲ 지현스님

부처님 오신날은 세계 인류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기쁜 날이다.
그 이유는 생명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한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과 고통, 아픔이 있는 것이기에 행복을 갈망하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부처님은 몸소 깨달음에 도달하여 우리들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彿)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같은 거룩한 분이 아니 계시고,
시방세계 두루 살펴보아도
부처님 같은 거룩한 성현은 비유할 데가 없나이다.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아도
부처님 같은 대 성현은 없나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탄하고 환희로써 맞이하며 우리의 서원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요긴한 경구이다.

올해 불기 2560년의 부처님 오신날 봉축표어가 ‘자비로운 마음 풍요로운 세상’이다. 이 표어로써 전국의 사찰들과 신행단체들은 등불을 밝히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을 봉축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온 누리를 극락정토 화장세계로 변모시킨다.

올해 봉축표어를 ‘자비로운 마음 풍요로운 세상’으로 한 까닭은 온 인류에게 자비로운 마음이 전해질 때 세상은 평화와 행복으로 밝아지기에 자비의 씨앗을 널리 심고 가꾸자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이다. 그러므로 자비는 불교를 행하는 수행자나 불자들은 반드시 실천하고 이행해야 하는 덕목 중 하나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비(慈悲)를 하나의 낱말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자(慈)’와 ‘비(悲)’는 별개의 말이다. ‘자(慈)’란 귀여워한다는 의미로 범어(梵語)의 ‘마이트리’를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그 원어는 ‘미트라(친구)’라는 말에서 파생한 낱말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진실한 우정, 또는 순수한 친애의 념(念)을 뜻하는 말로서, 인도 일반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자’란 순수한 우정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깊이 감싸주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悲)’는 범어(梵語)의 ‘카루나(karuna)’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인도 일반에서는 애민(哀愍)이나 동정, 정감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비’란 상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하는 것 같은 깊은 애민의 정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이 범부중생에게 설법한 것은 곧 자비행(慈悲行)이며, 부처님은 또한 여러 곳에서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를 강조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근본을 자비에 두고 있다.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스님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수행자는 먼저 남을 구제할 서원(誓願)을 세워 선정과 지혜를 닦고, 도의 힘이 모이면 자비를 크게 펴서 고뇌하는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스님은 “닦아 가는 길이 한량없지만 자비와 인욕이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비는 수행의 완성을 위하여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중요시되었고, 그것은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섭행(攝行)의 실천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대승불교를 연구하여 그 기초를 확립해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한 용수(龍樹)존자의 가르침 중에 중생을 진정한 사랑으로 나누는 4가지 마음(四無量心)을 설하셨다. 즉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의미한다.

“매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지만 내 스스로가 자비의 작은 물방울이 되어 메마른 곳을 적셔주고자 발심(發心)을 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부처님의 세상, 즉 누구나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첫째, 자무량심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며, 둘째, 비무량심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다.
셋째, 희무량심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며, 넷째, 사무량심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처음에는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 대하여 이 마음을 일으키고, 점차로 친한 사람과 미운 사람에게까지 평등하게 이 마음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다.

불기2560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면서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가 보살임을 자각하고 일상이 곧 수행의 터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특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緣起)의 법칙,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경전의 말씀은 이 세상 어느 존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의 몸과 마음이 나의 몸과 마음에 다름 아님을 일깨우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교는 사람간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특히 자신과 아울러 타인을 자신처럼 보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의 실천 항목으로서 타인에 대한 사무량심(四無量心)을 강조하고 있다.
사무량심은 보살도의 실천으로서 흔히 자비의 종교라고 일컫는 불교의 근본정신임을 알고 타인에 대한 무량심은 곧 자신에 대한 무량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비심을 닦는 수행법으로 초기경전 가운데서도 <자애경(Metta Sutta)>은 다음과 같이 가르침을 전한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만족할 줄은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도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관이 안정되고 총명하며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남의 집에 가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다른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과 안락함을 염원해야 한다.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 짧고 가는 것이건, 또는 조잡하고 거대한 것이건 간에 어떤 생물이든 존재하는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존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 남을 골려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두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또한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 자비심을 행하라.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신성한 경지라고 부른다. 소견에 팔리지 말고, 계행(戒行)을 지키고 지견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람은 결코 다시는 모태(母胎)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자비심을 갖고 항상 이웃을 바라보고 도울 때 나에게도 자비가 돌아오는 것이다. 자비는 바다와 같다. 바다와 같이 큰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비구현을 위해 열심히 하다보면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매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지만 내 스스로가 자비의 작은 물방울이 되어 메마른 곳을 적셔주고자 발심(發心)을 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부처님의 세상, 즉 누구나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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