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경(比丘經)

[원문]
 

(六三六) 如是我聞 : 一時, 佛住巴連弗邑鷄林精舍.
爾時, 世尊告諸比丘 :“當為汝說修四念處. 何等為修四念處? 若比丘! 如來 ․ 應 ․ 等正覺 ․ 明行足 ․ 善逝 ․ 世間解 ․ 無上士 ․ 調御丈夫 ․ 天人師 ․ 佛世尊出興于世, 演說正法, 上語亦善, 中語亦善, 下語亦善, 善義善味, 純一滿淨, 梵行顯示. 若族姓子 ․ 族姓女從佛聞法, 得淨信心. 如是修學, 見在家和合欲樂之過, 煩惱結縛, 樂居空閑, 出家學道, 不樂在家, 處於非家, 欲一向清淨, 盡其形壽, 純一滿淨, 鮮白梵行 :‘我當剃除鬚髮, 著袈裟衣, 正信非家, 出家學道.’ 作是思惟已, 即便放捨錢財親屬, 剃除鬚髮, 著袈裟衣, 正信非家, 出家學道, 正其身行, 護口四過, 正命清淨, 習賢聖戒, 守諸根門, 護心正念. 眼見色時, 不取形相, 若於眼根住不律儀, 世間貪憂 ․ 惡不善法常漏於心, 而今於眼起正律儀 ; 耳 ․ 鼻 ․ 舌 ․ 身 ․ 意起正律儀, 亦復如是.”
“彼以賢聖戒律成就, 善攝根門, 來往周旋, 顧視屈伸, 坐臥眠覺語默, 住智正智. 彼成就如此聖戒, 守護根門, 正智正念, 寂靜遠離, 空處 ․ 樹下 ․ 閑房獨坐, 正身正念, 繫心安住. 斷世貪憂, 離貪欲, 淨除貪欲 ; 斷世瞋恚 ․ 睡眠 ․ 掉悔 ․ 疑蓋, 離瞋恚 ․ 睡眠 ․ 掉悔 ․ 疑蓋, 淨除瞋恚 ․ 睡眠 ․ 掉悔 ․ 疑蓋. 斷除五蓋惱心, 慧力羸 ․ 諸障閡分 ․ 不趣涅槃者, 是故, 內身身觀念住, 精勤方便, 正智正念, 調伏世間貪憂 ; 如是外身 ․ 內外身, 受 ․ 心 ․ 法法觀念住, 亦如是說. 是名比丘修四念處.”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파련불읍(巴連弗邑) 계림정사(鷄林精舍)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을 위해 사념처(四念處)를 닦는 것에 대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사념처를 닦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래(如來), 응공(應供), 등정각(等正覺),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실 땐, 맨 처음의 말씀도 훌륭하고 중간의 말씀도 훌륭하고 맨 마지막의 말씀도 훌륭하시며, 훌륭한 이치와 훌륭한 뜻이 순전하게 원만 청정하여 범행(梵行)을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만일 족성자(族姓子 : 善男子)와 족성녀(族姓女 : 善女人)들이 부처님에게서 법을 들으면 깨끗한 신심(信心)을 얻어 이와 같이 닦고 배울 것이다.

가정생활은 향락과 결합한 허물이고, 번뇌의 결박임을 보고, 텅 비고 한가한 곳에서 살기를 좋아하여 출가해 도를 배우며,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집 아닌 곳[非家]에 살면서, 한결같이 청정하고자 하여, 그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순전하게 원만 깨끗하면, 청정한 범행을 닦게 될 것이다. 즉 ‘나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서 바른 믿음으로 집 없는 데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자.’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재물과 친족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서 바른 믿음으로 집 없는 데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되, 몸의 행을 바로 하고, 입의 네 가지 허물[四過]를 단속하며, 바른 생활로 청정하고, 성현의 계를 익히며, 모든 감관[根門]을 지켜, 마음을 단속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 눈으로 빛깔을 볼 때도 그 형상을 취하지 않나니, 만일 눈이 율의(律儀)가 아닌 것[不律儀]에 머무르면 세간의 탐욕과 근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항상 마음에서 새어나온다. 그러나 그는 눈에서 바른 계를 일으키나니, 귀 ․ 코 ․ 혀 ․ 몸 ․ 뜻에서 바른 계를 일으키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는 성현의 바른 계를 성취함으로써 감관을 잘 거두어 잡아, 가고 오고 돌아다니고 돌아보기와 굽히고 펴고 앉고 눕기와, 자고 깨고 말하고 잠잠하기를 모두 지혜에 머물러 지혜를 바르게 한다. 그는 이러한 성인의 계를 성취하여, 감관을 지켜 단속하고 바른 지혜와 바른 기억으로 고요히 세간을 멀리 떠나, 쓸쓸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고요한 방에 홀로 앉아, 바른 몸과 바른 생각으로 마음을 집중해 편안히 머무르며,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끊고, 탐욕(貪欲)을 떠나 탐욕을 깨끗이 버린다.

또 세간의 진에개(瞋恚蓋) ․ 수면개(睡眠蓋) ․ 도회개(掉悔蓋) ․ 의개(疑蓋)를 끊고, 진에개 ․ 수면개 ․ 도회개 ․ 의개를 떠나, 진에개 ․ 수면개 ․ 도회개 ․ 의개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마음과 지혜의 힘을 약하게 하는 모든 장애로서 열반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오개(五蓋)의 번뇌를 끊어 없앤다.

그러므로 안의 몸을 몸 그대로 관찰하는 생각에 머물러,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바른 지혜와 바른 기억으로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항복 받아야 하고, 이와 같이 바깥의 몸과 안팎의 몸을 몸 그대로 관찰하는 생각에 머물러야 하나니, 느낌 ․ 마음도 마찬가지며, 법을 법 그대로 관찰하는 생각에 머무는 것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하리라. 이것을 비구가 사념처를 닦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24 제636경 <比丘經>(T2 p.176a-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47:3 Bhikkhu-sutta(SN Ⅴ, pp.142-144)이다.

이 경은 붓다가 사념처(四念處) 수행에 대해 여러 비구들에게 설한 것이다. 이 경을 설하게 된 배경과 설법 장소는 ≪상윳따 니까야에≫와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핵심 내용은 동일하다.

≪잡아함경≫에서는 이 경을 붓다께서 파련불읍(巴連弗邑) 계림정사(鷄林精舍)에 계실 때 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련불읍 계림정사란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 華氏城)의 꿋꾸따라마(Kukkuṭārāma)를 번역한 것이다. 중국의 구법승 현장(玄奘)은 꿋꾸따라마가 빠딸리뿟따의 고대 도시 동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아소까(Asoka)왕이 불교로 개종한 뒤 처음으로 지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이 경을 사왓티(Sāvatthi)의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원림(給孤獨園)에서 설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어떤 비구가 붓다를 찾아와 명상주제(kamma-ṭṭhāna)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이 경을 설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붓다는 본격적인 사념처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출가자로서의 마음가짐과 율의(律儀)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출가자라면 몸의 행을 바로 하고, 입의 네 가지 허물[四過], 즉 거짓말[妄語] ․ 교묘하게 꾸민 말[綺語] ․ 이간질하는 말[兩舌] ․ 나쁜 말[惡口]를 단속하며, 바른 생활로 청정하고, 성현의 계를 익히며, 모든 감관[根門]을 지켜, 마음을 단속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

눈으로 빛깔을 볼 때도 그 형상을 취하지 않나니, 만일 눈이 율의(律儀)가 아닌 것[不律儀]에 머무르면 세간의 탐욕과 근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항상 마음에서 새어나온다. 그러나 그는 눈에서 바른 계를 일으키나니, 귀 ․ 코 ․ 혀 ․ 몸 ․ 뜻에서 바른 계를 일으키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고 붓다는 가르쳤다.

여기서 ‘모든 감관[根門]을 지킨다’는 것은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인 육근(六根)의 감각기관을 지켜 외부의 대상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단속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갖 번뇌가 마음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율의(律儀)가 아닌 것[不律儀]’이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규정된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세간의 탐욕과 근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감관을 단속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사념처 수행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제로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에 앞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이 계청정(戒淸淨, sīla-visuddhi), 즉 도덕적 행위의 청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청정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서 향상(向上)을 이루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도덕적 행위[戒]가 청정해졌을 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죄의식이 없을 때,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따라서 그는 어렵지 않게 마음집중[定]을 얻게 된다. 그런 다음에 꿰뚫어보는 지혜[慧]가 생겨나게 된다.

이와 같이 사념처 수행을 비롯한 불교의 모든 수행은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출가자가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 계율을 지키지 않고 건전하지 못한 행위, 즉 불선법(不善法, akusala-dhamma)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가 이 경에서 설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 바른 믿음으로 집 없는 데로 출가한 본래 목적을 잊어버렸다면, 그는 이미 사문이라고 부를 수 없다.

또한 이 경에서는 사념처 수행을 위해서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 경에서 말한 다섯 가지 장애는 탐욕(貪欲) ․ 진에(瞋恚) ․ 수면(睡眠) ․ 도회(掉悔) ․ 의개(疑蓋)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장애의 정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다섯 가지 장애란 ⑴ 음탕한 욕망(kāmacchanda, 愛欲), ⑵ 악의, 증오, 분노(vyāpāda, 瞋恚), ⑶ 무기력과 권태(thīna-middha, 昏沈), ⑷ 초조와 근심(uddhacca-kukkhucca, 掉擧), ⑸ 회의적인 의심(vicikicchā, 疑心)이다. ⑴ 과 ⑵ 는 계학(戒學)을 방해하고, ⑶ 은 혜학(慧學)을 방해하며, ⑷ 는 정학(定學)을 방해하고, ⑸ 는 사성제(四聖諦)를 의심하는 것으로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방해한다. 이 다섯 가지는 어떤 종류의 진전에도 장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다섯 가지에 압도되거나 그것들을 어떻게 벗어나는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옮음과 그름 혹은 선과 악을 이해할 수 없다.

사념처 수행의 핵심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물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물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물고, 현상에서 현상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이른바 몸[身] ․ 느낌[受] ․ 마음[心] ․ 법[法]에 관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를 말한다.

붓다는 다른 경전에서 정신과 육체의 현상에 대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마음을 챙기라고 가르쳤다. 마음과 몸의 과정에 대해 알아차리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⑴ 육체적인 과정에 대한 마음챙김(kāy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身念處), ⑵ 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vedan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受念處), ⑶ 마음(의식)에 대한 마음챙김(citt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心念處), ⑷ 법(현상)에 대한 마음챙김(dhamm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法念處)이다.

이 경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안의 몸을 몸 그대로 관찰하는 생각에 머물러,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바른 지혜와 바른 기억으로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항복 받아야 하고, 이와 같이 바깥의 몸과 안팎의 몸을 몸 그대로 관찰하는 생각에 머물러야 하나니, 느낌 ․ 마음도 마찬가지며, 법을 법 그대로 관찰하는 생각에 머무는 것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것을 비구가 사념처를 닦는 것이라 한다.”고 설해져 있다.

흔히 사념처 수행을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부른다. 위빳사나 수행의 원리는 모든 정신적 ․ 육체적인 현상들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알아차리는 수행은 아주 단순하고 쉬울 뿐만 아니라, 괴로움을 소멸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 동작에 대해 알아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적인 과정이 완전히 자각되어야만 잘못된 견해의 원인인 무지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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